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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가 며칠 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인 교수는 이 글에서 요즘 성도들을 선동하며 쥐락펴락 하는 목사들의 괴이한 장면이 나오게 된 현상의 원인을 분석해 눈길을 끌었다.
가끔 교회나 유관 기관에 강의할 때가 있다던 그는 "요샌 가급적 고사한다"며 그 이유로 "좀 두려워서다. 생각보다 수용성이 무척 높은 청중들 때문이다. 믿을 준비를 하고 모이신 분들 앞에서의 강의는 특별하되 두렵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20년넘게 해 온 공무원 강의는 집중력 유지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반론과 질문이 넘쳐나는 세미나 발표 때는 전의를 불태우며 긴장한다"며 "반면 '믿을 준비'하고 시간내어 모여 있는 분들 앞에 서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무조건 믿어주며 신뢰를 보내는 표정과 반응에 당의정 한 움큼 쏟아넣는 느낌이 들곤했다. 의무교육 받는 공무원들 집중시켜가며 하는 강의에 비하면... 이 착한 성도들 앞에서의 강의는 중독될만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때 알았다. '아. 목사님들, 특히 언변이나 성품이 좋고 매력 있으신 분들은 정말 위험하겠구나. 첫 마음 끝까지 가져가기 힘들겠구나' 싶었다"라며 "평생 자기 말에 '아멘'하며 고개 끄덕여주고, 큰 제동 장치 없이 기꺼이 수용해주는 분들 앞에 매주 서다보면 스스로 타락하기 쉽지 싶었다"고 전했다.
인 교수는 "이건 항우장사라도 못견디는 거다. 요즘 성도들을 선동하며 쥐락펴락하는 목사들의 괴이한 장면들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게 아니다"라며 "처음에는 크게 이상하지 않게 시작했으나, 어쩌면 아멘으로 화답하며 무조건 수용했던 청중들이 그 괴이함을 스스로 배양한 것일지 모른다"고 했다.
수용성 높은 신도를 양산해 내는 구조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 신앙의 "확신"이라고도 주장했다. 인 교수는 "청중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린시절에는 '확신'이 믿음의 본령인 줄 알았다. 강단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했고, 의심은 신앙의 토대를 갉아먹는 해충이었다"고 했다.
인 교수는 또 "칼빈주의 교리를 열심히 외우고, '환난과 핍박중에도'를 불렀다. 환난과 핍박은 로마가톨릭과 공산주의로부터 올 것이기에 순교자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배웠다"며 "대학 입학전까지 레드 컴플렉스와 교황에 대한 적대감은 엄청났다. 외부에서 교회를 대적하는 숱한 적들을 마주하며 파수꾼의 경성함을 속으로 읊조렸다. 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 조직신학책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을 밑줄 쳐가며 외우고 공부했다. 현대판 십자군 정체성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이들어 돌아보니 확신의 반대로 여겨왔던 의심이 "마냥 부정적인 요소가 아니었다"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다고 밝혔다. 인 교수는 "질문없는 무조건적 수용과 확신이야말로 참된 신앙을 녹슬어 망가뜨리는 좀과 동록이 아닐까 싶었다"며 "하나님 말씀, 계시 앞에서 '과연 그런가 하여' 더 깊이 고민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은 꼭 불경한 것은 아닐게다. 신이 인간에게 추론의 이성을 주셨다면 그 기제를 사용하여 조금 더 진리의 해상도를 높여가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신의 섭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 아닐까?"라고 했다.
끝으로 그는 "신앙의 도는 '확신'보다 '질문'에 있어야 한다. 질문 하나가 점 하나다. 계시가 삶을 통해 경험되며 점 하나씩 화폭에 채워나가는 점묘법의 그림을 그려나가야 한다"며 "때로는 잘 맞지 않고, 이해가 가지 않는 색깔의 점이 찍혀도, 어느 순간 마치 매직아이처럼 한 눈에 큰 그림이 들어오는 경험이랄까. 적어도 내 신앙의 궤적은 이렇게 그려지리라 생각한다"며 글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