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사 49:1-6, 행 1:6-11, 요 14:21-28)
[교회가 왜?]
어제와 그제, 당회는 1박 2일 동안 워크샵을 가지고 우리 향린의 당면 과제와 중장기 계획들을 논했습니다. 프로그램의 하나로 커뮤니케이션 전략, 캠페인 디렉팅을 전공하시고 대학에서 '브랜드 마케팅 기획, 광고PR론' 등을 강의하시는 이문희 교우를 모셔서 우리 교회의 이모저모를 살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주 깔끔한 자료로 프레젠테이션을 해 주셨는데, 1년여 정도 출석하신 새 교우의 관점에서 기존의 일반적인 한국의 많은 교인들이 우리 교회를 보고 할만한 이런 질문들을 던져 주셨습니다.
"교회가 왜, 성역 같은 '이스라엘'을 용기 있게 규탄하는가?"
"전도와 구원을 외치기도 겨를이 없는데 교회가 왜, 지구와 기후 위기 문제에 앞장서는가?"
"교회가 왜, 새벽송으로 교인들의 집이 아닌 세월호 유족과 이태원 희생자 유족을 위로하러 가는가?"
"교회가 왜, 노동자 고공 농성장에 도시락 배달을 쉬지 않는가?"
"왜, 규모의 성장은 절제하고 별도의 교회로 독립을 시키는가?"
일반 교인들이 생각하는 교회는 "전도를 많이 해서 교회를 키우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현세에서도 성공을 하도록 돕는 곳"인데, 그게 바로 기독교인데, 그들 눈에 향린교회는 이상한 교회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문희 교우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상식이 아닌 예수의 상식으로 보면 진정한 답이 보인다."
그렇습니다. 향린교회는 탄생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방향을 튼 적이 없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대형 교회처럼 되어 갔을 때도, 향린의 사회 선교는 줄기차게 이어졌고,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고 약해졌을 때도 예수님 서 계신 곳에 서려고 하는 그 자세만큼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세계가 불타고 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날을 맞아 이렇게 편안한 공간에서 함께 예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대한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는 일이 정말 무거운 짐이고, 그래서 화면을 끄고 싶어지지만, 끄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더 불편합니다. 보지 않는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휴전을 협상하고, 전쟁 종식을 논의하는 중에도 중동은 계속 화염 속으로 빠져들고 있고, 가자지구에서는 집단학살이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가자에서 벌어지는 일은 단지 폭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현대판 제노사이드(Genocide)인 네타냐후의 인종 말살 정책과 봉쇄로 인해 가자지구 인구의 90% 이상인 약 190만 명이 집을 잃고 텐트 등 임시 거처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국제 식량안보 기구의 분석에 따르면 2026년 6월까지 가자지구의 다섯 살 미만 아이들 13만 명 이상이 급성 영양실조에 놓일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폭탄이 떨어지지 않는 순간에도, 아이들의 몸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전쟁을 겪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아이들이 죽어가는 동안 세계의 강대국들은 자국의 이익을 계산하느라 분주합니다.
전 세계 평화 활동가들은 구호 선단(Freedom Flotilla) 조직하여 지중해를 통한 해상 구호 활동과 국제 연대 시위 등 가자 지구를 위해 다양한 비폭력 직접 행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네타냐후는 이들을 강제로 연행하고 범죄자처럼 취급했습니다. 한국인 평화 활동가 해초, 동현, 승준 씨도 국제 구호선단의 일원으로 평화 항해에 나섰다가 이스라엘군에 의해, 가자지구로부터 48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공해상에서 나포되었습니다. 다행히 지난 5월 22일, 동현·해초 씨가 귀국했고, 승준 씨도 같은 날 튀르키예에 도착했는데, 이들은 결박과 이송, 감금과 추방의 과정에서 어떤 경고나 정당한 절차도 없이 폭력을 겪었다고 증언합니다. 동현 씨는 근육이 파열된 상태로, 해초 씨는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1991년 세계를 위한 기도 모임에서 시작된 평화 봉사 단체 "개척자들"의 일원이기도 한 해초 씨가 귀국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가자지구가 고립돼 있고 협상 이후에도 많은 사람이 폭격 때문이 아니라 사실 기아로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곳에 사람이 있기 때문에 중동 상황과 정세가 위험하더라도 다시 한번 항해를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저희가 나포당했던 방식이나 혹은 저희가 머물렀던 감옥 등이 사실 팔레스타인 사람들, 지금 9천 여명의 사람들이 감금되어 있는 감옥시설과 비슷한 곳이었어요. 비록 저희가 이렇게 구타당하고 뼈가 부러지고 혹은 테이저건 같은 전기 충격이나 고무탄 같은 총격을 받기는 했지만, 저희보다 훨씬 더 가혹한 절차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다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가자에서 사망하는 이유가 기아라는 것이, 얼마나 그 고립된 상태가 인간의 삶의 영향을 크게 끼치는지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해초는 자신이 당한 고통 앞에서, 자신보다 더 가혹한 처지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향린의 사회 선교는 바로 이런 마음으로부터 시작되고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세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태에서부터]
오늘 제1성서 본문은 제2이사야 두 번째 종의 노래입니다. 기원전 6세기,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던 시절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민족이 가장 낮은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종을 부르셨고, 야훼의 종은 그 부르심에 순명합니다. 종이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1절)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본문에는 '모태에서부터', '태 속에서부터'라는 말이 반복됩니다(1, 5절). 우리가 결단하기 전에 하나님의 부름이 먼저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종이 이런 말도 합니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4절)
이 고백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의 백성들(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고 말씀하셨는데, 소명을 받은 종이, "헛수고 같았다"고 합니다. 결실이 보이지 않는다고, 힘을 허비했다고, 탄식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탄식을 잘 압니다. 정의를 위해 애썼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고, 평화를 외쳤지만 전쟁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 피로감과 허탈감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우리 향린입니다. 향린이 해 왔던 수많은 일들이 곧바로 멋진 승리나 해결책으로 돌아온 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이 세상을 곧바로 구원한 것도 아니고, 여전히 전쟁과 불의, 폭력이 가득한 세상이니 이런 심정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소명의 취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소명의 확장입니다.
"네가 내 종이 되어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신앙의 백성들(이스라엘)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네게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땅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6절)
"야곱의 회복만으로는 너에게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더 넓게, 더 멀리, 뭇 민족의 빛이 되어라."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헛수고처럼 느껴지는 그 자리에서, 소명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넓어집니다. 하나님은 신앙 백성의 회복을 가볍게 여기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회복이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뭇 민족에게까지 흘러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름은 특권이 아니라 통로입니다. 선택은 배제가 아니라 파송입니다.
오늘 오후 향린 뜰에서 여러분이 만나실 열 개의 선교 단체들이 바로 이 소명의 현장입니다. 팔레스타인 평화연대는 전쟁과 점령 앞에서 평화를 묻습니다. 노들장애학궁리소는 장애인의 탈시설과 존엄한 삶을 묻고, 우리함께다문화지역아동센터는 이주노동자 자녀들의 내일을 함께 걷습니다. 제3시대기독교연구소와 한국민중신학회는 민중신학의 물음을 오늘의 언어로 잇고, 남다른성교육연구소와 같이걸을까는 성평등과 퀴어 그리스도인의 존엄을 증언합니다. 길목 심심은 지친 이들의 마음을 돌보고, 기독교 평신도 행동은 평신도의 주체적 신앙을 일굽니다. 이 모든 자리가 "뭇 민족의 빛"이라는 소명이 오늘 우리 가운데 얼굴을 얻는 자리입니다.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마지막 질문을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신앙의 자녀들(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6절)
여러분! 이 질문의 구조를 잘 살펴보십시오.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 우리 공동체, 우리의 회복. 예수님과 함께 3년을 걸어왔음에도, 질문이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종종 이런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우리 교회가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까. 그러나 제자들의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살던 이들에게 주권과 국권의 회복은 해방의 질문이었고, 정의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질문을 더 넓은 자리로 옮깁니다. "언제입니까?"라는 시간의 질문에서, "어디에서 어떻게 증언할 것인가?"라는 사명의 질문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때나 시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7-8절)
때를 묻지 말고, 능력을 받아라. 안으로만 보지 말고 밖으로 나가라. 너희 자신 안에 갇히지 말고, 발등만 보지 말고 땅끝까지 보아라.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승천하십니다. 제자들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올라가시는 방향을 하염없이 쳐다봅니다. 그때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묻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11절)
두 가지가 동시에 선포됩니다.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그리고 "예수는 그대로 오실 것이다." 재림의 약속과 더불어 하늘을 향해 들고 있는 눈을 내려 땅을 보라는 명령이 함께 옵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초대교회가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를 외쳤을 때, 그것은 이 세상에서 손을 떼겠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오실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약속의 힘으로 지금 여기서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선포였습니다.
바울이 주님의 오심을 말할 때 쓴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재림을 뜻하는 단어로 알려진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입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 용어가 아닙니다. 당대에는 통치자나 고위 인물의 공식 방문, 권력자의 도착을 가리킬 때, 특히 로마 황제가 속주를 순시할 때 쓰던 말이었습니다. 황제의 '행차'입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뒤집어 예수에게 씁니다. "진짜 주님이 오신다, 그러니 황제를 두려워하지 말라." 사도행전의 재림 약속도 같은 구조입니다. 오늘로 치면 이렇게 됩니다. 가자를 학살하는 점령군 앞에서, 이란과 미국의 전쟁 앞에서, "진짜 주님이 오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증인으로 서 있어라."
전 세계 평화 활동가들은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한국 평화 활동가 세 분도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세 분이 나포됐을 때 외교부가 해초 씨의 여권을 무효화하는 조치까지 취했습니다. 그래서 귀국 후에도 병원에서 건강보험 처리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부당함 앞에서도 세 분은 가장 먼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자신의 고통이 더 큰 고통과 연결돼 있음을 알고, 그러하기에 증언을 멈추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증인의 삶입니다. 증인은 자신이 목격한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보고 들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사는 이들이 많이 있고, 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세상과는 다른 평화]
요한복음서 14장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나누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두렵습니다. 스승을 잃는다는 공포,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불안. 그 두려움 앞에서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보혜사, 곧 하나님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26절)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보혜사. 글자 그대로 풀면 '곁에 불러 세운 자'입니다. 법정에서 변호사처럼, 위기의 현장에서 함께 서 주는 사람. 예수님이 떠나신 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제자들의 곁에, 보혜사 성령이 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27절)
"남겨 준다", 이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떠나시면서도, 평화를 남겨 두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재하는 자리에서도, 그 평화는 여기 있습니다.
세상의 평화와 예수의 평화! 무엇이 다를까요? 예수님 당시에도 세상은 평화를 말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왔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군대가 만든 평화였습니다. 반란을 진압하고, 약자를 침묵시키고, 식민지 백성에게 조용히 복종하라고 요구하는 평화였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는 그런 평화가 아닙니다. 예수의 평화는 억압받는 이들의 입을 막아 얻는 고요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의 곁에 서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힘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갈등의 부재입니다. 문제가 없는 상태, 내 주변이 조용한 상태, 나만 괜찮으면 되는 평화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자지구에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나의 일상이 별 탈 없이 돌아간다면 그것이 세상이 말하는 평화입니다. 팔레스타인이 학살당해도, 이주노동자 자녀가 차별받아도, 퀴어 그리스도인이 교회에서 내쫓겨도, 내 밥상이 차려진다면 평화롭다고 느끼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평화가 아닙니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입니다.
예수의 평화는 다릅니다. 고통받는 이의 곁에 서 있을 때 오는 내면의 힘입니다.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입니다. 위험한 바다로 나가면서도 자신이 왜 거기에 있는지 아는 사람의 그 고요함. 그것이 예수께서 남겨 주신 평화입니다. 연대(連帶)라는 말의 대(帶, 띠 대)는 서로를 묶는 띠를 가리킵니다. 연대는 잠깐 뜨거워지는 감정이 아닙니다. 함께 묶인 채 오래 버티는 훈련입니다. 그래서 연대에는 기도도 필요하고, 공부도 필요하고, 후원도 필요하고, 때로는 현장에 서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단순히 돈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묶이는 것. 오늘 오후 선교박람회에서 여러분이 각 부스를 방문하고 활동가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 띠를 맺는 일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바로 우리를 묶어주는 그 띠의 근원이 됩니다. 예수께서 떠나신 뒤에도 제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각자의 현장에서 서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보혜사의 힘이었습니다.
퀴어 그리스도인들의 상처 입은 곁에 서는 같이걸을까, 싸우다 지친 활동가들의 마음을 돌보는 길목 심심, 이것이 파라클레토스의 실천입니다. 곁에 불려 세워진 이들의 사역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이 말씀이 이 현장에서 살아납니다.
[오늘 오후, 향린의 뜰에서]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우리 향린교회는 지난 73년 동안 오늘 우리에게 주신 세 본문의 말씀을 붙들고 걸어 왔습니다.
이사야의 "뭇 민족의 빛"을 따라, 자기 신앙 회복에 머물지 않고 시대가 요청할 때마다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의료선교, 도시산업선교, 노동자 인권, 분단 극복, 생명·환경 선교, 소수자 차별 반대, 이주민 연대, 젠더 정의, 많은 교회가 자기 밥그릇만 챙기며 자기 보존의 울타리 안에 머물 때에도, 향린은 고통 받는 이웃의 자리로 나아가려 애써 왔습니다. 사도행전의 "땅끝에까지"를 따라,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고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는 천사의 물음을 마음에 새기고, 각 시대의 고통받는 현장으로 내려갔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말하듯 "세상과는 다른 예수의 평화"를 힘입어, 두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민중들 곁에 서 왔습니다.
오늘 오후 선교박람회는 이런 노력들을 이어가려는 자리입니다. 단순히 선교 단체를 소개하는 행사가 아닙니다. 우리 향린은 1인 1사회단체 후원하기라는 활동도 했었습니다. 오늘 선교박람회를 통해서 여러분이 생활 선교사로 부름받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선교사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한 부스 앞에서 활동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는 사람입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함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가진 전문성, 시간, 공간, 식탁 하나를 내어놓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현장을 '그들의 문제'라고 부르지 않고, '우리의 기도 제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모든 선교에는 반드시 재정이 필요하지만, 재정 후원만으로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우리의 시간을 내어 주며, 마침내 그들의 현장에 우리의 삶이 닿을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부스를 방문하실 때 이것을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함께할 수 있을까요?" 이 물음이 선교의 시작입니다.
동현·해초·승준님도 배에 오르기 전에 수없이 물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팔레스타인과 함께할 수 있는가." 그 물음이 그들을 공해 위의 배로 이끌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가자행 배를 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오후, 각 부스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물음을 물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오후 우리가 내딛는 작은 발걸음도 이와 같습니다. 마가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두 비유를 함께 기억해 봅시다.
하나는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입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자라는 동안, 농부는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씨는 자랍니다. 그리고 결국 결실합니다. 또 하나는 겨자씨 비유입니다. 가장 작은 씨처럼 보이지만, 마침내 새들이 깃드는 나무가 됩니다. 우리의 작은 참여가 어떤 숲을 이룰지, 우리는 지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렇게 자랍니다.
[선교의 항해를 멈추지 말자]
이사야의 종은 "헛수고 같았다"고 탄식했지만, 하나님은 소명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뭇 민족의 빛"으로 넓히셨습니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는 물음을 듣고 시선을 바꾸었습니다. 땅으로, 세상으로, 땅의 끝으로 나아갔습니다. 요한복음의 보혜사는 예수께서 남겨 주신 평화를 지니고 지금도 고통의 현장 곁에 서 계십니다. 평화 활동가들은 몸이 성하지 않은 채로 귀국하면서도 말했습니다. "항해는 멈추지 않겠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먼 바다로 나가 배를 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물을 수는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 한 사람의 곁에 설 수 있습니다.
천사들이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향린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 모두 땅끝을 향하여, 이웃에게로, 고통받는 세계의 한복판으로 나아갑니다.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에게 내리시면, 여러분은 능력을 받습니다.
보혜사께서 여러분 곁에 서 계십니다.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십시오.
이제 시선을 낮추고 연대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뭇 민족의 빛, 땅끝의 증인이 됩시다.
세상은 모르는 예수의 평화를 누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