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 창세기 26:17-22, 데살로니가후서 1:3-5, 요한복음 4:11-14 -
설교문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저마다 우물을 팝니다. 가정을 위해 우물을 파고, 자녀를 위해 우물을 파고, 학교와 직장과 공동체를 위해 우물을 팝니다. 그런데 문제는 애써 판 우물이 어느 날 메워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성서 본문의 이삭이 바로 그런 일을 당한 사람입니다.
창세기 26장에는 이삭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이 실려 있습니다. 사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아들 야곱과 비교할 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인물은 아닙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히브리인들의 조상이자 구약시대 최대의 족장입니다. 아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밤새워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며 결국 '이스라엘', 곧 '하나님을 이겼다'라는 뜻의 새 이름을 얻어낸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삭의 생애를 돌아보면 특별한 점이 없어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 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 산의 사건(창세기 22장)에서도 당사자인 이삭은 그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산에 오른 한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이처럼 이삭은 아버지와 아들의 명성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눌려 있는 존재로 보입니다. 우리는 그를 '그저 그런 인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해입니다. 만일 이삭이 없었다면 히브리 신앙은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단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과정적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신앙의 강줄기에서 하나의 독자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요?
창세기 26장입니다. 이삭이 열심히 일해 잘 사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갑자기 살던 땅에서 내쫓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원래 아버지 아브라함이 살던 브엘라해로이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흉년이 들자 이삭은 기근을 피해 블레셋 왕 아비멜렉(Ǎḇîmeleḵ)이 다스리는 그랄(Gerar) 땅으로 이주합니다. 그랄은 곡창지대입니다. 이삭은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 그해 무려 백 배의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재산이 점점 늘어 아주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기근의 위기를 벗어나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엄청난 재앙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삭이 이룩한 풍요의 근원을 막아버렸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판 모든 우물을 흙으로 메워 버렸습니다. 당시 우물은 생명줄입니다. 그것을 막고 흙으로 메웠다는 것은 이삭과 그의 가족은 물론, 그와 연결된 모든 과거의 역사와 미래의 가능성까지 송두리째 막아 메워 버리는 일입니다. 이삭은 이제 조상의 면목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손의 생존조차 기약할 수 없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때 설상가상으로 그 땅을 지배하던 아비멜렉이 찾아와 '이곳을 떠나라'라고 말합니다. 농사짓던 땅을 그대로 놓고 나가라는 말은 곧 죽으라는 소리였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삭이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삭은 울분과 불안에 휩싸여 아무것도 못 하는 나약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메워져 버린 우물가를 툴툴 털고 일어섰습니다. 만약 그가 그때까지 자신이 일구어 놓은 것에 집착했다면 그는 거기서 무너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자신의 노력과 결실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툴툴 털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빈손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루어놓은 것보다도 하나님이 열어놓으시는 미래를 더욱 믿었기에, 빈털터리로 떠나도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소년 시절 모리아 산에서 겪었던 충격과 감동이 평생 그를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모리아 산 위에서의 일을 기억하시는지요. 창세기 22장에 기록된 유명한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다음에,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창세기 22:6-8)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백 세에 얻은 사랑하는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아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면서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이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수풀에 걸린 숫양 한 마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숫양으로 아들 대신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불렀습니다.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경험은 이삭의 평생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우물이 메워져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물보다 더 깊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우물을 막을 수 있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미래까지 막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건 우리의 새로운 미래입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예레미야 29:11)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삭은 알았습니다. 자기가 힘써 이루어놓은 것보다 하나님이 새로 열어젖히시는 복된 미래를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메워 버려도 주저 없이 그곳을 떠나 새 우물을 팠습니다.
물론 시련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새 우물을 탐낸 사람들이 또다시 몰려와 그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이삭은 또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새 우물을 파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조금 살 만하면 새로운 시련과 역경이 찾아오는 게 우리의 인생인가봅니다. 하지만 이삭의 우물 파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에섹'(Esek), 즉 '다툼'이라는 뜻의 우물이 막히고, '싯나'(Sitnah), 곧 '대적함'이라는 뜻의 우물이 막히자, 이삭은 다시 새 우물을 팠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삭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가 살 곳을 넓히셨으니, 여기에서 우리가 번성하게 되었다."(창세기 26:22) 그리고 그 우물을 '르호봇'(Rehobot)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르호봇'이라는 말은 '넓음' 혹은 '넓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공간을 넓게 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숨 쉴 공간을 터주셨다'라는 뜻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의 말처럼, "마침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을 활짝 열어주셨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삭과 그의 후손들이 살아갈 광활한 생명의 터전을 열어주셨습니다.
오늘은 이화의 창립 140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지난 140년 이화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화의 역사는 꼭 이삭의 우물 파기 신앙의 역사로 보입니다. 이화학당의 초기 당장들에게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늘 준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기 생전에 결과를 다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늘 새 우물을 팠습니다. 당장 눈앞의 성과보다 '백 년 뒤에도 필요한 것'을 준비했습니다.
1대 당장 메리 스크랜튼은 아무도 조선 여성의 교육 가능성을 믿지 않던 시대에 이화학당의 문을 열었습니다. 학생은 단 한 명뿐이었고, 사람들은 여성이 글을 배우면 가정을 무너뜨린다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앞의 성공 여부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조선의 여성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엄한 인간으로 서게 될 날을 믿으며 작은 교실 하나를 열고 한 사람의 학생을 품었습니다. 스크랜튼이 세운 것은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한국 여성의 미래를 위한 첫 우물이었습니다.
2대 당장 루이자 로스와일러는 학교가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불안정한 시기에 이화를 맡았습니다. 재정도 부족하고 교육 체계도 미비했지만, 그는 눈에 띄는 성과보다 오래 지속될 교육의 기초를 닦는 일에 힘썼습니다. 교과과정과 규율을 정비하고 학문의 토대를 세워, 미래 세대가 안정적으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화려한 건물을 세운 사람이 아니라, 오래 무너지지 않을 기초를 놓은 사람이었습니다.
3대 당장 조세핀 페인은 여성 교육을 낯설게 여기던 시대에 더 넓은 배움의 세계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성경 교육에 머물지 않고 과학과 역사, 영어와 수학을 함께 가르치며 여성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지성과 언어를 갖도록 했습니다. 그는 지금이 아니라 미래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씨앗을 심은 사람이었습니다.
4대 당장 룰루 프라이는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는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대에 대학 과정의 문을 열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여성이 왜 그렇게까지 배워야 하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여성 역시 하나님께 받은 지성과 소명을 가진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앞의 비난과 의심 속에서도 여성 고등교육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직 오지 않은 세대를 위해 우물을 팠고, 훗날 수많은 여성이 그 우물에서 신선한 샘물을 길어 올렸습니다.
5대 당장 자네트 월터는 학생들의 몸과 삶 전체를 돌보는 교육을 꿈꾸었습니다. 당시 여성들은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웠고, 건강과 체력은 교육의 중요한 영역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성의 몸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존귀한 삶의 자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체육교육을 강화하고 학생들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며, 더 자유롭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미래의 여성들을 위해 삶의 공간을 넓혀준 사람입니다.
6대 당장 앨리스 아펜젤러는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시대 속에서 이화를 이끌었습니다. 민족의 미래가 흔들리고 교육의 자유마저 위협받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에게 자기 존엄과 책임, 그리고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용기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단지 순응하는 여성들을 길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대의 아픔 속에서도 진실과 정의를 붙드는 여성 지도자들을 준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눈앞의 안전만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세대가 더 자유롭고 더 인간다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우물을 팠습니다.
보십시오. 이화의 이 여섯 명의 당장은 모두 서로 다른 시대와 상황 속에 살았지만 공통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앞의 성과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더 깊이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급한 열매를 따기보다는 오래 남을 씨앗을 심었고, 누군가 우물을 메워 버리면 새로운 우물을 팠습니다. 그들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오고 있는 세대를 위해 끊임없이 새 우물을 파는 신앙이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그들의 후손이, 오늘 교독문의 말씀인 이사야 12장의 아름다운 구절처럼,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며]"(이사야 12:3)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이사야 44:3-4)라는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4) 하신 말씀처럼, 어린양 보좌가 근원이 되어 솟아난 생명수 샘물로 메마른 땅을 적시는 "생수의 강"(요한복음 7:38)이 되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우물을 파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어떤 우물을 파고 계십니까? 어떤 사람은 자녀의 미래를 위해 우물을 팝니다. 어떤 사람은 학생들을 위해 우물을 팝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위해 우물을 팝니다. 어떤 사람은 정의와 평화를 위해 우물을 팝니다. 그러나 우리가 파는 우물은 때때로 메워집니다. 정성을 다해 쌓아 올린 일은 때때로 무너집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수년 동안 땀 흘린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묻게 됩니다. '내가 판 우물이 다 헛된 것인가?'
바로 그때 이삭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아니다.' 우물은 막힐 수 있습니다. 에섹의 우물도 막혔고, 싯나의 우물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우물을 파는 믿음은 막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시 삽을 듭니다. 다시 땅을 파고, 다시 길을 찾고, 다시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넓은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르호봇은 단지 우물의 이름이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은 믿음의 이름입니다. 막혀도 다시 파고, 잃어버려도 다시 시작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한 번 더 여쭙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파고 있는 우물은 무엇입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우물은 무엇입니까? 백 년 뒤 누군가가 그 우물가에 앉아 생수를 마실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지 못할 후손들이 그 물로 목을 축일 것입니다. 이화의 당장들이 그러했듯, 이삭이 그러했듯, 우리 또한 누군가를 위해 우물을 파는 사람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우물 파는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 우물이 메워졌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빼앗아 갔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는 우물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보다 먼저 가셔서 우리의 길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다시 삽을 드십시오. 다시 땅을 파십시오. 다시 믿으십시오.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제 내가 너의 앞을 넓게 하였다.' 그날 우리는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