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창세기 1:26-28, 로마서 5:6-8, 마태복음 8:16-17
설교문
오늘 우리는 유난히 지친 시대를 살아갑니다. 몸이 힘들어서만이 아닙니다. 마음이 지쳐 있습니다. 왜일까요? 세상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더 경쟁해야 한다." "더 성장해야 한다." "더 증명해야 한다." 학생은 더 좋은 성적을 요구받고, 직장인은 더 높은 성과를 요구받고, 교수는 더 많은 연구 실적을 요구받고, 목회자는 더 좋은 설교를 요구받습니다. 심지어 쉬고 있을 때조차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남들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멈춰 있는 것 같고, 남들은 성장하는데 나만 뒤처지는 것 같고, 남들은 성공하는데 나만 실패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쉬는 시간에도 쉬지 못합니다. 자기 계발을 해야 하고, 새로운 기술을 익혀야 하고, 더 나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는 질문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나는 충분한 사람인가?" "나는 이대로 괜찮은가?"
최근 전 세계 교회와 사회의 주목을 받은 한 중요한 문서가 발표되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교종(敎宗) 레오 14세(Pope Leo XIV)가 자신의 첫 회칙인 「Magnifica Humanitas」, 곧 의역해서 「인간의 존엄함」이라는 문서를 발표한 것입니다. 부제는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존엄함을 보호하기 위하여"(On Safeguarding the Human Person in the Time of Artificial Intelligence)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 회칙은 단순한 입장문이 아닙니다. 한 시대를 향해 교회가 내놓을 수 있는 중요한 신앙적·윤리적 성찰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실 이 회칙의 메시지는 매우 단순합니다. 인공지능, 곧 AI는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인간이 AI를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레오 14세는 AI를 악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놀라운 가능성을 가진 기술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기술은 그것을 설계하고 소유하고 통제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문은 "AI를 개발할 것인가?"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어떤 AI를 개발할 것인가?"입니다.
만약 AI가 권력의 집중, 감시, 인간 통제, 이윤의 극대화, 그리고 획일화를 위해 사용되면 인류는 새로운 바벨탑을 쌓을 것입니다. 레오 14세는 이를 '바벨 증후군'(Babel Syndrome)이라고 표현하면서 인간이라는 신비로운 존재를 데이터로 환원하고, 다양성을 제거하며, 효율성만 숭배하는 태도를 경고합니다. 반대로 AI가 공동선, 인간의 존엄, 평화, 정의, 그리고 연대를 위해 사용된다면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도성을 세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고, 노동자를 감시하며, 인간을 생산성의 부속품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레오 14세는 노동을 단순한 경제활동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고, 공동체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소명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AI의 목적은 노동자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소수 거대 기업이 AI를 독점하는 것은 공동선을 위협할 수 있으므로 사회적 통제와 공공적 책임이 필요합니다.
AI는 자칫 가짜 뉴스, 딥페이크, 정보 조작을 증폭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분별하지 못하게 되고 민주주의도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술 혁신에 앞서 먼저 진실성, 책임성, 투명성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AI와 전쟁입니다. 레오 14세는 AI 기반 전쟁 시스템과 자율 살상 무기에 강력한 경고를 표합니다. 이미 인류는 AI에 기반한 전쟁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결정은 결코 알고리즘에 위임될 수 없습니다. 인간 생명이 기계의 결정에 따라 다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회칙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사실 AI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인간이 주제입니다. 이 회칙의 핵심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인간은 정보가 아니다. 인간은 데이터가 아니다. 인간은 계산이 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어진 고귀한 존재이며, 사랑과 관계 속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존재이다"입니다. 인간의 존엄은 능력이나 생산성 혹은 유용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에 존귀합니다. 이 근거는 성서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인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편 8:1)라고 입을 연 시편 8편 기자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편 8:3-4)라고 묻습니다. 참 놀라운 질문입니다. 오늘날 AI 시대에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더 빨리 계산합니다. 컴퓨터는 인간보다 더 많은 정보를 기억합니다. 조만간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설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듭니까? 무엇이 인간을 특별하게 만듭니까?
시편 기자도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인자가 무엇이기에?" 그런데 시편 기자는 인간의 가치를 인간 안에서 찾지를 않습니다. 힘이나 지혜나 능력에서 찾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찾습니다. 사람이 존귀한 이유는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그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실까요? 창세기가 그 질문에 답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 성서는 인간을 설명할 때 먼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인간이 누구를 닮았는지를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될 때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업적도 없었습니다. 성과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증명할 이력서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존엄성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더 나아져야 한다고, 더 성장해야 한다고, 더 경쟁해야 한다고, 더 증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학생은 성적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고, 직장인은 실적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며, 연구자는 업적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합니다. 목회자도 사역의 결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도 우리는 쉬지 못합니다. 자기를 끊임없이 계발해야 하고, 새로운 기술을 익혀야 하며, 계속 성장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이 깊이 지쳐 있습니다. 몸만 지친 것이 아닙니다. 존재가 지쳐 있습니다. 오늘의 성과주의·능력주의 사회가 주는 가장 큰 상처는 실패 자체가 아닙니다. 실패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실패가 존재의 실패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성과가 좋으면 나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고, 성과가 나쁘면 나는 부족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승진하면 가치가 올라간 것 같고, 뒤처지면 가치가 떨어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혼동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정말 성과로 설명될 수 있는 사람입니까? 당신의 논문 수가 당신입니까? 당신의 연봉이 당신입니까? 당신의 직함이 당신입니까? 당신의 성공과 실패가 바로 당신입니까? 성서는 분명하게 답합니다. 아니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기쁜 소식이 들려옵니다. 복된 소식이 들려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인에게 보낸 서신 안에 이 소식이 실려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6-8)
맞습니다. 누군가 '의인'을 위하여 죽는 것도 쉽지 않고, 혹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있지만, '죄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대신 죽을 가치가 없는 자가 '죄인'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새번역 / "when we were still powerless) 그리고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새번역 / "while we were still sinners")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것이 복음(福音)입니다. 이것이 기쁘고 복된 소식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인이 된 후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공한 후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 된 후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부족할 때에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먼저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라. 그러면 사랑받을 것이다." "먼저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라. 그러면 인정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너는 존귀하다." "내가 너를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너는 존엄하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받기 때문에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존귀하기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받기에 존귀합니다.
십자가가 바로 이 '사랑의 역설'을 보여주는 우주적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얼마나 훌륭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의 가치를 말해 줍니다. 성서가 증언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한1서 4:10)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연약할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마태복음 8:17)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력서를 들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것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만큼 성장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력서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취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업적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쓸모 있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사랑하십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다]"(예레미야 1:5) 하셨습니다. 많은 시편 기자는 이 진리를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시편 22:9-10)
하나님은 우리가 쓸모 있는 존재여서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시인이 세상에서 가장 짧게 쓴 시의 제목과 같이 '그냥 사랑'입니다. 어느 엄마와 아기가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하지요. "엄마 / 내가 왜 좋아? / 그냥 // 넌 왜 / 엄마가 좋아? / 그냥"(문삼석, <그냥>)
끝없는 경쟁 속에 지친 사람들, 늘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 자기 계발의 압박 속에서 숨이 막히는 사람들, 실패 때문에 스스로 작게 여기게 된 사람들 앞에서 오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아름다운 형상이다." "너는 내가 지은 작품이다." "나는 네가 그냥 좋다."
AI는 인간의 일부 능력을 모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지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관계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책임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기계가 아니라 사랑하기에 울고 웃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알고리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알고리즘은 멈추지를 않지만, 사랑은 멈추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떠올려 보십시오. 강도당한 사람을 그냥 지나친 제사장은 그리고 레위인은 어쩌면 당시 사회에서 가장 효율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서 가서 제사를 드려야 했고, 피 흘리는 사람을 만져서 자신을 오염시켜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멈춘 것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천하다고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AI는 최적화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종종 비효율적입니다. 돌봄은 비효율적입니다. 눈물 닦아주는 일은 비효율적입니다. 기도하는 일도 비효율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 비효율성 위에 세워집니다. 천국은 그렇게 쓸모없다는 사랑과 돌봄과 기도 위에 세워집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효율적인 존재임을 끊임없이 입증해야 합니다. 학생은 성적으로, 직장인은 실적으로, 교수는 연구 업적으로, 목회자는 설교로, 젊은이는 스펙으로, 노인은 건강으로, 심지어 SNS에서도 '좋아요'를 많이 받는 가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려 애씁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증명해도 끝이 없습니다. 충분히 증명해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증명으로 얻은 가치는 언제든 다시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당신이 사랑받을 이유를 요구합니다. 세상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가치가 있으면 사랑받는다. 예쁘면 사랑받는다. 똑똑하면 사랑받는다. 성공하면 인정받는다. 생산성이 있으면 환영받는다. 실패하면 잊힌다. 늙으면 밀려난다.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진다." 그러나 성서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강자가 되고 의인이 된 후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냥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가치가 있어서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받기에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단지 개인적 위로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존귀하다면, 다른 사람도 그렇습니다. 성과 없는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병든 사람도, 그리고 늙은 사람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존엄합니다. 이것이 「Magnifica Humanitas」, 곧 「인간의 존엄함」이 강조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제50항입니다. "관계를 위해 창조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피조 세계와의 친교 안으로 들어가도록 계획되고 뜻하여진 존재입니다." 만일 인간의 가치가 능력에 있다면, 약한 사람은 덜 가치 있을 것입니다. 생산성이 없다면, 노인은 존엄을 잃을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은 전혀 존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가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면, 모든 사람은 존엄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도, 병상에 누운 노인도, 경쟁에 밀린 사람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존귀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의 쓸모를 평가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을 발견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십니까?"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선 시대에 우리는 성서의 가장 깊은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가치가 있어서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받기에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취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의 모든 가치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경애하는 여러분, 오늘의 기도시처럼 "세상에 너만 남겨져 / 혼자서 아프라고 햇빛 비추는 것 아[닙]니다."(류근, <지금 아픈 사람>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허투루 비추는 ㄱ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끊임없이 "너는 누구냐?"라고 묻거든,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기억하십시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우리의 이름이며, 이것이 우리의 존엄이며,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끝없는 경쟁과 피로 속에서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에게 오늘 이 말씀이 성서가 전하는 가장 깊은 위로와 자유의 복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