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창 34:25-31, 벧전 3:8-17, 막 4:21-25)
설교문
[승자의 기록]
지금 우리는 너무나 쉽게 책을 구해서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도서관을 이용하면 굳이 사지 않아도 됩니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누구나 쉽게 글을 쓰고 책도 출판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일반 대중이 책을 읽고 책을 쓴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다수가 문맹인 데다가 책을 제작하는 일도 매우 어려웠습니다. 종이는 서기 105년경 동양의 한(漢)나라에서 발명한 것이고, 구약성서만 해도 종이가 나오기 이전에는 점토판이나 파피루스지(papyrus紙), 양피지(羊皮紙)에 쓰입니다.
파피루스지는 고대 이집트 전역에 자라던 식물 파피루스 줄기를 얇게 갈라 표면은 가로로, 뒷면은 세로로 늘어놓고 전체를 강하게 두들겨 나무줄기에서 나오는 끈적끈적한 진액으로 서로 붙도록 한 후 건조시켜 만든 것입니다. 양피지는 양가죽을 벗겨 털을 제거하고 얇게 문질러 약품 처리를 한 다음 팽팽하게 늘여서 건조시킨 후 사용하였습니다. 파피루스지는 비교적 만들기 쉬워 다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지만, 장기간 보존할 수 없고, 양피지는 매우 질겨서 오래 보존할 수 있었지만 만들기가 매우 어렵고, 무게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렇게 고대에 책을 한 권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그래서 책은 왕실이나 귀족, 제사장 계급, 부자들만 볼 수 있었으며, 책값도 비쌌습니다. 그래서 책에는 중요한 사건이나 역사적으로 남길만한 것들만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기록은 주로 이긴 자들, 힘 있는 자들의 관점에서 쓰이게 됩니다. 성경도 비슷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치하하고 두 왕의 업적을 높이고자 했던 역사가는 역대기를 쓰면서 다윗 왕이 저질렀던 범죄들을 모두 삭제합니다. 가령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고, 그것을 숨기려고 우리야를 가장 치열한 전쟁터로 보내어 죽게 만든 이야기(삼하 11-12장)는 역대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기록은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기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도 그 관점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성경 안에 숨겨진 이야기나 들리지 않는 다른 목소리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다윗이 반역을 한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이 바후림이라는 마을을 지나는데, 사울의 친척인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영영 가거라! 이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야! 이 불한당 같은 자야! 네가 사울의 집안사람을 다 죽이고, 그의 나라를 차지하였으나, 이제는 주님께서 그 피 값을 모두 너에게 갚으신다. 이제는 주님께서 이 나라를 너의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셨다. 이런 형벌은 너와 같은 살인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재앙이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윗이 왕권을 잡는 과정에서 사울의 집안사람에 대한 굉장히 광범위한 살육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구약성경 전체를 보면 대개 다윗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 가문과만 특별하게 되돌리지 않는 영원한 계약을 맺습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한 구석에 잠깐 등장하는 이 내용을 통해 우리는 훨씬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무엘하의 기록을 읽지 못하고 역대기의 기록만을 읽었다면 우리는 손에 피를 묻혔던 다윗의 그늘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비록 적은 양이지만 다윗이 가진 양면을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위대함입니다.
[창세기 34장: 뜬금없는 이야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의 말씀도 창세기 전체에서 볼 때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창세기는 우주의 시원부터 인간의 탄생, 타락과 구원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와 이끄심을 이야기하며, 아브라함부터 요셉에 이르기까지 신앙 선조들의 위대한 믿음의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창세기 34장의 이야기는 오히려 믿음의 선조들이 걸어온 길에 흠집을 내고, 매우 부끄럽고 추악한 이야기 같아 보입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합니다. 야곱의 가족은 가나안 땅에서 에서를 만난 이후에 세겜성에 장막을 치고 그곳에 정착합니다(33:18-20). 거기에서 머무는 동안 야곱의 유일한 딸인 디나가 그 지방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가 히위 사람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겁탈당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일로 디나의 친 오빠인 시므온과 레위는 매우 분노합니다. 하몰과 세겜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야곱을 찾아와 세겜과 디나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레위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 남성에게 자기 누이를 줄 수는 없다면서 세겜 성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으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14-15절).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은 이들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세겜성 남성들을 모두 설득해 모두 할례를 받게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상처가 아물기 전에 디나의 친오빠인 시므온과 레위는 칼을 들고 세겜 성읍으로 쳐들어가서 순식간에 모든 남성들을 죽이고, 모든 것들을 약탈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이렇게 시므온과 레위는 거짓말로 이방 민족을 속이고 노략질을 했고, 야곱은 이런 아들들의 행위를 꾸짖지만, 아들들 또한 자신들의 분노를 아버지에게 그대로 드러내는 것으로 본문은 마무리됩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들어가 있는지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논란이 분분하고 매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큰 틀에서 볼 때 이 이야기는 신명기 7장 1-5절에서 강력하게 금지하는 가나안 사람들과의 통혼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합니다. 성경의 저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은 세겜 족속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그들과 '한 민족'이 될 수는 없다는 것(창 34:16, 22)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신앙 전통이 가나안 사람들과의 통혼을 금지한 것은 가나안의 불평등한 문화가 이스라엘의 평등 정신을 훼손할까 하는 우려에서였습니다.
[갈등을 풀어가는 방식들]
그런데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 사건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행위에 관심이 갔습니다. 디나가 겁탈을 당한 일은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큰 문제가 발생한 것이고, 이 사건은 결국 한 민족 전체의 살육을 불러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삶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여러 갈등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선 이야기에서 이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풀고자 하는 사람들은 가해자 측인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입니다. 본문을 잘 읽어보면 이방 남성 세겜은 정말로 디나를 사랑한 것처럼 느끼게 하는 내용들이 여기저기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결혼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에 비해 야곱은 매우 수동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의 문제인데도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5절). 시므온과 레위가 복수를 했을 때는 오히려 자기와 가문의 안위만을 걱정합니다(30절). 해를 입은 딸의 마음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편 디나의 오빠들인 시므온과 레위는 이 일로 매우 분노하여 복수심에 사로잡힙니다. 할례를 통혼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속임수를 통해 한 민족을 몰살하는 엄청난 살인 행위를 저지르고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폭력과 학살을 통해 야곱의 가족 또한 폭력의 악순환에 말려들게 되었고, 이들은 주변의 이방 민족을 피해 베델로 다시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을 읽으면서 계속 답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사건을 꼭 이런 식으로 풀 수밖에 없었을까요? 오늘 사건을 풀어감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피해의 당사자인 디나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도, 오빠들도, 가해자인 하몰이나 세겜도 피해자인 디나에게 묻지 않습니다. 디나의 마음이 어떠한지, 디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싶은지, 이방 여자들에게 관심이 있었던 디나가 세겜에게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어 멸시할 때, "업신여기다."라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은 옆에 있는 사람을 마치 없는 사람처럼 취급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지금 디나가 그렇습니다. 사건의 당사자이고, 피해를 당한 것은 디나인데 피해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 한병철은 <타자의 추방>이라는 책에서 이런 현상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냅니다. 그는 경청에 대해 말하면서 경청이란 단지 귀를 열어 놓는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경청이란 타인의 존재와 고통을 향한 적극적인 참여이자 행동이며,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여 비로소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을 듣지만 정작 타인의 언어와 고통에 귀 기울이는 능력은 갈수록 잃어가고 있고, 그 결과 고통은 홀로 짊어져야 할 사사로운 것으로 축소되어 버린다고 지적합니다(《타자의 추방》115-116쪽).
오늘 디나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디나에게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에, 디나의 고통은 끝내 공동체의 일이 되지 못하고 각자의 분노와 계산 속에 흩어지고 만 것입니다. 경청의 부재는 단지 소통의 결핍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일이 됩니다. 피해당사자인 디나의 의견과 생각이 존중받았다면 오늘 사건이 이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네 삶에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 사고와 갈등이 삶을 파괴하고 부정적인 결말로 끝나는 것은 바로 피해자의 요구와 필요가 무시되고 그것을 옳게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강요된 침묵'과 '지워진 목소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충고]
오늘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한 마음을 품으며, 서로 동정하며, 서로 사랑하며, 자비로우며, 겸손하십시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빌어 주십시오." 오늘 베드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서 바울 사도 또한 강조했던 윤리적 실천 덕목을 언급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 사랑의 다른 버전이고, "가능한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면서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바울 사도의 뜻과 통합니다.
이 윤리적 기준에서 보면 시므온과 레위는 실패했습니다. 복수심에 불탔고 거짓과 속임수, 살인과 약탈을 서슴없이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딸이 당한 고통에 함께 아파하지 않은 야곱 또한 잘못입니다.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래서 한 마음을 품고 사랑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또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복을 상속받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복을 상속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의 근원이 된 것처럼, 우리가 가는 곳마다 복이 베풀어지는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 자신이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며, 평화를 추구하며, 그것을 좇아야 합니다.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는 일은 어느 누구도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이들이 업신여김을 당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런 일을 당하고,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는 여성들이, 어른들 중심의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젊은이들이 모인 곳에서는 노인들이 무시되고 배제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생기면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한 마음을 품고 서로를 돌보아 주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떨 때 우리는 이런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실패하게 될까요?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려고 하는 사람은 혀를 다스려 악한 말을 하지 못하게 하며, 입술을 닫아서 거짓말을 못하게 하여라." 모든 갈등의 이면에는 언제나 불충분한 의사소통의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 뜻을 전하는 언어가 거칠고, 적절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작은 사건이 큰 갈등으로 진화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목격합니다.
창세기 34장에서도 올바른 의사소통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세겜이 디나를 정말로 사랑하였다면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충분한 대화가 선행되고 상대의 동의 속에서 사귐의 시간을 가졌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거짓말을 했고, 야곱의 대화 자체를 회피하였습니다. 이들 중 누구 하나 디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적극적 경청과 잘 계획된 대화모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초래된 것입니다.
[들을 귀를 가진 사람]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서의 본문에는 "숨겨둔 것이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곧바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조언합니다.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숨겨진 것, 감추어 둔 것도 미리 아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필요한 사람은 바로 이렇게 귀를 기울여 듣는 사람입니다. 잘 듣는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잘 듣는 사람 앞에 가면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자기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러면 그동안 놓치고 있던 것, 꽁꽁 숨겨두었던 것, 아프고 상처받은 마음, 흘려 버리거나 차마 말할 수 없던 것까지도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잘 들어 주는 사람 앞에서 말하는 이는 미처 자기가 몰랐던 것, 무의식에 놓여 있던 것들이 떠오르고 문제의 해결이 이미 자기 안에 있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됩니다. 이전에 알고 있던 자기보다 더 큰 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제가 이런저런 자리에서 소개해 드렸던 글귀가 있습니다. 교황의 집무실 한편에 걸려 있는 글귀라고 알려진 시입니다. 긴 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조용하면서도 분명하게 진실을 말하고,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들 역시 할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요."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조용하면서도 분명하게 진실을 말하는 일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조선 시대 숙종의 두창(痘瘡, 천연두)을 치료하여 명의로 소문난 유상(柳瑺, 1643-1723)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숙종이 연포탕을 먹다 체하여 위독해지자, 파발이 급히 유상을 불렀습니다. 밤새 달려온 유상이 도착했을 때 통행금지로 도성 문이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지체하던 중 유상은 근처 초가에 들러 잠시 쉬었는데, 그 집 노파가 손녀에게 "쌀뜨물을 어디 두었느냐, 두부 위에 떨어질까 걱정이다"라고 묻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됩니다. 이상히 여겨 물으니 "쌀뜨물이 두부에 떨어지면 바로 녹아버리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마침내 대궐에 이른 유상은 숙종이 두부를 먹다 체한 것을 확인하고, 쌀뜨물을 데워서 올렸습니다. 그러자 체한 기운이 곧 내려갔다고 합니다(유광수, 「천연두 명의(名醫)가 된 유상(柳瑺)의 한 뼘」, 《기독교사상》 2026년 6월호(통권 810호) 91쪽.).
천하의 명의가 임금의 목숨을 살린 지혜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이름 없는 노파의 혼잣말이었습니다. 명의로서 이름을 날렸어도 젠체하지 않고, 미천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의 말에까지 귀를 기울일 줄 알았던 유상의 겸손함이 임금의 생명을 살린 것입니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은 결코 이르지 못하는 경지입니다. 명의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꾸준히 듣고 배우는 이들만이 이르게 되는 경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고 싶어 하고 존중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존중받고 존중하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을 때, 자신의 마음과 뜻이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안전한 공동체에서 자기 생각을 편하게 나눌 수 있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공동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의사소통 방법을 잘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배우자]
런던 남부의 작은 마을에 사는 소녀 틸리 스미스는 부모님과 함께 태국의 푸켓으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마이카오 해변에서 놀던 스미스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해변의 물이 갑자기 뒤로 빠져나갔던 것입니다. 스미스는 부모에게 곧 거대한 쓰나미(지진해일)가 해안을 덮칠 거라고 말했고, 소녀의 부모는 이 이야기를 듣고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해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그녀의 경고를 따랐던 백여 명의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구했습니다. 마이카오 해변의 피해는 적었지만 다른 해안과 섬에서는 5천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끔찍한 자연재해였습니다. 이 일은 2004년 12월 26일에 발생했는데, 틸리 스미스의 이야기는 전 세계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프랑스의 한 어린이 잡지는 스미스를 '올해의 어린이'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스미스는 어떻게 지진해일을 예측했을까요? 특별한 비결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2주 전에 자신이 다니던 초등학교 지리 수업에서 지진해일에 대해 배웠을 뿐이고, 우연치 않게 정말 그것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올바른 지식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앙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이 계신 분'이며, 침묵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는 성서 속에서 하나님이 족장들과 예언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그 나타나심이 언제나 "들리지만 보이지는 않는" 방식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사람에게 임하는 것은 '주의 말씀'이지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신을 시각적으로 표상하는 일을 엄격히 금하지만, 신을 청각적으로 이름 불러 부르는 일에는 훨씬 관용적입니다. 왜냐하면 형상은 신을 하나의 전체성 안에 가두어 버리지만, 음성은 언제나 무한한 타자성을 향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137-138쪽.).
그렇습니다. 가만 보면 눈은 교만합니다. 제가 보고 싶은 대로 보다가, 보기 싫으면 감아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귀는 겸손합니다. 사방에서 들리는 온갖 소리를 무던히 견뎌내며 듣기 때문입니다. 신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들음에서 오는 것이고, 사람에 대한 신뢰도 잘 듣는 것에서 쌓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세상을 우리 뜻대로 재단하려 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기 싫으면 외면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눈이 아니라 귀를 열라고 하십니다. 귀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소리까지도 잘 들어보고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에서, 사건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볼 줄 아는 눈이 없고, 들을 줄 아는 귀가 없는 이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말씀을 듣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34장에서 끝내 들리지 않았던 디나의 목소리, 그러나 반드시 들었어야만 했던 그 목소리를 이제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 소리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우치다 선생은 또 이런 말을 합니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지만 전지전능한 하느님과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는 기능적으로는 똑같습니다. 모두 도와달라는 구난 신호를 보내고 있었고 그것을 수신해 줄 사람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구난 신호는 매우 듣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알아들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들은 것을 통해 인류를 윤리적으로 조금은 향상시켰습니다. 그런 점에서 맹자의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 이야기와 선지자에게 호소하는 하느님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그것이 인(仁)의 단서가 되고 인간의 인간성의 기점이기 때문입니다." (《용기론》 229쪽).
디나는 아무 말을 못했지만 우리는 디나가 보내는 구조 신호를 하나님의 요청으로 들었어야 합니다. 아버지도, 오빠들도, 가해자들조차도 알아듣지 못했던 그 신호를 말입니다. 지금 이 예배당 안에도, 우리 곁에도, 미처 알아듣지 못한 구조 신호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의 목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아듣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밑절미입니다. 예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영원한 삶을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고난 당하는 이웃의 친구가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자녀됨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의 눈을 밝힙시다. 밤이 아니라 낮에 거합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우리의 귀를 훨씬 크게 열어 놓읍시다. 성별, 인종, 계급, 문화, 종교가 얽혀 있는 복잡한 상황 속에서 지워져 버린 목소리,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듣는 마음', 곧 '듣는 심장'(왕상 3:9)을 지닙시다. 잘 듣기 위해 서로서로 인정해 주고 사랑해 줍시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은 우리 향린교회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두 눈을 크게 뜨고, 두 귀를 활짝 여십시오.
그러면 온 누리에 가득한 미세한 소리,
세미한 은총의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