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이사야 41:8-10, 히브리서 10:32-35, 마태복음 9:19-22
설교문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대답할 것입니다. '불확실한 시대'라고도 하고, '경쟁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어떤 이는 '인공지능의 시대'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저성장과 불안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우리 시대를 조금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는 '힘을 사랑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힘을 숭상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힘을 원합니다. 돈은 힘입니다. 지식도 힘입니다. 학벌도 힘입니다. 직함도 힘입니다. 영향력도 힘입니다. 말을 잘하는 것도 힘이고, 사람을 많이 아는 것도 힘입니다. 요즘에는 '조회 수'와 '팔로워'도 하나의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이 있습니다. 힘을 숭상하는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두려워하더라는 겁니다. 평판을 잃는 것이 두렵고, 인기를 잃는 것이 두렵고, 돈을 잃는 것이 두렵고, 직장을 잃는 것이 두렵고, 팔로워를 잃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강해 보이려는 노력은 많아지지만, 실제로는 두려움에 의해 움직이는 삶이 됩니다. 이것이 힘의 시대의 역설입니다. 모두 힘을 숭배하지만, 어쩌면 오늘 우리 사회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은 이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강한 사람은 많은데, 용기 있는 사람은 드문 시대.'
힘과 용기는 다릅니다. 힘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용기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마음'입니다. 힘은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용기는 자기 자신을 움직입니다. 힘은 남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용기는 자기 안의 두려움을 이깁니다. 그래서 약한 사람도 얼마든지 용기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강한 사람도 얼마든지 비겁할 수 있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세 명의 작가가 있습니다. 미국의 헤밍웨이, 프랑스의 카뮈, 그리고 러시아의 도스토옙스키입니다. 세 사람은 국적도 다르고, 살아온 시대도 다르고, 생각도 달랐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 사람은 평생 같은 질문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무엇이 인간을 끝까지 인간답게 만드는가?' 그 질문을 따라가 보면 결국 하나의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용기입니다. 인간은 무엇으로 끝까지 인간다운가? 그들은 모두 용기라고 답합니다.
먼저 헤밍웨이를 만나보겠습니다. 그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에는 산티아고라는 늙은 어부가 나옵니다. 그는 84일 동안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제자마저 다른 배를 타게 됩니다. 세상은 이미 그를 끝난 사람으로 판정했습니다.
그런데 85일째 되는 날 아침, 노인은 다시 바다로 나갑니다. 저는 이 장면을 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공을 확신해서 바다로 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꼭 잡을 수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는 단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바다로 나갑니다.
마침내 그는 엄청난 크기의 청새치를 잡습니다. 사흘 밤낮을 싸운 끝에 얻은 값진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상어 떼가 몰려옵니다. 노인은 끝까지 싸웁니다. 작살이 부러집니다. 칼이 부러집니다. 노도 부러집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맨손으로 상어 떼와 싸웁니다. 사투를 벌입니다. 하지만 항구에 돌아왔을 때 남은 것은 거대한 청새치의 뼈뿐이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은 아무도 산티아고를 패배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헤밍웨이는 이 한 문장으로 그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영어 원문은 더욱 간결합니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여기서 "destroyed"는 육체적으로 부서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defeated"는 영혼까지 굴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헤밍웨이는 말합니다. 사람은 가난할 수 있고, 병들 수 있고, 늙을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그 영혼이 굴복하지 않는 한 패배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은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에서 드러납니다.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다른 용기를 그립니다. 그의 소설 『페스트』는 단순한 전염병 이야기가 아닙니다. '페스트'는 실제 질병인 동시에,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모든 악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의사 리외입니다. 그는 영웅도, 혁명가도 아닙니다. 평범한 의사입니다. 지금 역병이 돌아 사람이 떼로 죽어갑니다. 그는 누구보다 현실을 잘 압니다. 의사니까요. 지금 환자를 모두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전염병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자신도 감염돼 죽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잘 압니다. 그런데도 그는 매일 병실로 들어갑니다. 환자를 돌봅니다. 죽어 가는 사람 곁을 지킵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영웅입니까?" 리외가 답합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까지 합니까?" 그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이 문제는 영웅주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실함의 문제입니다." 뜻밖의 답변에 상대가 다시 묻습니다. "성실함이 무엇입니까?" 리외는 짧게 대답합니다. "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이 『페스트』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대부분의 영웅소설은 세상을 구하는 사람을 칭송합니다. 그러나 카뮈는 말합니다. 세상을 다 구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오늘도 병실로 들어가는 사람, 죽을 줄 알면서도 환자의 손을 꼭 잡는 사람, 끝이 보이지 않아도 자기 일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성실함이 용기입니다.
소설 『페스트』가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간단합니다. 당신이 세상을 모두 바꿀 수는 없어도 오늘 당신 앞에 있는 한 사람의 고통 앞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카뮈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용기는 커다란 승리를 이루는 능력이 아니라, 희망이 불확실한 순간에도 선을 행하고, 아픈 사람과 함께 아파하며,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을 끝까지 감당하는 성실함이라고.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또 다른 용기를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용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소설 『죄와 벌』은 살인 이야기처럼 시작하지만, 사실은 자기의 죄와 맞서는 용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법학도인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젊고 똑똑한 학생입니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법을 지켜야 하지만, 위대한 사람은 법을 넘어설 수도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죽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이야기의 중심은 살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다음이 진짜입니다.
살인 후 라스콜니코프는 잡히지 않습니다. 증거가 부족합니다. 경찰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는 점점 무너집니다. 열이 납니다.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합니다. 사람을 피합니다. 자꾸 범죄 현장 근처를 맴돕니다. 스스로 의심받고 싶어 하는 듯 행동합니다. 왜 그럴까요? 도스토옙스키는 말합니다. 죄는 인간을 둘로 갈라놓는다고. 머리로는 '나는 옳았다'라고 말하지만, 가슴은 '너는 살인자다'라고 말합니다. 죄 자체가 이미 벌입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은 소냐라는 여인입니다. 그녀는 사회적으로는 가장 낮고 천한 삶ㅇ르 삽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높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를 정죄하기보다 곁에서 함께 울어 줍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합니다. "광장으로 가세요. 땅에 입 맞추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말하세요."
우리는 보통 용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강한 척하는 것, 남을 이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어려운 용기는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었어.' '상대가 먼저 잘못했어.' '다들 그렇게 해.' '나는 특별한 사람이야.' 라스콜니코프도 끝까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깨닫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특별한 인간인가'가 아니라, 자신이 '인간인가'였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결국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납니다. 소냐가 그를 따라갑니다. 그리고 어느 봄날, 라스콜니코프는 처음 진심으로 웁니다. 소냐의 발 앞에 엎드려 웁니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소설은 여기서 끝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라스콜니코프가 완전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평생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남들 앞에서 정직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자기 자신 앞에서도 정직할 수 있습니까?' 『죄와 벌』이 말하는 용기는 칼을 드는 용기가 아닙니다. 가장 위대한 용기는 무릎을 꿇는 용기입니다, 저는 이 용기가 참 성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우 여러분, 헤밍웨이는 실패 속에서도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카뮈는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선을 행하는 용기를, 그리고 도스토옙스키는 정직하게 자기 죄를 인정하는 용기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성서 안에서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한 사람은 열두 해 동안 병으로 고통받던 여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죄인이라 손가락질받던 여인이며, 또 한 사람은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눈먼 걸인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힘(power)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용기(courage)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힘을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용기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똑같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마가 5:25-34, 마태 9:19-22, 누가 8:43-48) '열두 해'라는 짧은 표현 속에 참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열두 해 동안 병을 앓았습니다. 열두 해 동안 의사를 찾아다녔습니다. 열두 해 동안 가진 것을 다 썼습니다. 그 열두 해 동안 그녀는 사람들 곁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 시대의 율법은 병든 그녀를 부정(不淨)한 사람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녀는 병만 앓은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잃었습니다. 관계를 잃었습니다. 존엄을 잃었으며, 삶의 자리까지 잃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마을을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그 순간 여인의 앞에는 두 개의 길이 놓였습니다. '그냥 이대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시선을 무릅쓰고 예수님께 나아갈 것인가.' 그녀는 두 번째 길을 선택합니다. 사람들 틈으로 숨어 들어갑니다. 혹시 누군가 알아보면 어떡합니까? 사람들이 밀쳐내면 어떡합니까? '어디 여자가!'라고 손가락질하면 어떡합니까? 부정한 사람이라고 소리치면 어떡합니까? 그녀는 그 모든 위험을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뒤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댑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자기에게서 능력이 빠져나간 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물으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만졌느냐니요. 주님 그게 지금 중요한 질문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스쳐 지나가는 것과, 한 사람이 자기의 인생을 걸고 다가오는 것은 다르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저는 이 한마디가 복음서 전체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호칭이라고 생각합니다. 열두 해 동안, 아무도 그녀를 그렇게 불러 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병으로 불렀습니다. 율법으로 불렀습니다. 편견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의 관계 속으로 부르셨습니다. "딸아!" 그 한마디로, 예수님은 그녀를 병에서만이 아니라, 고립에서, 수치에서, 외로움에서, 다시 사람의 자리로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또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온 여인입니다. (누가 7:36-50) 사람들은 그녀를 '죄인'이라고만 불렀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그녀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옵니다. 누가 초대했습니까?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환영했습니까? 아무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시선이 그녀를 향합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들어옵니다. 예수님 뒤에 섭니다. 먼저 눈물이 흐릅니다. 그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향유를 붓습니다.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도 자신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 삶 전체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세 번째로 바디매오가 있습니다. (마가 10:46-52, 누가 18:35-43) 그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눈먼 걸인입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크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크게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데려오라 하시자, 바디매오는 걸치고 있던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에게 달려갑니다. 여기서 저는 조금 웃음이 납니다. 그 겉옷은 단순한 옷이 아닙니다. 밤에는 이불이 되었고, 낮에는 그의 삶을 지켜 주던 그의 거의 유일한 재산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내버리고 예수님께 달려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는 대답합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교우 여러분, 성서 속의 이 세 이야기를 천천히 읽다 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똑같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ἡ πίστις σου σέσωκέν σε)라는 말씀은 신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론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말씀은 "네가 나를 붙잡았기에 생명을 얻었다"(오리게네스), 혹은 "네가 나와 연결되었다"(칼뱅), 혹은 "네가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었다"(N.T. 라이트)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의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시험 문제처럼 '믿음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보셨습니다. 사람들 틈을 헤치고 옷자락을 잡으러 나오는 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눈물로 자신의 삶을 쏟아 놓는 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입 다물라는 세상의 명령보다 더 크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세 사람에게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세 사람을 함께 보십시오. 혈루증 여인은 거절당할 위험을 넘어섰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은 수치를 넘어섰습니다. 바디매오는 사람들의 만류를 넘어섰습니다. 그들이라고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들도 두려웠습니다. 떨었습니다. 망설였습니다. 그런데도 걸어갔습니다.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믿음은 용기입니다. 참된 믿음은 용기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믿음은 언제나 걸어갑니다. 믿음은 언제나 손을 뻗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외칩니다. 그리고 믿음은 언제나 무릎을 꿇습니다. 그렇습니다. 용기는 믿음의 얼굴입니다. 믿음은 단지 머리로 동의하는 교리 조각이 아닙니다. 믿음은 한 걸음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뒤에 내딛는 걸음이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도 예수님께 나아가는 걸음입니다. 그 걸음을 예수님은 절대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걸음을 바라보시며, 거기에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이름을 붙여 주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힘을 숭상하는 시대입니다. 힘을 사랑하는 시대입니다. 강한 사람은 많은데, 용기 있는 사람은 드문 시대입니다. 세상은 힘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지만, 역사는 용기 있는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강한 사람보다 용기 있는 사람에게 더 오래 감동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건 힘이 아니라 용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힘 있는 사람보다 용기 있는 사람에게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인간다움을 봅니다. 힘은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는 사람을 존엄하게 만듭니다. 구원에 이르게 만듭니다.
교우 여러분, 이번 한 주에도 우리는 거창한 영웅이 될 기회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용기를 낼 기회를 많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잡지 못할 수 있지만 다시 용기를 내어 저 큰 바다로 노 저어 가십시오. 사람은 가난할 수 있고, 병들 수 있고, 늙을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파괴될 수 있지만 패배하지 않는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태 10:28)
그리고 내가 세상을 다 바꿀 수 없을지라도 오늘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의 고통에 용기 있게 손을 내미십시오. 희망이 불확실한 순간에도 선을 행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십시오. 그것이 용기입니다. 성서도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죄를 인정하고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무릎 꿇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리고 성서의 그 용감한 사람들처럼 무리를 헤치고 주님의 옷자락을 잡으러 나아가십시오. 눈물로 주님 앞에 자신의 삶을 쏟아 놓으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하라는 세상의 목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딸아/아들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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