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요나의 하나님"

2026년 7월 19일 주일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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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욘 3:10-4:4, 행 10:9-16, 마 12:15-21)

설교문

[코 앞의 교회]

부흥사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이 목사님께서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시골의 한 교회를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마을에 도착한 목사님은 교회를 찾으려고 마을을 한참 헤매다가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습니다. "할아버지! 말씀 좀 여쭙겠는데요? 마을교회가 어디에 있나요?"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이 목사님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을 어디에 두고 다니시오? 바로 뒤에 있지 않소?" 할아버지 말을 듣고 뒤를 돌아보니 정말 코앞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할아버지에게 전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 교회 다니시나요?" "아니요!" "할아버지!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셔요! 오늘 저녁 7시에 이 교회로 꼭 오세요. 오시면 제가 할아버지께 하늘나라 가는 길을 알려드릴게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목사님께 말했습니다. "코앞에 있는 교회도 못 찾으면서 어떻게 하늘나라 가는 길을 알려 주겠다는 거요?"

이 목사님이 눈이 나빠서 교회를 못 본 것은 아니겠지요. '교회가 저 앞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자기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등 뒤에 있는 교회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면 코앞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합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일들이 많은데,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은 어떨까요?

[예언자 요나?]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본문은 너무나도 유명한 예언자 요나의 이야기입니다. 요나 하면 큰 물고기 뱃속이 떠오르지만, 요나서는 매우 깊은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전형적인 예언자의 사명을 받습니다.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지요.(1:1-2). 그러나 요나는 "주님의 낯을 피하여"(1:3) 배를 타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반대 방향으로 가고, 그래서 이내 폭풍을 만납니다. 그래서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되는데, 이런 과정에서 오히려 이방인 뱃사람들이 유대인 예언자보다 더욱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깁니다(1:16). 하나님의 뜻에 따라 큰 물고기가 요나를 니느웨 땅에 뱉어내고(2:10), 요나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설교의 역사에서 가장 짧은 설교이자 선포입니다. 니느웨는 사흘길이나 되는 큰 성읍이었지만 요나는 하룻길을 다니면서 단 한 번 외칩니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3:4)

그런데 이 한마디 선포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다. 이 소문이 니느웨의 왕에게 전해지니, 그도 임금의 의자에서 일어나, 걸치고 있던 임금의 옷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았다. 왕은 니느웨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여 알렸다. '왕이 대신들과 더불어 내린 칙명을 따라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 떼든 양 떼든, 입에 아무것도 대서는 안 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 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3:5-9) 이처럼 즉각적이며 전체적이며 대규모적인 회개가 일어난 결과,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3:10)는 것입니다.

원래 예언자는 하나님을 위해 말하는 사람으로서, 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일까지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예언자라는 말은 둥근 사각형이라는 말처럼 말이 되지 않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서의 예언자는 보통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에 매우 열성적입니다. 이사야는 "누구를 보내면 좋을까?"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소서"(이사 6:8)라고 즉각 응답했습니다. 그런데 요나서에서 예언자 요나는 이런 전통을 뒤집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말씀 선포도 하지 않다가 물고기 뱃 속에 들어가는 죽을 경험을 하고 나서야 마지못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왜 요나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어기면서까지 니느웨에 가지 않으려 한 것일까요?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동쪽(오늘날 이라크의 모술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기원전 705년부터 681년까지 앗시리아 제국을 통치했던 세나게립 왕의 멋진 수도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르곤 2세는 722년부터 705년까지 통치하면서 721년에 북이스라엘을 약탈하여 완전히 황폐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세나게립 또한 701년 이스라엘의 남쪽 절반인 유다도 침공했던 왕이었습니다.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파괴되었으며, 그 주민들은 유배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따라서 앗시리아는 원수의 나라이고 성서에서는 앗시리아를 가장 악한 곳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오늘 요나서에서 니느웨는 악의 화신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요나서에서 니느웨는 하나님께 순종적입니다.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요나 입장에서 니느웨는 망해야 할 곳이었고, 망하면 좋은 곳이었습니다. 원수이니까요. 그래서 "사십일 뒤에 너희는 망한다"는 예언을 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말해주었다가 정말로 이 사람들이 회개해서 하나님이 벌을 내리시지 않으면 원수를 갚을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치밀어 올랐고, 하나님께 불평불만을 하자,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4:4)

요나의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요나는 예언자이지만 자기 생각과 경험과 복수심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의 하나님은 분명 이런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것입니다. 즉 요나의 이야기는 예언자조차도 자기 생각, 자기 고집, 자기 확신으로 인해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거역하고 반항할 수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바로 요나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은 다르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일을 행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고집을 부리며 하나님의 계획을 어그러트릴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코앞의 교회를 보지 못한 목사님처럼, 요나는 자기 앞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보고도 기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정관념]

사도행전에서 만나는 베드로도 요나와 비슷한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베드로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믿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성서가 금지했던 음식은 절대로 먹지 않았습니다. 레위기 11장에 부정한 동물을 먹지 말라고 되어 있고, 베드로는 이 규정을 철저하게 지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서의 율법조차도 잘못 쓰이면 때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베드로는 율법에 충실한 나머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새로운 시대적 사명을 깨달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심으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베드로의 신념이 차단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직접 베드로에게 개입하시고, 환상을 통해 베드로의 고정관념을 깨트려 주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율법 조문에 매여 하나님의 직접 음성에도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인간의 고집과 아집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면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셔서도 듣지 않는다는 거지요. 베드로도 분명히 "주님!"이라고 불러놓고도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의방고미(依方故迷), 그리고 원효의 화쟁(和諍)]

불교의 대승기신론에 보면 '의방고미'(依方故迷)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의 방법, 또는 하나의 방향에 의지하기 때문에 길을 잃는다"라는 뜻입니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 생각, 방향만을 기대고 있기에 바로 거기로부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유의 경험으로 저마다의 가치관과 신념이라는 '방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방향에만 기대어서 세상을 보려고 할 때, 사물과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관점만을 고집하기 쉽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성과 복잡성이 증가하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서로 자기 관점만을 고집할 때, 우리 사회는 갈등과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승기신론을 누구보다 깊이 읽고 주석한 사람이 바로 우리 땅의 원효(元曉)입니다. 원효가 살았던 7세기 신라는 동아시아 전체로 보았을 때 변방이었고, 당대 많은 스님이 여러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지금 한국 대학 실정과 흡사하지요.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이 자기가 배운 일부의 학풍들을 가지고 서로 다투게 됩니다. 이 종파는 이 경전이 옳다 하고, 저 종파는 저 교리가 옳다 하며 서로를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원효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학을 가지 못했지만, 오히려 중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학설을 스스로 소화해 내며, 어느 한 편을 들어 다른 편을 꺾으려 하지 않고, 화쟁(和諍)의 길을 열었습니다.

원효는 『열반경(涅槃經)』에 나오는 군맹무상(群盲撫象)의 비유를 들어서 화쟁을 설명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코끼리의 일부를 만지고 저마다 주장을 하는데, 누구든 코끼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기에 그 말 이 다 옳지만[皆是], 누구든 코끼리의 전모를 보지 못하고 부분을 전체로 오인하니 또 다 그르다[皆非]는 개시개비[皆是皆非]의 논리를 펼치며 열린 대화를 통해 '진영의 감옥'에서 벗어나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합니다.

각자의 주장에는 저마다 붙들고 있는 일리(一理)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부분의 진리를 전체라고 우기며 절대화하는 집착입니다. 그래서 화쟁의 첫걸음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귀를 여는 것입니다. 상대의 말 속에 담긴 일리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의 부분들이 만날 때 비로소 코끼리의 온몸이, 진리의 더 크고 온전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목사이기도 한 김윤환 시인의 '난독증(難讀症)'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난독증(難讀症)

박씨는 정의를 자유라고 읽었다/ 김씨는 정의를 민족이라고 읽었다

부씨는 정의를 힘이라고 읽었다/ 오씨는 정의를 질서라고 읽었다

노씨는 정의를 평화라고 읽었다/ 이씨는 정의를 시장이라고 읽었다

붓다는 정의를 무욕이라고 읽었다/ 예수는 정의를 사랑이라고 읽었다

애비는 정의를 민주주의라고 읽었다/ 아들은 정의를 취업이라고 읽었다

시인은 정의를 괴물로 읽는다

사람들은/ 저마다 괴물 하나씩 키우며 /그것을 정의라고 읽는다

정의라고 믿는다.

(김윤환, 「이름의 풍장」, 애지, 2015.)

서로 다른 이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지니는 것은 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이상 각자가 지닌 견해가 시공간을 초월한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각자 자신의 신념을 가지지만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고, 다른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며, 서로 다른 의견 속에서 함께 공동선을 찾아가고 일구는 것이 오늘 우리의 과제이고, 향린교회의 민주적 운영의 매우 중요한 밑바탕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당면과제를 풀어갈 때, 늘 주의해야 하는 것은 자기 견해를 절대화하면서 그 견해에 대해 집착하는 것입니다.

[고정관념 깨기]

그렇다면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 자기 관점의 절대화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 춘추전국 시대 송나라에, 손이 트지 않는 약을 잘 만들어서 대대로 솜을 물에 빨고 표백하는 일을 가업(家業)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이 이야기를 듣고 그 비방(秘方)을 큰돈, 백금(百金)을 주고 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친족들을 모아 상의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대대로 솜 빠는 일을 하고 있지만 수입은 몇 푼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 하루아침에 그 기술을 백금에 팔게 되었으니 넘겨 주자"고 하였습니다. 나그네는 그 비방을 얻어 오나라 왕을 찾아가 설득했습니다. 손이 트지 않는 약이 있으니 겨울에 물에서 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침 월(越)나라와 전쟁이 일어나자 오왕은 그를 장수로 삼았고, 그는 한겨울에 월나라와 수전(水戰)을 벌여 크게 이겼습니다. 오왕은 땅을 떼어 그를 영주(領主)로 봉하였습니다. 장자는 이렇게 끝맺습니다. "손을 트지 않게 하는 것은 한가지인데,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영주가 되고 어떤 사람은 솜 빠는 일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것은 쓰는 바가 달랐기 때문이다."(能不龜手, 一也. 或以封, 或不免於洴澼絖, 則所用之異也. 『莊子』 「逍遙遊」)

같은 약입니다. 같은 비방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대대로 남의 솜이나 빠는 도구였고,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열쇠였습니다. 무엇이 달랐습니까? 약이 다른 것이 아니라 보는 눈이 달랐고, 쓰는 곳이 달랐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이란 결국, 손 트지 않는 약을 평생 빨래터에서만 쓰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늘 보던 대로만 보고, 늘 쓰던 대로만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장자의 이야기 앞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묻고 싶습니다. 나그네의 발상 전환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그러나 그 쓰임이 향한 곳은 어디였습니까? 전쟁이었고, 승전이었고, 제 몫의 영지였습니다. 발상의 전환 그 자체는 아직 복음이 아닙니다. 새로운 눈을 떴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늘 성서가 우리에게 묻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너의 새롭게 뜬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너 자신의 성공을 향해 쓰이느냐, 아니면 생명을 품는 일을 향해 쓰이느냐? 하나님의 발상 전환은 언제나 버려진 것, 밀려난 것, 원수라고 낙인찍힌 것을 품는 쪽으로 향합니다. 니느웨를 향했고, 고넬료를 향했습니다.

[버려진 것을 품는 눈]

여러분,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삼 분의 일가량이 못생겼다는 이유로 버려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맛에도 영양에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조금 크거나 작거나 흠집이 있어서 유통 규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밭에서 폐기되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우리나라의 한 젊은이들이 여기에 물음을 던졌습니다. "이 채소들이 정말 못난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시야가 좁은 것인가?" 그들은 전국의 농가에서 이른바 '못난이 농산물'을 모아 매주 가정의 식탁으로 보내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얼룩덜룩하고 울퉁불퉁하지만, 밭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힘차게 살아낸 채소들입니다. 버려질 뻔했던 수십만 킬로그램의 농산물이 그렇게 식탁에 올랐고, 수많은 가정이 이 채소들을 받아 들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못난 것은 채소가 아니라, 채소를 버리던 우리의 관점, 우리의 기준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https://uglyus.co.kr/main)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들었던 그 말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 흠집이 있다고, 규격에 맞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버린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온전한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잘 아시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전에 가면 전국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는 유명한 빵집, 성심당이 있습니다. 이 빵집은 한국전쟁 때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내려온 피난민이었던 임길순 님이 만들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대전에 정착한 그에게 성당의 신부님이 밀가루 두 포대를 나누어 주었고, 그는 그것으로 대전역 앞에 천막을 치고 찐빵을 쪄서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남다른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날 만든 빵의 삼분의 일은 반드시 배고픈 이웃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밀가루 두 포대도 나눔으로 받은 것이니, 빵집은 내 것을 파는 곳이 아니라 받은 것을 흘려보내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져, 성심당은 오늘도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십시오"(롬 12:17)라는 성경 말씀을 사훈으로 삼고, 매일 팔고 남은 신선한 빵을 지역의 복지관과 소외된 이웃들에게 나누고 있습니다.

빵집이 무엇입니까? 빵을 만들어 파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빵집을 다르게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통로로 본 것입니다. 같은 밀가루, 같은 빵인데 쓰임이 달랐습니다. 장자의 말대로 "쓰는 바가 달랐던 것"(所用之異也)입니다. 그리고 그 쓰임이 자기를 향하지 않고 이웃을 향했을 때, 칠십 년이 지나도록 온 나라가 사랑하는 향기로운 빵집이 된 것입니다.

[하늘의 마음을 품는 사람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는 모두 우리의 마음이 훨씬 더 넓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나는 적국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는 망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십이만 명의 사람들과 수많은 짐승의 생명을 생각하시며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구원의 소식이 유대인들에게만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적국의 장교 고넬료에게도 복음의 소식이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종의 특징은 "이방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하면서,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의와 싸우지만 분노의 불길에는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의가 이길 때까지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데, 그 방식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방식이기 때문에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성서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종교 행위들, 신앙 행위가 속 좁은 편견일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복수하는 분으로, 하나님을 유대교에 가두었던 요나나 베드로처럼 우리도 어쩌면 하나님을 교회에 가두어 두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고정관념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의 외침이 자칫 교만이나 우월감, 파괴적 분노라면 진지하게 다시금 검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훨씬 더 넓고 높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요나가 말한 대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이 없어서 내리시려던 재앙도 거두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속되다, 더럽다고 말하는 것도 그렇지 않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고, 모든 것은 아름다우며, 모든 것은 다 의미가 있다고 품어 안으시는 마음입니다. 바로 하늘처럼 높고 넓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삼아야 합니다.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은 우리 안에 열린 하늘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하늘을 닮아야 합니다. 좁고 닫혀 있는 방이 되어선 안 됩니다. 넓고 넓은 하늘이어야 합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가 되어야 합니다. 바다가 그렇게 넓은 것은 자신에게 흘러 들어오는 어떤 강줄기도 버리지 않고 품어 안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그렇게 넓은 것은 자신의 품으로 온 땅을 덮어주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향린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우리 자신만 생각하는 좁은 마음, 고정관념을 버리고 저 넓은 하늘 마음을 품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큰 일을 하실 것입니다.

[대답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요나서의 마지막 장면을 보십시오. 화가 난 요나는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니느웨가 어떻게 되는가를 지켜보며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박넝쿨 하나를 자라게 하셔서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주셨고, 요나는 그 박넝쿨 때문에 무척이나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하나님이 벌레 한 마리를 보내 박넝쿨을 갉아 먹게 하시니 넝쿨이 시들어 버렸고, 뜨거운 동풍과 햇볕에 요나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다"며 다시 화를 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박넝쿨이 자라는데 아무 수고도 하지 않았고, 그것을 키운 것도 아니다.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것인데도, 네가 그것을 그처럼 아까워하는구나.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도 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4:10-11)

그리고 요나서는 거기서 끝납니다. 요나의 대답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이 허공에 걸린 채로, 이 책은 끝이 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 질문이 요나에게만 던져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던져진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내가 저들을 아끼는 것이 어찌 마땅하지 않으냐?"

우리 교회는 향기로운 이웃이 되고자 하는 향린교회입니다. 일상에서 향기가 나는 교회가 되려면 우리 모두가 하늘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옹졸한 마음,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요나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갔고, 베드로도 마침내 고넬료의 집 문턱을 넘었습니다. 그때 니느웨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치게 된 것입니다. 요나는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랐지만, 하나님은 사랑으로 그들의 폭력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서의 마지막 질문은 이제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좁은 마음이 하늘처럼 넓어지는 것, 우리의 굳은 고집이 풀어져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뜻 앞에 활짝 열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대답이 되기를 빕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의 물음에 삶으로 대답하십시오.

좁은 방을 나서서 하늘이 되고,

모든 강줄기를 끌어안는 바다가 되십시오.

꺼져가는 심지도 살려내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손으로 세상을 품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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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가장 큰 위험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죄"

옥스퍼드대 수학자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존 레녹스(John Lennox) 박사가 최근 기독교 변증가 션 맥도웰(Sean McDowell)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신간「God, AI, a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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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여성들, 막달라 마리아 제자도 계승해야"

이병학 전 한신대 교수가 「한국여성신학」 2025 여름호(제101호)에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서방교회와는 다르게 동방교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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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수구 진영에 대한 엄격한 심판 있어야"

창간 68년을 맞은 「기독교사상」(이하 기상)이 지난달 지령 800호를 맞은 가운데 다양한 특집글이 실렸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1945년 해방 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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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교수는 '사이-너머'의 신학자였다"

장공기념사업회가 최근 고 숨밭 김경재 선생을 기리며 '장공과 숨밭'이란 제목으로 2025 콜로키움을 갖고 유튜브를 통해 녹화된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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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된 반공 담론, 이분법적 인식 통해 기득권 유지 기여"

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연합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공 관련 담론을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한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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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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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