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호세아 2:14-18, 고린도후서 12:7-10, 마가복음 1:9-13
설교문
우리는 참 힘든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세상입니다. 힘들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모른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실패했다고 말하면 더욱 안 됩니다. 상처받았다고 말하면 오해받습니다. 직장에서도 강해야 합니다. 사회에서도 당당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나는 믿음이 있어." "나는 괜찮아."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괜찮아." 그런데 정말 괜찮으십니까?
어쩌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조차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쓰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계속 말합니다. "괜찮아." "별것 아니야." "다 지나갈 거야." "나는 할 수 있어." 그렇게 우리는 살아갑니다.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상처받지 않은 척, 외롭지 않은 척, 필요한 사람인 척, 강한 사람인 척...... 그런데 신앙의 가장 깊은 자리는 어쩌면 바로 그 '척'이 무너지는 자리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어느 정도 가면이 필요합니다. 웃어야 할 때 웃고, 참아야 할 때 참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가면을 너무 오래 쓰다 보면 그 가면이 진짜 내 얼굴인 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가면을 썼는데, 나중에는 가면이 나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내가 진짜 나라고 착각합니다. 성공한 나, 유능한 나, 인정받는 나, 괜찮은 나, 강한 나...... 그런 나를 계속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그 가면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 가면 아래 있는 진짜 나를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39편의 시인은 하나님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신다]"(2절)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잘 보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괜찮은 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이런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좋은 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당에 와야 하고, 기도를 잘해야 하고,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하고, 마음이 평안해야 하고, 믿음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배와 기도와 말씀은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통로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시는 장소가 의외로 자주 등장합니다. 광야(廣野, wilderness)입니다.
광야,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곳, 의지할 것이 없는 곳, 길을 잃기 쉬운 곳, 혼자 남겨지는 곳,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곳입니다. 성서에서 광야는 단순히 지리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인생이 더 이상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 광야입니다. 내가 가진 힘이 통하지 않는 곳이 광야입니다. 사람들의 인정이 사라지는 곳, 내가 자랑하던 것들이 더 이상 나를 지켜주지 못하는 곳, 그곳이 광야입니다. 내가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더는 말할 수 없게 되는 곳, 그곳이 인생의 광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성서 호세아 2장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리라."(14절) 그리고 15절에 "아골 골짜기"가 등장합니다. 모두 광야의 이미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광야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런데 광야로 데려가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버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의 마음에 말하리라."
하나님은 광야에서 우리의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왜 광야입니까? 광야에서는 다른 소리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경쟁이 멀어집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작아집니다. 내가 만들어놓은 자아의 소리가 조금씩 잠잠해집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어에는 아주 흥미로운 언어적 울림이 있습니다. 광야를 뜻하는 말이 '미드바르'(מִדְבָּר)입니다. 말씀을 뜻하는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다바르'(דָּבָר)입니다. 그리고 성전의 가장 깊은 곳, 즉 지성소를 가리키는 말로 '드비르'(דְּבִיר)가 있습니다. 이 세 단어의 정확한 어원적 관계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언어를 묵상할 때 이 세 단어 사이의 울림은 참 아름답습니다. 미드바르는 광야, 다바르는 말씀, 드비르는 지성소...... 하나의 노래 같지 않습니까.
어쩌면 성서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광야에 들어가면 말씀이 들립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기 시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지성소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광야는 하나님이 없는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는 은총의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광야에 서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나의 약함이 드러납니다. 내가 외롭고 아픈 사람이라는 걸 감출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약함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가시를 없애주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네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9절a)
바울은 아주 놀라운 신앙의 역설을 발견합니다. 나는 약해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더 분명해집니다. 나는 무너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능력은 더 선명해집니다. 내가 나를 붙들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침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9절b)
이것은 약함을 미화하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고난이 좋다는 말도 아닙니다. 상처를 받아야 하나님을 만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뜻은 이것입니다. 약함이 드러난 그 자리에서 비로소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는 더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28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9절)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약한 사람을 택하십니까? 우리는 사람을 택할 때 세상이 높이고, 인정하고,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의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것들"을 택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때야 우리는 나의 실존의 본질에 정직해지고 하늘 바라보며 나를 열 수 있기 땜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자기 자랑을 내려놓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저는 괜찮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 저는 괜찮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충분합니다"가 아니라, "하나님, 저는 부족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강합니다"가 아니라, "하나님, 저는 약합니다"라고 솔직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패배가 아닙니다. 사실은 그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웅인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포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17절a)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17절b)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기도조차 나오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목이 매어 찬송도 나오지 않는 시간이 있습니다. "나는 신앙인이다"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때 우리가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 상한 마음입니다. 그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새번역), 하나님은 그것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인 마가복음 1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을 광야의 이야기로 열어갑니다. 마가복음은 네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쓰인 복음서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11절)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다음 장면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십니다. 마가는 이렇게 분명히 기록합니다. "성령이 곧[바로]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Immediately, the Spirit impelled Him to go out into the wilderness, NASB). 하나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내모셨습니다."(새한글성경) 그렇게 예수님은 광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시험을 받으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님도 광야를 지나셨습니다.
광야는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에게만 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에게도 광야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마가복음의 순서를 보십시오. 먼저 하늘에서 말씀이 들립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리고 광야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오늘 중요한 말씀을 전합니다. 광야가 온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광야 앞에서 하나님은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다." 세상이 뭐라고 말하든, 내가 스스로 실패했다고 느끼든,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든, 누군가가 나를 버리든, 내가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든, 하나님은 그 광야 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광야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느 메마른 들판 위에 서 있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광야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병원이 광야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직장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정일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녀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은퇴 이후의 삶일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지독한 외로움일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광야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실패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깊은 내면의 상처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광야라고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나는 괜찮아." "별일 아니라니까." "다 잘될 거야."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때때로 이렇게 말할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지금 나는 광야에 서 있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약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상처받았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외롭습니다."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두렵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고백은 절대 패배가 아닙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생명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용기를 주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한국문학의 대문호 박경리 선생입니다. 박경리 선생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삶의 여러 비극과 상실을 지나야 했고, 그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삶의 광야에서 우리에게 한국 문학사의 거대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가 쓴 『토지』는 1969년에 집필을 시작해서 1994년에 완간되었습니다. 무려 26년이 걸렸습니다. 박사논문 쓰시는 분들이 많으신데, 혹 26년 박사논문 쓰실 의향이 있으실지요. 박경리 선생의 『토지』는 200자 원고지로 4만여 장에 이르는 대작입니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에 이르는 한국 근대사의 격동 속에서 수많은 사람의 삶과 고통과 희망을 그려낸 우리 문학사의 대서사시입니다.
그런 박경리 선생은 『토지』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 한 문장에 저는 발걸음이 멈췄습니다. "제 삶이 평탄했다면 저는 글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아, 그랬습니다. 그의 삶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글을 썼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광야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문학이 나왔습니다. 깊은 아픔이 있었기에 그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뼈를 깎는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한 인간의 삶을 넘어 한 시대의 우리 모두의 삶을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저는 고통 자체를 미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광야가 좋다고도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박경리 선생이 고통을 원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에는 반드시 광야가 있고, 우리 인생에 찾아온 광야는 반드시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때로는 그 광야에서 우리가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태어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한 편의 글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의 방향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더 깊은 믿음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광야가 나를 비워버린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빈자리에 새로운 것을 시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 인생에 있는 빈자리를 너무 서둘러 실패라고 단정하진 마십시오. 내가 무너진 것 같은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새로 시작하고 계시는지 우리는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길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정호승,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중에서.) 참 이상한 말입니다. 길이 끝났는데 어떻게 길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삶의 역설입니다. 내가 길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곳에서 새로운 길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광야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광야는 길이 없는 곳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서를 보십시오. 하갈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엘리야는 광야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니 광야는 끝이 아닙니다. 광야는 절망이 아닙니다. 광야는 새로운 시작점입니다. 내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십니다. 내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길을 만드십니다. 내가 비었다고 생각하는 곳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채우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광야를 너무 빨리 끝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의 광야를 새로운 길의 시작으로 바꾸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교우 여러분, 혹시 지금 광야에 계십니까? 그렇다면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광야는 하나님이 없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입니다. 내 삶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인생의 지성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상한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가면이 벗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강한 모습으로 나아갈 때보다, 더 이상 강한 척할 수 없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올 때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말씀 하나를 붙들고, 오늘도 우리 인생의 광야를 걸어갑시다. 세상의 소음과 내 안의 잡음과 남들의 눈으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여러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광야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광야에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의 상한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의 약함 가운데 오히려 당신의 능력을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십시오. 그래서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인생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