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가 최근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4단계 BK21 어깨동무사업팀이 마련한 ‘한국종교문화 뒤적이기’ 특강에서 ‘종교, 문화로 읽기’를 주제로 강연했다.
정진홍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가 종교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종교를 이미 주어진 절대적 실체로만 바라보기보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모자람을 경험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만들어 온 문화적 산물로 살펴보자는 것이다.
정 교수는 지난 18일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4단계 BK21 어깨동무사업팀이 마련한 '한국종교문화 뒤적이기' 특강에서 '종교, 문화로 읽기'를 주제로 강연했다. 이번 특강은 '종교, 문화와 지역사회를 다시 잇다'를 주제로 진행되고 있는 사업의 하나로 마련됐다.
정 교수는 이날 종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일 수 없다는 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종교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종교가 있는가 하면 비종교인이나 반종교인의 시선도 있으며, 각각의 입장은 종교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종교에 대한 물음은 인간의 실존적 절박함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단순한 지적 호기심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종교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수채화'와 '소묘'
정 교수는 종교의 현존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수채화'와 '소묘'라는 비유를 제시했다. '수채화'가 종교 안에서 바라본 종교의 모습이라면, '소묘'는 종교 밖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종교 내부의 자리에서는 깊은 산사의 고요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는 빛처럼 종교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평안과 구원의 모습을 경험할 수 있다. 반면 종교 밖에서는 종교의 빛과 그림자를 보다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다.
이 두 시선은 종교를 둘러싼 여러 질문으로 이어진다. 종교는 인간에게 평안을 주는가, 아니면 맹목과 위선을 낳기도 하는가. 종교적 폭력은 종교의 본질적인 문제인가,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조건에서 발생하는 현상인가. 다종교·다문화 사회에서 이슬람에 대한 공포와 한국에서 나타나는 강한 종교 현상은 어떻게 함께 이해할 수 있는가. 종교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왜 오히려 극단적인 종교 현상이 나타나며, 동시에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늘어나는가.
정 교수는 서로 다른 관점들이 모두 종교가 처한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 원인과 해법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서로 충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로 다른 실이 만나는 '틈'에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정 교수는 이러한 갈등을 넘어설 가능성을 전통적인 베틀에 비유했다. 날실과 씨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두 실이 교차하는 순간 하나의 새로운 천이 만들어진다. 서로 다른 관점이 만나는 짧은 '틈'에서 기존의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틀 자체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베틀을 움직인 건 사람이다. 베틀은 지어지고 주어진 것이다." 정 교수는 이 같은 관점에서 서로 다른 실재가 만나는 '틈'에서 새로운 실재가 나타난다는 의미의 '틈의 존재론'을 제시했다. 서로 다른 생각이나 종교, 문화가 만나는 지점을 단순한 충돌의 공간으로만 보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이 생성되는 공간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다종교·다문화 사회에서 종교 간 갈등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서로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만나고 대화하는 과정 자체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진홍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가 최근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4단계 BK21 어깨동무사업팀이 마련한 ‘한국종교문화 뒤적이기’ 특강에서 ‘종교, 문화로 읽기’를 주제로 강연했다.
"사람이 없으면 종교도 없다"
정 교수가 이날 특히 강조한 것은 종교의 '문화 창조'라는 측면이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한계를 경험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종교가 형성되어 왔다고 설명했다. 신·불·천·도와 같은 종교적 개념은 물론 절대와 초월, 영원이라는 관념 역시 인간의 문화적 창조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이 없으면 종교는 없다. 사람이 있어 비로소 신은 있다. 신도가 없으면 신도 사라진다." 이 발언은 종교의 존재를 인간의 문화적 경험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정 교수의 문제의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종교를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로 규정하자는 주장과는 다른 차원의 질문으로도 읽힌다.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유한성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넘어서는 의미와 초월을 어떻게 구성해 왔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에 대한 연구는 신학이나 종교학의 좁은 영역에만 머물 수 없다. 인간과 문화, 사회와 역사, 공동체와 개인의 삶을 함께 살펴보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에서 '영성'으로...그러나 인간의 창조는 계속된다
정 교수는 앞으로 '종교'라는 이름과 형태가 변화할 가능성도 언급했다. 미래에는 종교라는 말 대신 '영성'이나 '영적'이라는 표현이 보다 널리 사용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그러나 명칭과 형태가 달라진다고 해서 인간의 초월 추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인간이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려는 문화적 창조 행위는 계속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가 강연의 끝에서 강조한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신뢰였다. 인간을 종교와 신을 지을 수 있는 존재로 신뢰하는 것이 인간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정 교수가 사용한 '자존'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의미의 자존(自存)과 스스로의 존엄을 지킨다는 의미의 자존(自尊)이다.
종교가 인간을 억압하거나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더 나은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번 특강을 기획한 임성욱 교수는 "이번 강연은 한국 종교문화를 특정 종교의 내부적 관점이나 외부의 비판적 시각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 사이의 긴장과 교차 속에서 새롭게 성찰해 보는 자리였다"고 평가했다.
이어 "종교를 인간의 문화적 창조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정진홍 교수의 문제의식은 앞으로 종교·문화·지역사회의 관계를 탐색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며 "서로 다른 존재와 관점이 만나는 '틈'에서 연결과 상생의 가능성을 찾는 연구와 실천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의 의미를 묻는 일은 결국 인간의 의미를 묻는 일과 맞닿아 있다. 종교를 둘러싼 갈등이 깊어질수록 필요한 것은 자신의 관점만을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선이 만나는, 씨실과 날실이 얽히는 '틈'을 발견하는 일일 수 있다.
그리고 그 틈의 한가운데에는 종교보다 먼저 사람이 있다. 종교가 무엇인지 묻기 전에, 종교를 만들고 믿고 변화시키며 때로는 그것을 넘어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 정진홍 교수의 강연은 바로 그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우리 앞에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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