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창세기 2:4-15, 골로새서 1:15-20, 누가복음 22:14-20
설교문
오늘은 세계성찬주일(World Communion Sunday)입니다. 잠시 후 우리는 이 자리에서 떡을 떼고 잔을 나눌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 곳곳의 교회들도 오늘 성찬의 식탁에 모입니다. 언어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예배하는 방식도 다르고, 교단도 다릅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떡과 서로 다른 잔으로 같은 주님을 고백합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조금 불편한 이야기부터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참 많이 갈라져 삽니다. 생각이 다르면 갈라집니다. 정치적 생각이 다르면 갈라지고, 세대가 다르면 갈라지고, 지역이 다르면 갈라지고, 경제적 형편이 다르면 갈라지고, 신앙의 전통이 다르면 갈라집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갈라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갈라져 사는 것이 이제 너무 익숙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와 생각이 맞는 사람의 이야기만 듣습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안심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뉴스만 보고, 내 생각을 확인시켜 주는 말만 듣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틀린 사람'이 됩니다. 조금 더 지나면 그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어집니다. 그리고 더 지나면 그 사람이 아파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이 두렵습니다. 분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분열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날마다 전쟁의 뉴스를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저녁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집이 폭격을 당하고, 아이가 죽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수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우리는 화면을 넘깁니다. 다른 뉴스를 봅니다. 그리고 잠시 후 잊어버립니다. 처음에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너무 오래 보았습니다.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픔에도 익숙해졌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무서운 영적 무감각이고 질병인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거룩한 공회(公會)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매주 그렇게 고백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믿습니까? 세계에는 수많은 교파가 있습니다. 가톨릭과 정교회와 개신교가 갈라져 있고, 개신교 안에서도 셀 수 없이 많은 교단이 갈라져 있습니다. 서로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한 식탁에 앉지 못합니다. 한 분의 주님을 믿는데 주님의 식탁은 갈라져 있습니다. 이것을 너무 오래 경험하다 보니 이제 우리는 이것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원래 교회란 그런 거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주십시오."(요한복음 17:21, 공동번역) 예수님의 고별 기도입니다. 제자들과 떠나시면서 드린 예수님의 마지막 간절한 기도는 우리 모두 하나 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일치를 비는 기도였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간절하게 기도하셨던 것을 우리는 이천 년이 지나도록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일치를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별로 아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오늘 지상의 교회들을 바라보시며 가장 가슴 아파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로는 서로 형제자매라고 부르면서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사는 것,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서 그 몸을 계속 나누고 찢는 것, 그리고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왜 당연합니까.
교우 여러분, 사실 분열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집에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서로 말도 건네지 않는 가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불편해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때는 아주 가까웠지만 어떤 일 이후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같이 예배는 드리지만 가능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인사는 하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관계를 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한자리에 함께 앉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식탁을 차리십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당신의 아주 특별한 식탁을 차리십니다. 누가복음 22장입니다. 예수께서 떡을 드셨습니다.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떡을 떼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그런데 저는 이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 식탁에 누가 있었습니까? 완벽한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잠시 후 예수를 버리고 도망갈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더 크냐고 다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힘든 순간에 잠들어 버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그들과 떡을 나누셨습니다. 이것이 놀랍습니다.
주님의 식탁은 자격 있는 사람들의 식탁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완벽하게 화해한 사람들만 앉는 식탁도 아니었습니다. 부족하고, 겁이 많고, 서로 다투고, 심지어 주님을 배신할 사람들까지 앉아 있는 식탁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바로 그들에게 떡과 잔을 주셨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 식탁에 앉은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나 자신과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아직 충분히 사랑하지 못합니다. 용서하려고 해도 마음이 따라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기후위기, 전쟁, 폭력과 같은 세상의 아픔을 다 품고 살기에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 지쳐 있습니다. 내 안의 어떤 상처는 너무 깊어서 "먼저 손을 내미십시오"라는 말조차 또 하나의 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다 화해하고 나서 오너라" 하지 않으십니다. "마음이 완전히 깨끗해지면 오너라" 하지도 않으십니다. 먼저 떡을 주십니다. 먼저 잔을 주십니다. 누군가 곧 자신을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에게 떡과 잔을 주십니다. 그들이 곧 다 도망갈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떡과 잔을 주십니다. 그들이 준비되었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은혜가 필요했기 때문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겨우 여러분, 오늘 우리도 잘해서 이 식탁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온전해서 이 식탁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옵니다. 용서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옵니다. 다시 시작할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왜 아직도 그것밖에 못했느냐"라고 꾸짖으시기보다, 먼저 떡과 잔을 내미시며 말씀하십니다. "괜찮다. 받아 먹으라, 받아 마시라.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그러므로 성찬은 "우리는 서로 사이좋게 지냅시다"라는 아름다운 예식이 아닙니다. 성찬은 그보다 훨씬 더 불편한 사건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떡과 잔을 받는 순간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밀어낸 사람도 주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내가 듣고 싶지 않은 사람도 주님의 식탁에 자리가 있다는 것을, 내가 쉽게 미워했던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풍요 때문에 누군가와 어떤 생명이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성찬은 나와 예수님만의 조용한 경건의 시간이 아닙니다. 성찬은 우주적이고 사회적인 사건입니다. 성찬에는 언제나 다른 생명과 불편한 타인이 들어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한 말도 바로 이것이 아니었습니까. 떡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한 몸인데(고린도전서 10:17), 부유한 이들이 이 떡을 먼저 먹고 가난한 이들은 굶주리는 성찬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두고 바울은 분개하여 이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크게 꾸짖었습니다.(고린도전서 11:21, 29) 주님의 몸을 분별한다는 것은, 이 식탁에서 누가 소외되었는지, 누가 굶주리고 있는지, 누가 빠져 있는지를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찬에는 불편한 타인만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치고 상처 입고 실패한 나도 들어옵니다. 성찬의 자리에는 내가 품어야 할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품어주셔야 할 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떡을 받으면서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는가" 하고 자책하지 마십시오. 그 떡과 잔은 우리가 완전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한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힘이 다 없어졌다면 먼저 주님의 사랑을 받으십시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힘이 다 빠졌다면 먼저 주님의 용서를 받으십시오. 내 마음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 세상의 아픔까지 품을 여유가 없다면, 오늘은 먼저 주님께서 나의 아픔을 품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고통받는 모든 생명을 품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교우 여러분, 성찬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식탁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주는 은혜의 식탁입니다.
잠시 후 우리는 작은 빵 한 조각을 받을 것입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너무나 작은 빵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빵을 조금만 더 오래 바라보십시오. 그 떡 안에 우리가 외면했던 얼굴이 있습니다. 전쟁으로 집을 잃은 아이가 있습니다. 고향을 떠난 난민이 있습니다. 낯선 다른 나라를 찾아온 외국인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으로 말없이 사라져 가는 숲과 강과 바다와 수많은 생명도 있습니다. 그 작은 떡 안에 그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 말씀하셨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세계성찬주일은 우리가 이미 하나가 되었다고 축하하는 날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갈라져 있는지를 아파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갈라짐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우리의 굳은 마음을 발견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완전히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이 식탁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옵니다. 세상이 평화롭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있기 때문에 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잘 돌보았기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닙니다. 너무 많이 상처 입혔기 때문에 옵니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물으며 나아옵니다. "주님, 우리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주님은 말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떡을 떼십니다. 잔을 드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받아 먹으라. 받아 마시라."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로새서 1:20)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물입니다. 사람만이 아닙니다. 교회만이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나누는데 하나님은 자꾸 잇고 계십니다. 우리는 벽을 세우는데 하나님은 벽을 허물고 계십니다. 우리는 "너는 저쪽, 나는 이쪽"이라고 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모두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우리가 갈라놓은 것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이어가시는 역사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한 식탁입니다. 한 몸입니다. 한 세계입니다. 그리고 한 분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그 주님이 친히 사랑의 식탁을 차리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 이 식탁에 나아올 때 내 곁을 조금 비워놓는 것입니다. 그동안 함께 앉지 않았던 사람을 위해, 낯선 타자를 위해, 하나님이 지으신 다른 생명을 위해 내 곁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늘 우리는 한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거룩한 신비를 맛볼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