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낮 열두 시쯤 그 찌는 듯한 열기 속에서 하나님은 내게 오신다. 200그램 죽의 모습을 하시고.” (인도의 한 여성 신자)
그녀의 이런 하나님 고백은 전통신학에서 이야기하는 전지전능하고 거룩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을 깔아뭉개는 신성모독적 발언인가?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워 주는 “200그램 죽”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느끼는 그녀의 소박한 생활신학은 세련된 종교언어로 추상적인 신학적 개념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들의 이론신학보다 열등한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그녀의 하나님 고백 한마디 한마디에 담겨 있는 뜻을 조용히 묵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매일 낮 열두 시쯤 그 찌는 듯한 열기 속에서.”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느 날은 존재했다가 어느 날은 존재하지 않아도 그만인 명멸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매일” 하나님을 느낀다. 그 느낌이 있기에 그녀는 가난하고 고달픈 삶 가운데서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그녀를 하루하루 살게 하는 구체적인 생명의 힘이다.
“하나님은 내게 오신다.”
그녀의 생활신학은 1인칭이다. 그녀는 하나님에 “관해서” 3인칭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그녀의 하나님 고백은 단순한 말장난이나 신학적 유희가 아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울부짖었듯이,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내게” 오시는 하나님이다. 저 하늘에 초연한 모습으로 계신 초월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매일” “내게” 오시는 다정한 하나님이다.
“200그램 죽의 모습을 하시고.”
그녀의 신학은 추상적이며 관념적이지 않다. 물질적이며 구체적이다. 그녀의 신학은 거창하고 현란하지 않다. 그야말로 작고 소박하다. 그녀는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세련된 종교언어를 동원하거나 교리를 들먹이지 않는다. 그녀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명하기 위해 머리를 짜낼 필요가 없다. 그녀는 그녀를 살게 하는 “200그램 죽”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느끼고 체험한다. 그녀의 삶과 하나님은 아무런 거리를 두지 않고 밀착되어 있다. 하나님은 “200그램 죽의 모습”으로 그녀의 삶과 동행한다. 아니, 하나님은 “200그램 죽의 모습”으로 그녀에게 말없이 먹혀 그녀의 여린 생명을 지탱시켜 준다. 하나님은 그녀의 밥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밥이다. 하나님은 공허한 관념이 아니다. 하나님은 배를 곯는 사람들에게 밥으로 오셔서 그들을 살리시는 물질이다. 하나님은 세상살이에 지쳐 절망한 사람들에게 희망으로 오셔서 그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정신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별 볼일 없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정한 친구로 오셔서 그들의 멍든 가슴을 어루만지시는 따뜻한 손길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그들의 삶의 원동력이 되신다. 하나님은 예수, 성령, 전태일, 마더 테레사 수녀, 문익환 목사, 그리고 “200그람 죽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생명과 사랑과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이루어 가신다.
다시금 묻는다. 그녀의 하나님 고백은 신성모독인가?
대만의 민중신학자요 문화신학자인 송천성은 말한다. “삶 자체가 신학의 원자료다. 신학은 삶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 요인들을 다루어야 한다. 신학적 두뇌로만 이해할 수 있는 추상적 개념들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문제라면 그 어떤 것도 신학에 부적당하거나 중요성이 없다고 판결해선 안 된다. 신학은 하늘이 아닌 땅과 씨름해야 한다.... 살아 있는 인간 상황과 무관한 신학이라면 그것은 이론신학일 뿐이다. 이런 종류의 신학은 머리를 기쁘게 해줄 수 있을지언정 영혼을 울리거나 가슴을 찌르는 신학이 될 수 없다.... 아시아의 신학이 밥을 거부한다면 그 신학은 영양실조에 걸리고 병이 들고 말 것이다.”
신학만 그럴까? 신앙도, 목회도, 예배도, 선교도 “하늘이 아닌 땅과 씨름해야” 하는 게 아닌가. 나의 신앙, 나의 목회는 혹시 “밥”을 거부한 나머지 “영양실조”에 걸려 있지나 않은지 깊이 반성할 일이다.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