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어 하느님 앞에 설 때/여기 세상에서 한 일이 무엇이냐/한사람 한사람 붙들고 물으시면/나는 맨 끝줄에 가 설 거야/내 차례가 오면 나는 슬그머니 다시/끝줄로 돌아가 설 거야/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세상에서 한 일이 없어/끝줄로 가 서 있다가/어쩔 수 없이 마지막 내 차례가 오면/나는 울면서 말할 거야/정말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그래도 무엇인가 한 일을 생각해보라시면/마지못해 울면서 대답할 거야/하느님, 길가의 돌 하나 주워/신작로 끝에 옮겨놓은 것밖에/한 일이 없습니다. (정종수, '길가의 돌' 中에서)
나는 정종수라는 시인을 모른다. 하지만 몇 년 전 신문 한 모퉁이에 실린 그의 시의 일부를 보는 순간 뭔가 마음 찡하게 와 닿았다. 그래서 그의 시를 정성껏 오려 책상 위의 유리 갈피에 끼워놓고 틈틈이 읽는다.
시인은 '겸손의 영성'을 깨우친 사람 같다. "내 죽어 하느님 앞에 설 때" "여기 세상에서 한 일이 무엇이냐" 물으시면, 몇 번이고 뒷걸음질치다가 "하느님, 길가의 돌 하나 주워 신작로 끝에 옮겨놓은 것밖에 한 일이 없습니다"라고밖에는 달리 내세울 게 없다는 그의 수줍은 듯 나지막한 고백에서 시인의 말없이 깊은 신앙 인격이 느껴진다.
비단 시인만이 아니리라. 진실로 믿음이 무르익은 사람이라면, "죽어 하느님 앞에 설 때" 자신이 살아 생전에 무척 많은 일을 했다고 뽐내지는 않을 것이다. 믿음의 길이란 인간사랑의 길이며 그리고 사랑에는 끝이 없는 법인데, 내 믿음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전하다고 어찌 잘난 체할 수 있을까.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도 여전히 부족하기만 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남몰래 얼굴 붉히는 겸손의 영성을 갖추지 못한 신앙생활이란 어쩌면 믿음으로 치장된 교만일지도 모른다.
시인이 "여기 세상에서" "신작로 끝에 옮겨놓은" "돌 하나." 그게 과연 뭘까? 아마도 사랑일 게다. 시인이 한평생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는지는 몰라도, 아마도 시인은 사랑을 건성으로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시인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만히 뒤돌아보면 부끄러워 감히 그 사랑을 내세우지 못하고 기껏해야 "돌 하나"에 그 사랑을 빗대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나님은 걷잡을 수 없는 소리들의 홍수 속에 난장판이 된 이 세상에 아직도 이런 나지막이 깊은 소리의 사람이 있음을 무척 흐뭇해하시면서 그의 영혼이 편히 쉴 안식처를 베푸실 것이다.
우리 주변을 잠시 돌아보자. 오늘 이 땅에 목소리 큰 사람들이 얼마나 설치는지 모른다. 나라의 살림살이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도 깊이 반성하기는커녕 틈만 나면 국민들을 상대로 큰소리 뻥뻥 쳐대는 정치가들과 재벌 기업가들과 고위 관료들만 그런 게 아니다. 목소리 크기로는 이 땅의 자칭 교회 지도자들도 뒤지지 않는다. 마치 자신들이 구세주라도 되는 양 순박한 신자들 위에 군림하며 반(反)예수적 설교를 거침없이 토해내는 그들. 허울 좋은 교세 확장과 종교적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그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서글픈 분노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평범한 목회자들과 신자들 가운데도 목소리 크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 꽤 있다. 기독교는 '말'의 종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 넘친다. 고요히 내면을 들여다보기에는 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너무 수다스럽고 시끄럽다. 밖으로 쏟아놓는 말이 너무 많아 어쩐지 공허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생활과는 동떨어진 입술만의 말, 말, 말!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태 7:21-23). 인간사랑·민중사랑이라는 알맹이가 빠진 신앙생활을 한 신자들에게 심판의 날에 떨어질 주님의 불호령이다.
그대는 "죽어 하느님 앞에 설 때" 뭐라고 말할 것인가? 그대는 침묵과 겸손의 영성에 날로 다가서면서 말없이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신자가 될 마음이 있는가?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