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독교의 종말론과 심판을 다시 생각한다

"구원의 묘약은 없다"

1. 종말의 징조 - 마태 24:12
 
예루살렘 성전을 굽어보는 올리브산에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묻는다. “주님께서 오실 때와 세상이 끝날 때에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저희에게 알려 주십시오.”(마태 24:3). 그러자 예수는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 난리, 전쟁 소문, 민족과 나라들 사이의 침략, 곳곳에서의 기근과 지진, 제자들이 당하게 될 박해와 죽음, 사람들 사이의 배반과 미움, 거짓 예언자의 등장 따위의 징조들을 이야기한다(24:4-11).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세상은 무법 천지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24:12)라고 대답한다.
 
종말의 징조가 되는 여러 재난들에 대한 보도는 세 공관복음서 모두 비슷하다(마태 24:3-14; 마가 13:3-13; 누가 21:7-19).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볼 수 없게” 됨을 종말의 한 징조로 보도하는 것은 마태복음뿐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는 마태복음 저자의 신학적 관심의 일면이 드러나 있다고 풀이할 수 있다.
 
다른 징조들이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외부적인 재난들이라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볼 수 없음은 우리의 삶의 내면과 연관된다. 그런데 마태복음 저자는 바로 이 점을 날카롭게 포착하여 ‘종말의 징조는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평범한 듯 신선한 신학적 통찰력을 보여준다.
 
보통 우리 기독교인들은 ‘종말의 징조’ 하면 뭔가 굉장한 사건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세 공관복음서가 보도하고 있듯이 종말의 징조는 주로 외부의 큰 재난들이나 어수선하고 무질서한 사회 분위기라는 것을 예수도 인정한다. 하지만 예수는 인간의 외면에만 관심을 두는 게 아니다. 예수는 인간의 내면 또한 날카롭게 관찰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따뜻한 사랑”이 없는 것 역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종말의 징조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다.
 
사도 바울도 ‘마지막 날’의 징조를 천지개벽의 엄청난 사건들에서 찾으려 들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주변의 일상(日常)에서 종말의 징조를 발견한다: “마지막 때에 어려운 시기가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아두시오. 그 때에 사람들은 이기주의에 흐르고 돈을 사랑하고 뽐내고 교만해지고 악담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감사할 줄 모르고 경건하지 않고, 무정하고 무자비하고 남을 비방하고 무절제하고 난폭하고 선을 좋아하지 않고, 배신하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자만으로 부풀어 있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할 것이며, 겉으로는 종교생활을 하는 듯이 보이겠지만 종교의 힘을 부인할 것입니다”(딤후 3:1-5).
 
종말의 징조를 그 무슨 엄청난 사건들과 관련지어 이야기하는 게 전통적인 신학적·교리적 종말론이라면, 예수와 사도 바울처럼 종말의 징조를 인간의 내면이나 우리의 일상생활 주변에서 찾는 것을 우리는 생활신앙의 종말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외면과 내면, 크고 엄청난 사건들과 우리 생활 주변의 일상적이고 작은 일들, 이 둘에 대한 관심과 통찰력이 잘 균형을 이룬 신앙이야말로 성숙한 신앙이다.
 
우리는 전 세계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테러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심화와 생태계의 파괴 따위에서도 ‘세상이 계속 이런 식으로 굴러가면 결국 인류 역사는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종말론적 역사의식을 느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 함께 우리는 우리 주변의 다양한 삶의 모습, 가령 질병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노인들의 모습에서, 부모의 이혼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웃음을 잃은 어린아이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남몰래 맹물로 배를 채우는 결식아동들의 불쌍한 모습에서도 종말의 징조를 읽는 날카로운 종말론적 역사의식을 길러야 할 것이다.
 
오늘 그대의 마음속에 “따뜻한 사랑”이 있는가? 없다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그대의 삶은 종말론적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2.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 마태 7:21-23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21-22절). 이 구절만 놓고 보더라도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손쉽게 이야기하는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의 구원론은 비성서적이라는 것이 밝히 드러난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신앙고백은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낳을 뿐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그 날”(22절). 최후의 심판날에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한” “많은 사람”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주님의 불호령이 떨어지며 그들 앞에서 천국문이 굳게 닫힐 것이다(22-23절).
 
걸핏하면 “주님의 이름”을 내세우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오늘 본문의 행간(行間)에서 들려오는 메시지에 귀를 쫑긋 세워야 하리라. “주님의 이름”이 구원의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도 실은 주님의 뜻에서 얼마든지 멀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지 “주님의 이름”을 무슨 마술적 주문(呪文)처럼 되뇌이는 게 아니다. “이름”보다 천 배 만 배 더 중요한 것은 “뜻”이다. 주님의 “뜻”이 뭔지도 모르면서 주님의 “이름”을 제아무리 많이 불러도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예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는 일에는 매우 열성적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기독교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놀라운 양적 성장을 이루기까지, 한국교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남부끄럽지 않을 만큼 잘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최후의 심판날 하나님께로부터 큰 칭찬을 받고 천국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자만하지 말라. 그렇게 기대했던 “많은 사람”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주님의 뜻밖의 말씀이 번개처럼 임하리라고 오늘 본문은 경고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결국 헛수고에 그치고 말 그 “많은 사람”에 이 땅의 수많은 신자들이 포함될지 모른다. 어쩌면 그 예기치 못했던 천국 탈락자 명단에 내가, 그리고 네가 포함될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처럼 뜻밖의 운명의 역전을 맛볼 다른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우리처럼 살아 생전에 예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지도 않았고, 우리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행하지도 못했고, 어쩌면 평생 “주님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고,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눈으로 볼 때는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타종교인이나 비종교인들에게 “그 날” 주님은 “선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로 다가오라. 나는 너희를 잘 알고 있다”고 빙그레 미소지으시며 천국문을 활짝 열어 주실지도 모른다.
 
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은 적어도 오늘 본문에서는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혹은 예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느냐 부르지 않느냐가 아니라 “선한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일 뿐이며, 세상에는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며 착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 구원이란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다. ‘나는 예수 잘 믿고 교회생활 열심히 하니까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교만을 떨 게 아니라 ‘나는 정말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착하게 살고 있는가’를 매 순간 반성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속 좁은 마음은 바람결에 훌훌 날려보내자.
 
3. 너무나 기본적인 행위들이기 때문에 - 마태 25:31-46
 
“그 계명은 자비로 불리었고, 그 다음으로는 사랑으로, 그 다음으로는 참여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연대성으로 불린다. 굶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헐벗은 자에게 옷을, 집 없는 자에게 은신처를, 그리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행위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때에 그러한 행위들에 비추어서 갚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칠레 주교들의 성명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역사의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믿는다. 그 심판에 따라 천국행과 지옥행이 결정되리라는 것을 또한 믿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믿음에 습관적으로 길들여진 나머지 그 믿음에 담긴 깊은 뜻을 망각할 때가 너무 많다.
 
하나님의 심판! 천국행과 지옥행! 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말인가.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나를 향해 있다. 천국행과 지옥행의 극적인 갈림길에 서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책임적인 존재로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나도 잘못하면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하루하루 충실한 삶을 살겠다는 확고한 신념의 표현이다.
 
우리가 귀가 닳도록 듣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편리한 공식 하나로 심판과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공식의 행간(行間)을 읽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헤아려야 한다. 나의 삶이 예수를 믿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예수 천당’은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우리는 그 말의 진실성을 우리의 삶으로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의 천국행과 지옥행이 걸린 시험이라면, 하나님은 자상하게도 그 시험 문제에 대한 정답을 일러 주신다. 시험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정답은 뻔한데 뭘 걱정하느냐고, 내가 정답을 미리 가르쳐 줄 테니 그대로만 옮겨 적으면 된다고 하나님은 우리를 안심시켜 주신다.
 
“너무나 기본적인 행위들.”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 생략할 수 없는 최소한의 것. 하나님이 성서를 통해, 그리고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일러 주신 정답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일러 주신 이 소박한 정답을 무시한 채 너무나 거창한 것, 너무나 난해하고 세련된 것을 답안지에 가득 채우려고 애쓰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답안은 글로 적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말로 재잘거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 답안을 몸으로, 삶으로, 생활로 적어야 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해도”(마태 7:22), 인간으로서 “너무나 기본적인 행위들”을 소홀히 한 사람들은 심판날에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태 7:23)는 불합격 판정을 받게 될 것이다. 
 
오늘 나는 그 답안을 적고 있는가? 오늘 내 인생살이는 한 걸음 한 걸음 천국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가? 내 일, 내 가족, 내 교회, 내 목회 때문에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자비”와 “사랑”, “참여”와 “연대성”이라는 그 뻔한 답안을 성실히 적어 가는 일에 너무 게으른 것은 아닌가? 
 
그리고 “오늘 우리나라는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마실 것을 주고 있는가? 우리의 형제 자매들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가? 나그네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있는가? 헐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있는가? 병든 사람들을 돌보고 있는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해 주는가?”(로버트 브라운).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너무나 기본적인 행위들”에 충실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구원의 묘약이 없음을 기억하자.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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