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종교와 정치의 밀착 관계에 회의를 가졌다. 그들은 종교가 세속 정치에 악영향만을 끼쳤다고 판단했으며, 정치와 종교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는가 하면, 나아가 종교 자체에 대해서까지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종교를 꿈꿨다.
신간 <사산된 신>(바다출판사)에서 저자 마크 릴라(Lilla)는 말한다. 그들의 꿈은 좌절되었다고.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용인하는 신(神)은 애초부터 사산(死産)된 신이었다고 쓴다.
방대한 글은 ‘우상들의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인류 역사 이래 과학과 문명이 최고조로 발달한 현대에도, 인간세계로의 신들의 ‘부적절한’ 개입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자인 저자는 물론 리처드 도킨스처럼 ‘반신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신’의 이름을 빌어 악랄한 정치 행위를 일삼은 ‘인간’을 비판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뉴욕 타임스>, <퍼블리셔스 위클리>처럼 영향력 있는 매체로부터 ‘올해의 책’에 선정된 이유는, 오늘 이 시각에도 종교가 인류사에 미치고 있는 막대한 영향력 때문일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종교는 ‘나쁘다’. 정치와 결합하는 순간, 그것은 나쁜 것이 된다. 저자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재앙 이후 나치주의와 공산주의를 옹호했던 상당수가 개신교인과 유대인들이었다고 밝히며, 그 배경으로 “메시아주의적 정치신학이 독일에서 부활했다”고 분석했다.
그들은 성서 속에서 정치적 착상을 찾으면서도 그것에 근대적 의미를 부여한 자칭 ‘근대주의자’였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바탕이 되었던 사고방식에 적대적이었으며, 상당수가 20세기의 가장 혐오스러운 이데올로기인 나치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종교적, 정치적 사상에 무모하게 뛰어든 순진한 몽상가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배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저작을 소화한 학식 있는 인물이었으며, 기적이나 성서무류설, 신의 섭리, 신성한 전통에도 의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적으로 ‘메시아주의적 정치신학’에 빠졌고 그것이 결국 비극을 낳았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현대사회에도 (정치철학이 아닌) ‘정치신학’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과학기술이 발달했고, 건국이념부터 자유와 합리주의로 가득 차 있는 미국이 그 선두에 있다. 그에 따르면 부시 정권의 탄생과 재선으로 미국 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입지는 강화되었고, 그들의 신앙과 신념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책을 좌우하면서 미국의 정치는 종교적 열정에 휘둘리게 되었다.
또 미국뿐만 아니라 동구권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는 인종주의적 갈등,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의 산발적인 테러와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21세기의 사회적, 정치적 분쟁의 기저에는 종교적 순혈주의와 배타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종교가 전쟁에 정통성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도맡았으며, 살생에 대한 죄책감을 없애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가 종교에 사로잡힐 경우 또 어떤 비극이 일어날 지 모르며, 그러므로 “종교적 열정이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이 책은 16~17세기 초기 근대 철학자들이 그토록 벗어 던지고자 했던 기독교 정치신학의 원리로부터 시작해, 근대 정치철학의 두 원조인 홉스와 루소의 사상을 짚어본 뒤, 독일의 관념론자인 칸트와 헤겔의 정치, 종교 저작들로 옮겨간다. 이후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을 살피고, 이것이 어떻게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메시아주의적 정치신학의 부활로 이어졌는지를 살핀다.
저자 마크 릴라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인문학 교수이며, 저서로는 <분별 없는 열정>, <비코 ; 반근대인의 형성> 등이 있다.
원제 The Stillborn God. 마리 오 옮김. 336쪽. 1만7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