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고 강원용 목사 설교]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의 고난

2004년 3월 14일 경동교회 설교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53: 4 ~ 6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서신서의 말씀: 빌립보서 2:5 ~ 11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가 복음서 10:42 ~ 45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

 


저는 매년 사순절 고난주간을 맞을 때마다, 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고난의 길을 가고 십자가형까지 받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왔습니다만, 최근에 와서는 다른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냈는데, 왜 구태여 유대인으로 보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 같은 그런 사람으로 연상한다면, 구세주가 어떻게 그런 유대인으로 태어났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제가 나름대로 찾았습니다. 중동지역의 고대 역사를 보면,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등의 중동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는데, 그 산 가운데서 ‘하리우’라고도 하고, ‘피이르’라고도 하고, ‘히브리’라고도 하는 그런 족속이 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떠돌이였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노예처럼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살았다는 건 알지만, 유대인의 조상이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은 저는 최근에 알았습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창세기 14장 13절에 아브라함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은 히브리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37장에서 50장 사이에 요셉의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요셉이란 사람 역시 히브리 사람이었습니다. 본래 종으로 이집트에 팔려왔다가 높은 벼슬까지 한 사람입니다. 구약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모세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모세의 어머니가 그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갈대 상자에 넣어서 강물에 띄웠는데, 이집트의 공주가 그 상자를 건져서, 그 아기가 히브리 사람의 아기인 것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데려가서 키웠습니다. 모세 역시 히브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동지역에 살던 많은 떠돌이 가운데서 특별히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독특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야웨 하나님을 섬겼다는 겁니다. 이들이 섬기는 야웨 하나님은 누구냐?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사랑으로 우주만물을 통치하시되, 어렵게 사는 사람, 억눌려 사는 사람, 천대를 받는 사람, 이런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야웨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이 히브리 사람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런 굳은 신앙이 그들을 쓰러지지 않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이 야웨 하나님은 어른이 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집트에서 고통을 겪고 울부짖는 히브리 사람들의 호소를 내가 들었다. 그러니 내가 이제 너를 보내서 그들을 그곳에서 해방시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 모세를 보내는 하나님, 그분이 바로 야웨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결국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게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복지에 들어간 뒤, 오래지 않아 이들은 다시 바빌론 제국에 패망당하고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합니다. 그 고된 노예 생활 속에서 그들은 사람 취급을 전혀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바빌론 사람들은 자기들을 다스리는 왕을 누구라고 믿었느냐 하면, 하늘에 있는 몰독 신의 땅위에 나타난 형상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은, 이렇게 사람대접 못 받고 천대를 받던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들의 이러한 신앙의 뿌리를 가지고서 사람 같지 않은 그 생활을 견디어 냅니다.
 

이럴 때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너희들이 이렇게 고생하지만, 이집트에서 건져낸 하나님은 너희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이제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서 너희를 해방시킬 것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메시아가 오는 날에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고 메시아를 고대했습니다. 그 메시아가 바로 히브리 사람으로 탄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대단히 실망합니다. 메시아가 오면 그때부터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로마 제국 같은 것은 문제도 안 될 정도로 강한 나라에서 자기들이 주인 노릇 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서 나사렛에서 목수 생활하던 사람이 ‘내가 메시아다’ 하고 나서서 거지들과 함께 휘젓고 다니니, 그것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는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메시아라고 자칭하는 이 예수를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히브리인들에 의해서 예수는 죽습니다. 결국 로마 제국의 힘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죽은 배경인 것을 저는 최근에야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잘못 생각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낼 것이라는 말은 예언자들이 전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은 이사야서 42장에 나옵니다. 그분은 고난의 종으로 온다고 합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서 53장을 보세요. 거기서 말하는 메시아는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들이 맞을 매를 대신 맞고, 모든 사람이 지는 고통을 자기 몸으로 지고, 그래서 죽음으로까지 자기를 내모는 그러한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메시아는 오셔서 고난을 겪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다는 바로 이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바라고 원하는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죽음으로 내몰게 된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사람들 가운데 와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분명히 메시아다. 나는 이 세상을 새로이 통치하러 왔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너희가 경험하던 통치자와는 다르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을 지금까지 통치해온 자들은 백성들을 억누르고 지배하고 군림했지만,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는 이 세상을 섬기는 종으로 온 것이다. 나는 섬기러 온 자요, 섬김을 받으러 온 자가 아니다. 나는 이 모든 백성을 섬기기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놓을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길을 걸어갔습니다. 결국 그는 고난의 길을 간 것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일을 굶주리면서 영광스러운 길을 가라는 악한 영들과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고난의 종의 길을 간 그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광야에서 이 사십일을 보내는 그것이 사순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왜 하나님은 굳이 이렇게 보잘것없고 버림 받고 고통을 겪는 이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는가? 아니 소리를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와서 그들의 모든 고통을 몸소 걸머지고 피를 흘리시는가? 요한일서 4장 8절에서 말하는 대로,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항상 괴로워하는 사람들, 천대받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을 위해서 사는 그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이 고난의 길을 감으로써,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아 부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땅 위에 성취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부활시키셨습니다. 지난 주간에 박 목사님께서 “고난주간을 생각하지 않는 부활, 이것이 잘못이다.”라는 설교를 했습니다만, 교회가 고난 주간을 바로 지키지 못하고서는 부활이 뭔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들은 고난은 고사하고 성령, 성령 하고만 있는데, 고난과 부활이 없는 성령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이 사순절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고난의 길을 우리는 어떻게 함께 가야 되는가 하는 것이 사순절 기간 동안에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를 80년, 81년에 지을 때, 이 교회의 설계는 김수근 씨가 했지만 신학적인 아이디어는 제가 낸 것입니다. 매주일 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이 교회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단지 상징적인 장식 두개밖에 없습니다. 그 한 가지는 예배드릴 때 여러분이 마주보게 되는 이 큰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제 기억에 22피트의 높이로, 항상 뒤쪽에서 빛이 비춰지는데, 이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배가 끝나고 밖으로 나갈 때 여러분은 또 하나의 십자가를 봅니다. 그것은 바로 입구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여러 개의 십자가입니다. 저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예배드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갈 때 우리 각 사람의 십자가를 지고 나간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배 시작부터 예배가 끝나고 나가는 때까지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해서 예배를 드리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 교회를 처음 만들 때 했던 생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에 동참하고 사는 길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교회 문을 열고 나가는데, 그 바깥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입니까? 화려한 네온사인과 고층건물, 굉장히 발전된 화려한 모습이지만, 실은 예수님이 들어가던 광야, 사탄이 잘못된 길로 끌어들이는 그 광야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광야, 여기서 예수님이 지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이 겪던 사탄의 유혹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서 그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한 것은 빵 문제를 해결하면 다 해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 돌을 가지고 떡이 되게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냐?” 그 사탄은 오늘도 똑같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선 경제 성장부터 해라. 일부가 굶어 죽든 말든, 분배 정의니 뭐니 생각하지 말고, 우선 성장 위주로 가자.” 그게 바로 우리 역사 아닙니까? 오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참여정부의 새 경제 부총리도 성장 위주로 가는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극심한 빈부의 격차가 생긴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정말 워싱턴이나 런던에서 부자로 사는 사람보다 더 화려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자살을 하고 분신을 하고 졸도를 하고 강도를 하고 투신을 하고 그리고 실업자들이 우글우글하는 그러한 광야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의 광야입니다.
 

또한 이 사탄이 요구한 것은 우선 권력을 잡고 보라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아야지! 권력을 잡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사탄인 나에게 절을 하고 내 힘을 빌리면 된다.” 그것이 예수에게 던진 두 번째 유혹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바로 이 사탄의 말대로, 어쨌든 잡고 볼 일이다, 잡으면 놓지 않고 볼 일이다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면 선이니 양심이니 그런 것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잡고 볼 일입니다. 사탄에게 절하고 볼 일입니다. 그게 오늘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이것은 오늘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그랬죠?
 

제가 이 자리에서 정치 이야기를 할 맘은 없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진통은 새로운 개혁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산통이라고 합니다. 온전히 그런가요? 결국 지금까지 내려오던 대로, 악마가 가르쳐주는 대로 통치하는, 그 통치철학을 그대로 가지고 어떻게 우리가 새로운 개혁을 할 수 있습니까?
 

지금 민주주의를 죽였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죽인 것은 둘 다입니다. 한쪽만이 죽인 거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가장 간단한 법칙은 다수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 다수로 막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소수와 타협을 하고 대화를 하고 힘을 합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다수에 의해 결정이 되는 때는 소수는 그 결정에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지금 대통령을 탄핵하는 사람들이 정말 끈덕지게 대결이 아닌 대화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동참하는 가운데 해결하는 길로 가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다수의 사람들이 헌법에 따라 의결하겠다는 장소를 점령하고서 결국 경호권까지 발동시키는 사태를 야기하고서, 그러고 나와서 상대방이 민주주의를 죽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민주주의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정치판이라고 하는 것은 광야에서 예수에게 보여주던 그 사탄의 길을 지금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우리 교회는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사탄은 마지막으로 예수님에게 결국 성전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 이 교회가 세상을 구원하자면 어찌해야겠느냐?”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모든 관중들이 보는 가운데 덜커덕 뛰어내려도 발끝 하나 다치지 않는 걸 보면, 사람들이 ‘와’ 하고 따라올 것이 아니냐? 그 길을 가라.” 그것이 바로 사탄이 예수에게 던진 유혹 아닙니까?
 

지금 한국 교회 전체가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만, 여러분 텔레비전 채널 42번 들여다보십시오. 바로 그 짓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아멘, 할렐루야 소리를 지르게 하고, 그걸로 이 광야에서 뭘 하자는 겁니까?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서 살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나라가 올바르게 서자면 정치부터도, 소외당하고 억눌리고 한을 품은 이 사람들의 한을 먼저 풀어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요사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한 달 후에 선거를 한다고 하는데, 과연 대한민국을 구하고 이 나라를 붙들어야 하겠다고 하면서 투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제시대부터, 이승만 박사 통치시대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로 말하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을 다 덮어두니 그렇지, 말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후손들이 지금 살아 있습니다. 자기 선조들이 어떻게 억울하게 죽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 나라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지만, 이 나라를 내 사랑하는 조국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의 한을 하나도 풀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해서 의문사한 사람들을 조사합네 하면서, 한 일년 동안 하는 듯하다가 말았습니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새 역사가 탄생합니까?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할 때 광야에서 홀로 싸우는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는가 하는 근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설교를 마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전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오늘 우리가 처음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양은 다를지라도 우리의 역사는 조선시대 말엽부터,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역사입니다. 이런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남았습니다. 우리가 왜 살아남아 있느냐? 나는 우리 가운데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메시아인 예수를 세상에 보내어 이 모든 고난을 한 몸에 걸머지게 하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앉아서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에 모세를 보내시던 하나님, 유대나라에 예수님을 보내시던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 속에 들어와서 지금도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분의 고난의 길을 우리는 따라가야 합니다.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고통스럽더라도 그를 따라가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무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에서 “진실로 작은 무리들아 너희들은 무리가 작다고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께서는 너희 작은 무리들을 통하여 그 나라를 세우시기를 원하신다.”고 하십니다.
 

수난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이 가시던 그 고난의 길을, 유대 땅 골고다의 길이 아니라, 오늘의 역사 속에서, 오늘의 한국이라는 이 역사 속에서 예수님이 가시던 그 고난의 길을 가고자 하는 교회, 그리고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살고자 하는 이러한 교회, 이러한 신도들이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밝은 아침을 열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서광이 우리 역사 속에 비추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그분이 약속한 새 나라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기 때문에, 이 신앙을 가지고 매일 우리에게 직접 간접으로 부딪혀 오는 악마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함께 걸어가기를 다짐하는 이 사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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