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칼빈의 사회관과 경제에 대한 이해

한목협, 제 15차 대화마당 개최

▲울리히 두크로(Ulrich Duchrow) 교수.ⓒ김정현 기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대표회장, 손인웅)의 제 15차 열린 대화마당이 11일 덕수교회에서 열렸다. 이날 기조발제는 1969년부터 세계교회협의회(WCC)소속 학제 연구 파트에 참여하기 시작해 현재까지 WCC ‘경제 불평등 연구조사팀’ 멤버 및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울리히 두크로(Ulrich Duchrow) 교수(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사회윤리학)가 ‘칼빈의 사회관과 경제에 대한 이해(Calvin's Understanding of Society and Economy)’란 주제로 발제했다. 다음은 발제문 전문.


사회와 경제에 대한 칼빈의 이해 - 울리히 두크로브(Ulich Duchrow)

최근 있었던 두 가지 사건은 칼빈과 개혁주의 신앙이 역사 가운데서 그리고 현재의 자본주의의 현실 가운데서 감당했던 역할에 대한 모순적인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1994년 중국 사회과학부의 세계종교 연구소(the Institute of World Religions of the Chinese Academy of Social Sciences [CASS])는 아미티 재단(Amity Foundation)과 함께 “기독교와 근대화”에 대한 국제 자문 협회를 조직했다. 쟁점은 역사에서 그리고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의 도입과 효과적인 조직화에 있어서 종교의 역할 특히 칼빈주의의 역할에 대한 것이었다. 중국 쪽 주최자들의 관심은 분명했다. 딩샤오핑(등소평)은 “고양이가 검든 희든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이다” 라는 슬로건으로 중국 경제를 개방했다. 그 흑묘백묘론은 “마오(모택동)의 이데올로기적 정통성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고 자본주의가 효과적이라면 자본주의를 사용하라”는 말이었다. 일단 효율성이 결정적인 기준이 되자, 다음 질문이 이루어졌다. 서구의 자본주의를 그렇게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단지 효과적인 구조와 메커니즘인가? 아니면 제도 완비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정신 자세(mindset)이기도 한가? 만일 경우가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유교 문화를 가지고도 우리가 서구처럼 효과를 볼 수 있겠는가? 아니면, 서구의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전제들을 공부할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막스 베버(Max Weber)는 바로 칼빈주의가 자본주의 정신을 발전시켰다고 우리에게 가르치지 않았는가? (덧붙이자면, 아미티 재단은 자본주의의 실재와 및 종교와 경제의 관계에 대한 중국 쪽 파트너들의 생각에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 이 컨퍼런스에 나를 초대했었다.)

칼빈주의에 대한 정반대의 이해를 보여주는 다른 사건은 2004년 아크라(Accra)에서 열린 WARC(세계 개혁교회 연맹)의 23회 총회이다. 여기에서 개혁주의 전통은 – 전체적으로 다른 교회 전통들 및 에큐메니컬 운동과 비교해 보았을 때 –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매우 급진적인 배격을 내놓았다. 핵심 조항인 18과 19는 이렇게 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창조세계에 대해 주권적이시라고 믿는다. “땅과 거기 충만한 모든 것이 주의 것이다” (시 24.1).
그러므로, 우리는 글로벌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의해서 강요되고 있는 현재의 세계 경제 질서에 반대한다 …. 우리는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권을 전복시키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에 반대되는 행위를 하는 어떠한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제국의 주장에 대해서도 배격한다.”

칼빈주의 전통에 대한 이 두 개의 모순적인 평가 가운데서 어느 것이 맞는가? 칼빈은 진짜 뭐라고 말했는가? 칼빈주의가 어떻게 발전했는가? 인류와 지구를 위협하고 있는 지배적인 시스템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생명을 주는 새로운 문명을 추구하면서 노력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전통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1. 정치 경제와 교회의 역할에 대한 칼빈의 이해

방법론상으로, 칼빈이 이 주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은 그의 신학에 근거해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칼빈이 신학자가 되기 전에 법을 공부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은 그의 신학에 분명히 영향을 끼쳤다. 그는 교리를 깊이 성찰하여, 교회와 사회라는 구체적인 공동체에 교리가 미치는 영향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신학은 제네바에 있는 교회의 리더로서의 실천에서부터 – 그가 망명자 신세가 되어 슈트라스부르그에서 부처(Bucer)와 그가 목회했던 망명자 교회로부터 배운 후에 - 생겨났다. 그래서 그의 신학은 일종의 도시-국가의 정황 가운데서 그 교회가 가질 수 있는 실천적인 영향들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점이 어느 정도, 칼빈을 마르틴 루터와 구별시켜준다. 루터는 여러 교회(회중)와 도시들, 및 군주들에게 진정 충고를 해주었지만, 공동체들을 조직하는 직접적인 책임은 전혀 져 본 일이 없었다. 이 점은 어째서 루터의 교회론이 미발달 되었는지를, 따라서 어떻게 나중에 국가 교회가 된 루터파 교회의 애매한 역사에 기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두 번째 방법론상으로 중요한 점은, 모든 형태의 종교개혁에 공통적인 요소로서, 신학을 성경에 근거하여 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교황 교회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놓여 있으며, 경제적 정치적 생활을 포함하여 교황 교회의 왜곡 사항을 극복해 나가는 기준이 놓여 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자신들의 역사적 환경 가운데서 성경 텍스트를 바라보며, 그 텍스트를 자신의 시대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현실과 의식적으로 연결해서 적용하고 있는 상황 신학자(contextual theologian)로 간주될 수 있다.

문헌에 있어서 이 주제에 대한 고전적인 책이 있는데, 그것은 앙드레 비엘러(Andre Bieler)가 쓴 <칼빈의 경제 및 사회 사상>(Andre Bieler: Calvin’s Economic and Social Thought)이다. 1961년에 프랑스어로 맨 처음 출판된 이 논문은 거의 50년 후인 2009년에 칼빈 500주년 기념으로 영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종교 개혁 시대의 전반적인 역사적 정황을, 특히 제네바의 정황을 기술하고 있으며, 전반부는 칼빈의 대응을,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베버 테제(Weber-thesis, 막스 베버의 칼빈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논제)에 대한 평가를 포함해서 칼빈의 교리(가르침)의 발전을 논하고 있다.

먼저 역사적 정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정황

떠오르고 있던 근대성과 특히 초기 자본주의를 특징 짓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봉건제에 근거를 둔 농촌 문화에서부터 부르주아(bourgeois)라는 새로운 계급이 지배하는 도시들로의 무게 중심의 이동이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도시 권력에 근거를 둔 이 자본이 세계 시장을 창조해 나가는 영토 확장적 제국 건설과 연결되었다는 측면이다.

강력한 도시 문화의 발전은 13세기와 14세기 베니스, 플로렌스, 제노아(Genoa)와 같은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에서 출발했다.  베니스는 해외 무역에서 주도적인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시에나와 플로렌스는 은행과 새로운 재정기구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재정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이자 매기기에 복리 방식이 덧붙여졌으며, 회계장부에 부기가 도입되었다. 시장이 발전했으며, 자본주의적인 거상들을 등장시켰다. 도시 정부들은 이러한 무역 및 재정 엘리트들에 의해서 통제되었다. 아욱스부르크(Augsburg)의 푸거 가문(Fuggers)은 신성로마 황제 찰스 5세까지도 통제하였다.  [Fuggers는 15세기 16세기 Augsburg에 근거를 둔 상업 금융 자본가 집안으로서 당시 유럽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음 – 역자]

부가 증가함과 동시에 가난도 증가하였다. 도시와 농촌의 프롤레타리아가 늘어났고, 때때로 반란과 혁명을 일으켰다. 농촌의 상황은 공유지가 사유지화됨으로써(엔클로저 운동) 더 악화되었다.  “자본주의는 그 시작에서부터 궁핍이 따랐다.”

자본축적과 정치, 군사, 국가 권력의 결합의 첫 단계에서 제노아(Genoa)의 금융 엘리트들은 영토를 확장시켜 나가는 스페인의 헤게모니 권력과 연결된다. 이 시기는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직접적인 강탈과 인종학살 및 유럽에서는 통화 혁명으로 특징 지워진다. 금과 은의 유입은 몇몇 나라에서 주화의 가치 저하를 유발시켰다. 이 일은 환차액에 대한 투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새롭게 부상하는 산업에서 신용(credits)의 필요성이 점점 늘어나면서, 이러한 상황은 은행가들의 폭발적인 이윤 획득으로 이끌어주었으며, 또한 국민들이 소모하는 소비자 상품들의 가격 폭등을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 전개를 마르틴 루터와 칼빈과 같은 모든 개혁자들이 보고 있었으며, 그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하게 되었다.

경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재구성되었다. 합자 회사들과 주식 거래가 생겨났으며, 보험 회사들이 등장했다. 재정이 토지 재산(부동산)으로 유입되었다. 투기와 더불어서 도박이 이루어졌으며, 공적인 대출(loans)이 이루어졌다. 이 모든 것은 깊은 사회 변동을 초래했다. 귀족 계층은 와해되었고, 장인들은 길드를 만들어서 자신들을 보호했으며, 그렇게 해서 저니맨(journeyman, 도제 수습 기간이 끝나고 마스터 장인이 되는 단계에 있는 중간 기술자들 – 역자)들이 마스터 장인이 되는 길을 방해했다. 생활비에 비해서 실제 임금은 떨어졌다. 그리하여 노동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더 생존을 위해서 싸워야만 했다.

존 칼빈의 일터가 되었던 도시인 제네바의 구체적인 상황은 어떠했는가?  “제네바는 지중해에서 대륙의 중앙으로 진출하는 무역로가 만들어낸 유럽 경제 시장들 가운데 하나였다. 제네바는 중세 무역 도시들의 번영을 나누어 누리고 있었다. 15세기 제네바의 경제적인 번영은 주로 제네바의 박람회(fair, 상품 전시, 품평 시장) 덕분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1462년 사보이 공작(Duke of Savoy)과 그의 사위인 프랑스 왕 루이 6세는 리용에서 열리는 박람회의 중요성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자기 신민들이 제네바 박람회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에 덧붙여서 미 대륙의 발견과 더불어서 무역을 위한 주요 선적 루트가 바뀌어 버렸다. 지중해보다는 대서양이 앞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16세기 중반까지 제네바에 깊은 불황이 몰아쳤다. 그리고 심지어 인구조차도 급격하게 감소했다. 칼빈의 때에 이르러서야 약간의 회복이 이루어졌다.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은 반종교개혁의 공격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야 했던 난민들의 유입이었다. 프랑스 난민들은 거주민들의 수를 증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시계 제작이나 이를테면 직업에 있어서 한 단계 높은 의학 및 약학 분야와 같은 새로운 유형의 산업과 기술을 가져왔다.

2. 칼빈의 신학과 윤리

칼빈은 보수적인 인문주의자로 출발했다. 그의 회심은 루터의 사상에 심취하였던 그의 친구 니콜라스 콥(Nicolas Cop)과의 교제에서 일어났다.  콥은 파리 대학의 학장에 임명되면서 1533년에 있었던 학장 취임 연설에서 자기의 믿음을 고백했다. 왕이 그와 그의 친구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모두 피신했다. 칼빈은 다른 친구에게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자신의 주저인 <기독교강요>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1534) 첫 판을 작성했다. 이 중대한 저작을 그는 1559년까지 여러 차례 다시 편집했다.

이 최종 판은 신조의 세 항목인 창조(성부 하나님), 구속(성자), 성화(성령)를 따르되, 세상 가운데서의 참 교회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부분(1/4)에서 이 항목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하여 또한 정치 제도들에 대한 장을 하나 포함시키고 있다. 이 각 부분에서 칼빈에게는 인간 존재의 성격과 관련하여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 그들은 서로를 섬기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 또한 동료 인간들과도 관계를 맺고 있다. 물론 이러한 관계적 성격은 자기 사랑과 분열을 유발시키는 죄에 빠짐으로써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통을 통해서 지음을 받은 새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적인 생활을 회복시켜준다. 교회는 “가톨릭적 혹은 보편적이라 불린다 (어거스틴, Ep. 48). 우리에게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찢는 일이 없이는 둘이나 셋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피택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단단히 연결되어 있어서 한 머리에 의존해 있으며, 말하자면 인간 한 사람의 몸의 여러 지체들이 서로 단단히 연결되듯이, 꽉 들어차서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서 동일하신 하나님의 성령 아래서 함께 살아가는 진정한 하나가 되게 되었다…”

복음의 영적 윤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별을 루터가 정의하고 있듯이 이웃의 필요에 따라서 결정한다. 그 새로운 생명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이다. 우리의 맥락에서 칼빈이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일에 자신들의 부를 사용하라고 부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다는 점이 특히 의미심장하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손에서 왔기 때문에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난이나 어떤 필요를 볼 때, 내가 할 수 있는 한 반드시 궁핍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이 내가 나의 재산의 절반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어떤 법도 부과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의 의무를 행하라고 나에게 명령하신다 … 그래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혜택 가운데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한다면, 이 규칙을 채택하자 … 즉 아무도 자기를 위해서만 독차지하지 말고, 하나님이 부자와 가난한 자를 섞어 놓으셔서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셨음을 알아야 한다.”

이 점은 본성(nature)과 관련해서 사회를 보는 칼빈의 신학적 이해로 우리를 인도한다. 창조주는 애초에 인간을 풍요로운 환경에 넣어 주셨다.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들은 첫 인간들에게 충분했을 뿐만 아니라 풍성했다. 그 첫 인간들에게, “그들의 일상적인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꿀과 열매가 주어졌다. 그런데 이것이 그들이 최고로 만족할 만큼 풍족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심으로써 주께서 그들에게 얼마나 후하셨는지를 말한다.”

하나님의 보살핌은 인간의 마음 가운데에 기쁨과 즐거움을 창조한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인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시며 생활의 일상적인 목적들에 충분하리만큼 베풀어주실 뿐만 아니라 그 선하심 가운데서 포도주와 기름으로 인간의 마음을 흥겹게 해 주심으로써 계속해서 더욱 풍성하게 대하신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길 원한다. 물론 본성은 마실 물로 확실히 만족할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빵(양식)만 먹어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누군가가 말하듯이) 흘러 넘치는 자세로 포도주와 기름을 덧붙여 주신다.”

경제에 대한 이같은 출발점은 – 희소성이 어떻게 해서 창출되고 있는지를 분석함이 없이 - 희소성에서 출발하는 근대 경제학의 도그마와는 정반대가 된다. 이 점에서 본훼퍼는 다른 접근 방법을 취하도록 경제학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교회의 죄책에 대해 말한다. 그의 책 <윤리학>에서, 본훼퍼는 교회적인 죄책 고백에 다음과 같은 말로 그 점을 요약해서 포함시키고 있다:

“교회는 모든 십계명에 대한 죄책을 고백합니다. 교회는 그 점에서 그리스도로부터 배교했음을 고백합니다.

  -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증거하지 않아서, 진리에 대한 모든 추구, 모든 학문이 이 진리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교회는 모든 인간의 법률이 법률 자체의 본질의 원천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 교회는 인간의 모든 경제 활동이 하나님의 사랑의 보살핌에서부터 그 위임을 받았음을 받아들일 정도로 그 사랑의 보살핌을 믿을 수 있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보살핌” 가운데서 경제의 근거를 찾는 것이 바로 칼빈이 하고 있는 일이다. 결과적으로 칼빈은 사회를 결속(solidarity) 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인류는 공동체의 성스러운 결속으로 함께 연결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서로에 대해 이웃이다. 누군가가 우리의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한 사람이라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본성은 없애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대성은 남녀 부부 관계와 가족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그 연대성은 모든 피조물들까지도 포함하는 온 인류에게로 확대된다. 비엘러는 칼빈을 인용함으로써 다음과 같이 이 이해를 정리한다: “부부, 가족, 일터 다음에, 상업은 사회를 구성하는 본성적 사회적 결속의 구성 요소이다. 칼빈은 ‘세속 저자들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는 잘 인식하고 있으나, ‘인간이 서로를 위해서 태어났으며, 그러므로 인류라는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해서 반드시 서로 교통해야 한다는 점을 증명해 보이는데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고 쓰고 있다.

그의 인문주의자로서의 과거에서 “세속 저자들”을 말할 때 칼빈이 누구를 암시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가 인간을 “조온 폴리티콘”(zoon politicon) 즉 사회적 동물로 규정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을 알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경제는 정치 질서의 일부였다. 이는 가정들(오이코이 oikoi)이 폴리스 안에서 그리고 넘어서 교환을 통해 서로 안에서 교류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칼빈이 인간의 포괄적인 상호성과 소통 가운데에 경제적인 교환을 어떤 식으로 포함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자연적인 선물들과 성령의 선물(은사)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음을 인정하지 못할 능력이나 기술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맡겨주신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유용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교역(trading)에 종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경건한 사람의 삶을 교역(거래/무역/상행위 trade)에 비유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는 경건한 사람들이 서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서로 간에 교환하고 물건을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사람이 자기에게 할당된 직책, 그 소명 자체, 적절하게 처신해야 하는 권력 및 여타의 선물(은사)들을 이해하는 일은 상품(merchandise)과 같다. 그것들의 용도나 목적은 사람들 간에 자연적인(natural 본성적인) 상호 교제가 활발하게 일어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 연대성/결속의 질서(the order of solidarity)가 역사 가운데서 왜곡되었다 할지라도, 아이들은 그 질서가 얼마나 자연적(본성적)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다: “어린 아이들까지도 이 점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음을 본다. 어린아이들은 만일 함께 먹고자 한다면, 각자가 자기 몫을 내놓으며 모두가 그렇게 하는 일에 동의한다. 그리고 어느 한 아이가 탐욕스럽다 할지라도, 함께 먹을 계획이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감추지 않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몫을 나눌 것이다. 누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하도록 가르치는가? 말할 필요도 없이 어떤 자연적인 본능이다. 그러나 이 점을 우리에게 시사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사악한 의지를 조롱하신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지지해야 할 어떤 평등의 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어떤 필연성 때문에 억지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은 단지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함께 협력하도록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셨음을 알고, 도움을 줄 수 있는 형편에서 물러서는 사람이 없이 공동선을 위해서 우리 손에 맡겨져 있는 모든 것을 기여할 때, 그러한 교제에서 우리가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애초의 공동선의 질서는 분배(distribution)와 또한 사회 전체에 대한 각 사람의 기여(contribution)라는  측면에서 사람들 사이에 평등(동등성)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서로간의 조화를 더욱 힘써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상대를 자기 몸처럼 더욱 허물없이 포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인류를 받아들이고 살게 하기에 충분하도록 땅(지구)의 범위를 정해놓으셨다고 확실하게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의 적절함에 반대되는 불평등은 다름 아닌 죄에서 비롯되는 부패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축복은 넘쳐서 모든 곳에서 땅은 거주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으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지구의 어느 부분에서 자기들이 거할 집을 찾을 수 있도록 하신다.”

이 창조질서와 사회질서를 부패시키는 인간 죄의 결과들은 무엇인가? 칼빈이 죄에 의해서 창조세계 가운데 초래된 재난들 – 소위 오늘날 말하는 생태계 파괴를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예언적이라 여겨진다: “사람들과 짐승들이 자주 굶주린다면, 이것은 자연(본성)의 부패 탓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이 애초에 정해 놓으신 바에 따라서 그 안에서 생존해 나가는 멋진 질서는 아담의 타락 이후로 우리의 죄악들로 말미암아서 종종 무너진다. 그렇지만, 그 질서의 남아 있는 부분에서 우리는 다윗이 찬양하는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볼 수 있다. 가장 극심한 흉작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그 손을 펴시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너무나 황량하고 소출이 전혀 없는 해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칼빈은 구조적 죄악의 부정적인 요소들만 아니라 여전히 우리를 회개하도록 촉구할 수 있도록 생명을 유지해주시는 하나님의 보살핌도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 당하고 있는 것은 사회 생활(social life)이기도 하다. 남녀 부부와 가족에서 출발해서, 모든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는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일관성의 중대한 조건이 침식되어가고 있다. 마리아의 찬가에 따르면, 하나님은 비천한 자들을 높여주시고 권세자들을 그들이 찬탈한 보좌에서 좌천시키심으로써 이런 경향을 막으신다: “불신자들은 세상 가운데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신성모독적으로 말해왔듯이, 하나님이 인간을 공처럼 가지고 논다거나 혹은 모든 것이 우연에 의해서 이러저러하게 바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작은 자들을 높이시며 큰 자들을 겸손하게 하시는 길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이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그들의 위치가 지니고 있는 책임들을 감당하지 않고 망각하며 더욱이 교만하고 오만불손함으로 이웃들을 경멸할 뿐 아니라 하늘에 대해서 싸움을 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광기 아니 오히려 과도한 광란은 진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높은 영예의 자리에 올라갔던 사람들이 낮추어질 때마다, 그리고 반대로 멸시 받는 자들이 높아질 때마다, 이런 일이 아무런 이유가 없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회적으로 열등한 자들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 이상을 목표로 하지 말 것과, 우월한 계층에 있는 자들과 특히 다스리는 자들은 자신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피조물들이며, 자기들의 우월한 위치가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로 더 가까이 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것이 되었다는 교훈을 주고 계심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그러나 핵심적인 문제점은 여전히 남는다. 그것은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갖고 싶어하며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마땅히 충분히 가져야 할 경제 질서를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자기는 결코 충분할 만큼 갖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 (‘아, 어떤 불행이 나에게 찾아올 수도 있어, 그러니 그런 일에 대해 내가 대비를 해 놓아야지’) 우리 가운데 너무나도 편만한 이 불신앙을 고쳐주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물건들을 움켜쥐고서도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이유이다. 그리고 더 많이 소유할수록 더욱 더 탐욕이 타오른다. 마치 술에 취해 부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관심은 우리를 먹이시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마귀적인 불신앙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그처럼 만족할 줄 모르고 시기에 사로잡혀서 거대한 양을 자기 수중에 끌어들이고 쌓아놓으면서도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만족을 원하는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때, 우리를 먹이고 유지시켜줄 것을 풍성하게 갖게 될 것임을 인정하도록 하자.”

부자들이 이러한 무질서를 만들어내는 수단은 독점과 허비와 투기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풍족함을 갖다 주도록 되어 있었던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망쳐지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이 굶주리기를 원하기 때문에) 필요할 때에 곡식을 팔기보다는 창고에서 썩거나 해충이 먹어치우도록 두기를 선호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 자 보라, 여기에 추수할 곡식이 있다. 우리의 주님이 그의 가난한 자들도 먹일 수 있도록 은혜와 복을 널리 베풀어주셨다. 그러나 그 곡식은 거두어져 창고에 들여지고 자물쇠를 채워 단단히 지켜진다. 사람들이 굶주림 때문에 부르짖고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지경이 될 때까지 말이다. 그리고 곡식은 어떻게 될 것인가? 곡식은 상해서 썩어버릴 것이다. 실상이 그렇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 주님께서는 괜찮은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조롱하시며, 그들에게 이것이 올바른 방법이 아님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 펼쳐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버지로서의 사랑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다는 듯이, 가능한 한 하나님의 은혜를 파묻어 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전체 자연 질서를 부패시키는 것이다 … ”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맞서시고 전 역사에 걸쳐서 창조세계와 사회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일하신다. 그리스도 안에 성육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와 재창조를 향해 구속하시고 감동하신다. 전체 창조 세계가 이 회복을 대망한다: “이 세상에서 현재의 비참함에 접하고서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강력하게 갖지 않는 요소나 부분은 전혀 없다. 그 모든 것을 요약하자면, 피조물들은 자신들의 현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구제 받을 전망이 없어서 초췌해질 정도로 낙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출산을 앞둔 여인처럼 진통 가운데 있다. 이는 더 나은 상태로의 회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속은 개인들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것이 바로 교회이며, 전체 사회의 갱신(regeneration 중생)을 위한 누룩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바로 교회이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들 사이의 자연(본성)적인 질서로서의 연대(solidarity)가 회복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의 교통은 … 교회가 무엇인가를 잘 표출하고 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성도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수여하시는 모든 선물(은사)들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원칙 위에서 그리스도의 사회 안으로 모집 되었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성격은 그 나라가 매일 자라나며 일신(日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다. 최후의 심판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만물(모든 것)이 이미 그리스도에게 복속되었지만, 이 복속은 부활의 날까지 완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맞는 말이다. 이는 현재 시작된 것이 그때에 가서야 완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의 질문과 관련해서는, 부와 빈곤의 문제가 칼빈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는 필수적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주시는 분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굶주림을 채워주는데 필요한 것을 소유하고 있을 때, 음식과 마실 음료를 소유하고 있을 때, 항상 눈을 들어서 우리를 먹여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 일상적인 자원들을 사용하고 그것들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지원하도록 하자.”

비록 칼빈이 평생 인문주의자로서 보냈던 자취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점에서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대비시키는 에라스무스의 이원론적인 견해를 배격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칼빈에 따르면, 모든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고 있는 어떤 영적 차원을 내포한다: “에라스무스가 적용하고 있는 논리는 가치가 없으며 참된 종교에 반대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우리의 양식에 대해서 어찌 생각해야 하는지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셔야 마땅하다는 것을 에라스무스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비록 성경에 이런 식의 가르침이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현재의 것들을 경험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것들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모든 혜택의 유일무이한 원천으로서 그분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우리 육체의 필요를 고려하는 일을 멸시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것들 가운데서도 나타나는 하나님의 부성적인 선하심의 표를 발견하는 이것이 우리 믿음의 진정한 테스트이다. 게다가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기가 결코 어렵지 않다. 우선 그렇지 않다면 그 기도는 온전하지 않고 불완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 곳에서 우리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맡기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면 하나님이 친히 어떤 점에서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후하게 그 일을 처리하신다.”

그러나 물론 인간은 하나님의 좋은 선물들을 지나치게 남용한다. 그리하여 결핍을 낳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혜택을 남용할 때, 그 배은망덕에는 이러한 보답을 받아 마땅하다는 점을 관찰해야 한다. 우리가 결핍을 통해 배워야 할 점은 하나님이 그 베푸심 가운데서 멸시를 받으셔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떡과 포도주를 풍성하게 주실 때 우리가 절제 없이 사치에 빠진다면, 이러한 무절제와 사치가 기근과 결핍에 의해서 치료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칼빈은 일반적으로 부를 축복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칼빈은 불행을 하나님의 배척과 단순하게 동일시하거나 번영을 하나님의 은총과 동일시하는 일을 배격한다. 그러므로 칼빈주의가 자본주의를 강화시켰다는 막스 베버의 이론을 종종 오해해서 일어나듯이, 칼빈을 가지고서 “번영 신학”을 정당화 시킬 근거가 전혀 없다. 창세기 28:3에 대한 주해에서 칼빈은 이렇게 쓰고 있다: “환난에 눌린 사람들을 정죄 당하고 버림받은 자들로 간주하는 것이 너무나도 흔히 저지르는 잘못임에 분명하다. 불확실하고 덧없는 풍요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총을 판단하면서 사람들은 대개 부자들과 소위 행운이 미소를 짓는 사람들을 칭찬하는 반면에, 비참한 환경에 처해 있고 가련한 사람들을 향해 경멸하며 어리석게도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싫어하신다고 상상한다. 하나님이 버림받는 자들을 향해서 하시듯 그들을 향해서 별로 인내하지 않으신다고 여긴다. 우리가 말하는 잘못, 즉 뒤집어 판단해서 그런 사람들을 그릇되게 파악하는 잘못은 세상에서 모든 시대에 흘러 넘치는 잘못이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분명하고 뚜렷하게 하나님이 다양한 이유로 때로는 인내심을 길러주기 위해서, 때로는 육체의 죄악된 경향을 억누르기 위해서, 때로는 씻겨주기 위해서, 말하자면, 아직도 그들 가운데 거하고 있는 육체의 소욕들로부터 그들을 정화시켜주기 위해서, 때로는 그들을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때로는 신성한 하나님의 거룩한 삶에 대한 묵상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믿는 자들에게 역경을 겪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를 보자면,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성급하고 거칠게 말하며, 말하자면, 환난 중에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장 낮은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과 맘몬이 서로 양립불가능함을 강조한다: “주님[그리스도]은 사람의 마음이 부에 바쳐질 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고 말씀하신다. 대다수는 헛된 구실을 대면서 하나님과 자신의 물욕 사이에 어떤 균형이나 수단을 발견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짐하면서 위로를 찾는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하나님과 자기의 육신 둘 다를 순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신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입술로는 오직 하나님만을 온 마음을 다 바쳐서 진정으로 섬기고 있다고 고백하지만, 두 개의 모순되는 원리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그들의 행위로 그 고백을 부인한다.”

탐욕은 우상숭배다: “사도 바울이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말한 것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어떻게 마귀에게 경의를 표하는지를 볼 수 있다.”

불행하게도 부자들에게서 고난을 당하는 가난한 자들조차도 부자들의 부유함 때문에 그들을 부러워한다: “허영은 은총의 자극이 전혀 없이 사람들이 부자들을 단순히 부자라고 해서 흠모하는 자리에서 훨씬 더 명백히 드러난다. 그들 자신이 손해를 볼 정도로 부자들의 불의와 잔인함을 느낀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비굴하게 아첨하고 아양을 떤다.”

성경의 증거에 따르면, 부는 모든 사람이 충분히 소유하고 풍성하게 갖도록 공유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일을 최후의 심판의 핵심 기준으로 삼으심으로써 가난한 자들과 완전하게 자신을 동일시 하셨다 (마 25:31 이하). 비엘러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칼빈의 많은 말을 이러한 취지로 요약한다: “물질적인 소유물은 신적 섭리 덕분에 현재의 생활을 유지하는데 기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 그래서 물건들은 모든 사람 사이에 예외 없이 풍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인류의 성원들 사이에서 세우신 사랑의 결속은 한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막힘이 없이 순환이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이 세상의 물건들은 모든 인간 생활을 유지하는 데 쓰여지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선의를 가지고 그들의 창조주의 법칙을 따르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러한 물건들의 자발적인 자연적 분배가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의 부는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자비로우신 은총과 꼭 들어맞는다. 정확히 그 부가 상징하는 바가 바로 그 은총이다. 모든 사람이 그 은총으로부터 똑같이 혜택을 입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저 개인의 행동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다. 바로 경제 구조 그 자체가 걸려 있는 것이다. 경제 구조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든지 아니면 (구조적) 죄악의 표현인 것이다.  물론 나누는 길 가운데 하나는 자선과 사랑이다. 그러나 교역(commerce 상공)은 정당한 활동인 한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사람들 가운데서 나누고 순환시키는 구조적인 방식이다. 여기에서 칼빈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만나를 선물로 주신 스토리를 해석한다. 그러나 좀 문제성 있게도 근대 자본주의 경제의 정황 가운데서 그 스토리를 재정의한다. 출애굽기 16:13에 대한 그의 주해에서, 칼빈은 이렇게 쓰고 있다:
“만나를 거두기 위해서 그들이 다 함께 일했을 때, 전체 총량은 각 개인에게 한 오멜을 채우기에 충분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그들이 각자 사적으로 쓸 것을 거두도록 하지 않고, 모두가 [만나를] 충분히 거두었을 때, 공동으로 모아 놓은 것에서 각자 자기에게 할당된 몫을 취하였다. 이렇게 해서, 각 사람이 특히 더 부지런했을 때, 자기에게 아무런 손실이 없이 자기보다 더 느린 이웃을 더 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바울은 적절하게 연보에 적용하고 있다 (고후 8:14). 이 구절에서 모든 사람이 자기가 소유한 것에서 부족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주고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일이 비유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는 만나와 우리의 매일의 양식 사이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긴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구별되는 점이 관찰된다. 그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언급할 것이다. 만나는 우리가 보통 먹는 양식과는 다르며, 경작이나 노동이 없이 매일 주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백성들 각 사람에게 만나에 똑같이 참여하라고 요청하셨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을 금하셨다. 보통 이루어지는 생산의 논리는 다르다. 만일 사람들의 필요가 우정과 평화 가운데서 공급되고자 한다면, 각 사람이 자기 것을 소유해야 하며, 사고 파는 일이 이루어져야 하며, 상속자들은 자기들에게 자격이 있는 것을 물려받아야 하며, 선물이 있어야 하며, 각자가 자기의 근면과 힘과 능숙함 혹은 다른 수단에 맞게 자기의 자원들을 증대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필요하다. 간단히 말해서 정책은 각 사람이 자기에게 속한 것을 향유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의 필요에 만나에 대해서 규정되어 있는 법률을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 역시 지혜롭게 그것을 구별하면서, 무차별적이며 혼란스러운 재산 사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행복하게, 마지못해서 하거나 후회함으로 하거나 강제로 행하지 않으면서, 자기 형제들을 그 부족함에서 구제해줌으로써 이루어지는 평등(고름)이 있어야 함을 명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어떤 재산이든지 간에 만나와 같이 하나님이 주심으로써 온 것임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이제는 각 사람이 사적으로 따로 무엇이든지 자기들의 것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하나님이 예전에 자기 백성들에게 부과했던 것과 똑같이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하라는 요구가 없다. 그렇지만, 만나의 분배는 구제에 적절히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가르침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그들 가운데서 만나를 나누었을 때에 아무도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자기들이 거두어들인 수확이 바닥이 날까 봐서 걱정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우리는 다음에서 어떻게 칼빈이 교회와 사회 안에서 생산과 분배에 대한 이 이해를 규정하려고 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본문 안에서 사적 자본주의(private capitalism)의 조건을 단순히 받아들이고 있는 방식은 그의 입장을 나중에 칼빈주의에서 일어난 일탈 가운데 몇 가지와 연결시켜주는 기본적인 문제점을 가리켜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사회에서의 불평등을 환영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사적으로 획득한 부는 평등(고름)의 창출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각 개인이 자기의 수단의 정도에 따라 가난한 자들을 도와 어떤 이들은 지나치게 소유하고 다른 이들은 부족하게 되지 않도록 우리들 가운데서 비슷함과 고름이 있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결속 가운데서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본성적) 질서의 회복이 일어나는 공동체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능력에 따라 기여함으로써 모두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받도록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들 가운데에서 제정해 놓으신 이 공동의 나눔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함에 있어서 더 큰 활동과 열정을 진작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의 비율상의 형평의 규칙이란, 지체들이 자신들의 은사와 필요의 비율에 따라서 서로 나눌 때 이 상호간의 나눔이 공정한 조정을 결과한다는 것이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덜 갖고 다른 사람들은 더 갖고 있으며, 그 은사(선물)들이 고르지 않게 분배되어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나눔은 각자가 사랑 가운데서 빚지고 있는 것을 자기 이웃들과 청산하는 각 사람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칼빈은 이사야(5:9), 아모스(4:1), 또한 야고보서(5:2)과 같은 고전적인 본문들을 인용하면서 부의 축적을 배격한다. 심지어 그는 냉혹한 부자들을 살인자들이라고까지 칭한다: “그분[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풍족하게 주셔서 아무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필요하지 않게 하실 수 있다. 그렇지만, 그분은 자신이 우리에게 행하라고 명하신 대로 우리가 각자 교류할 때에 우리가 함께 누리는 사랑과 우애를 테스트하기를 원하신다. 부자들은 야수들처럼 가난한 자들을 잡아 먹고 그 피와 내용물을 빨아먹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고 언제나 그들을 공정하게 대해주며, ‘아, 이것은 내가 그에게 진 빚이요, 내가 그에게 일을 주었고, 나는 그에게 적절하게 지불했소’ 라고 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각 사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수단에 따라서 부족함과 곤궁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매번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그들이 이웃이 야위어 가는 것을 보고도 그 이웃들을 돕기 위해서 손을 펴지 않는다면, 그들은 마치 살인자들과 같다.”

그는 부자들의 두 가지 경제적 관행을 비판한다. 하나는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행위와 다른 하나는 식량을 가지고 투기하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아직도 그[선지자]는 부자들의 탐욕에 대해 말한다. 그 부자들은 기근의 때에 가난한 자들의 목을 짓누르고 그들을, 말하자면, 노예로 만들었다. 우리는 진정으로 가난과 압박해오는 곤궁의 영향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사람들이 기근 때문에 눌려 있을 때는 자신들을 구하려고 하지 않기보다는 어떤 값에라도 백 번이라도 자기 목숨을 팔고자 한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부자들이 계속해서 호시탐탐 노리면서 이 경우를 지켜보고 있는 이 사악함을 정죄한다. 부자들은 곡식의 값이 폭등하는 것을 보고, ‘자 이제 가난한 자들이 우리 수중에 떨어질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칼빈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부를 독점하고 자본을 집중시키며 지구와 가난한 자들을 수탈하는 일을 향해 발전해 나가고 있는 초기 자본주의의 모든 결과를 당시에는 아직까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부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개인적으로 일깨우며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회복된 질서의 표적이 되라고 촉구함으로써 이러한 발전에 대항하는 그의 기본적인 접근 방식이 후대의 역사에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법률에 대한 능력을 가지고서 칼빈은 다른 어떤 개혁자들 이상으로 교회와 정부들이 나눔과 연대의 하나님의 질서에 진력하도록 규칙을 개발하기 위해 시도한다. 특히 교회는 교회가 돈과 재산과 구제와 헌금과 임금(봉급) 기준 등등을 다룸에 있어서 가난한 자들을 기본적인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  칼빈은 고대 교회를 언급함으로써 자기의 이해를 정리한다: “여러분은 빈번하게 교회 총회들의 결정에서든지, 고대 저자들의 글 가운데서든지, 땅으로든 금전으로든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가난한 자들의 재산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그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위해 지정되어 있는 것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이 노래가 자주 불려진다. 그래서 만일 좋지 못한 믿음으로 그들이 재산들을 쌓아두거나 낭비한다면, 그들에게는 살인죄를 짓게 될 것이다.”

공공 당국자들은 그런 사람들이 죄에 의해서 지배를 받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서 경제적인 문제들에 개입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갖는다. 그의 “강요” 마지막 장에서 (IV, XX, ed. 1559), 칼빈은 그 “정치상의 행정집행”(political administration)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상세하게 제시한다. 요약해서 그는 행정관들을 “아버지들의 아버지, 백성의 목자, 평화의 수호자, 정의의 후원자, 무고한 자들의 보호자…”라고 부른다. 경제에서 이것은 재산권 보호와 관련된다. 그러나 또한 사업과 상공을 규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재판장들은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속한 것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며, 모든 사람에게 정의를 시행하고 편애나 못된 의지로 정당한 명분을 뒤엎지 않도록 해야 한다. 청렴함과 좋은 믿음에 반대되는 모든 사악함은 여기에서는 일반적으로 정죄를 받도록 하자. 이는 판결을 뒤집는 경향이 있는 부패가 형평성과 공정성을 침해함으로써 모든 계약들을 무효화 및 왜곡시키고 아무 것도 안전하게 두지를 않기 때문이다. 도량형의 속임은 모든 정당한 거래 양식을 파괴시키고 일소시켜 버린다 … 그러므로 구매자이든 판매자이든 간에, 포도주나 곡식 혹은 다른 어떤 것을 측정하는 공인된 도량형을 왜곡시키는 사람은 위조범이라 간주된다.”  “당국자들은 진실로 초과 비용을 규제하는 법률을 제정하여 과도한 낭비와 사치를 차별 없이 억제해야 할 것이다.”

세금은 정부의 사치가 아니라 국민의 복지에 기여해야 한다: “그러나 군주들은 … 자기들의 영지가 사적인 수입이 아니라 온 백성의 공적 유익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롬 13:6에서 증거하고 있다.) 그들은 공공에게 손해를 주지 않도록 낭비하거나 훼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이 백성의 피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 피를 아끼지 않는 것은 가장 심한 비인간성이다.”

한 면에서 칼빈은 현대 용어로 말하자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옹호하고 있다. (공산주의는 몇몇 형식으로 중세 시대 가운데서도 옹호되었으며, 급진 종교개혁의 몇몇 형태 가운데서도 옹호되었었다.) 사유 재산은 인정했지만, 부의 축적에 대해서는 명확한 제한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규제되었다. 제네바에서 칼빈은 이러한 노선들을 따라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이 더 후대의 시대에도 성공했는가? 이 질문을 하기에 앞서서 노동, 교역, 은행이라는 몇 가지 구체적인 경제적인 문제를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노동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쉼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프레임 안에서 사람들은 일하고 쉼을 갖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것은 루터의 가르침을 반영한다. 칼빈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들로 그린다. 그렇다. 하나님이 함께 운영할 자를 찾으시고 사람들은 하나님과 협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목표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창조된, 의지의 자유에 대하여)에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관련해서 그리고 이러한 관계적 측면의 제도적인 차원들을 포함해서, 관계적 존재자로서 인간 존재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요약하고 있는 놀라운 본문을 작성했다.  간단히 말해서, 이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행위가 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창조하시고 재창조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확히 하나님의 협력자들이 되라는 목적으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재창조하신다. 다른 인간 존재자들과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관계들 가운데서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들에게 개입하며 온갖 종류의 문제점들과 씨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권능을 부여해주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공동체 가운데서 그리 하신다.

칼빈은 안식일의 성경적인 의미를 일꾼(노동자)들을 수탈과 압제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취한다. 노동은 하나님의 소명이다. 그러므로 노동은 공동선에 기여한다. 한 설교에서 칼빈은 에베소서 4:26-28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에 따라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한 가지 구분을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 내가 노동을 한다. 나에게 기술이 있다, 혹은 내가 이러한 거래를 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충분하지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이 공동선을 위해서 유익하고 선한 것인지, 그리고 그의 이웃들이 그런 것에 의해서 더 나아질 수 있는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이는 이것이 모든 직업과 지위가 이바지하는 목적이 아님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소용이 있는 일에 종사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한 몸의 지체들에 비유된다. 그래서 손이 몸의 다른 지체를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그 지체에 손상을 입혔다고 해보자, 그렇게 해서 몸 전체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부르심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가운데서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에게로 부르셨듯이, 하나님이 우리보다 앞서 가셔야 하며,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길을 따른다는 사실을 언제나 우리 눈 앞에 두어야 하기 때문에, 진정으로 하나님은 전체 공동체(community 혹은 지역사회)에 유익하며 도움이 되며 모두에게 선을 반영시켜주는 직업만을 인정할 것이다.”

아무도 게을러서는 안 된다. 수도원 생활에 대한 오용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도 직업이 없이 실업 상태로 두어서는 안 된다. 신명기 24:14-18을 해석하면서, 칼빈은 이렇게 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모세는 단지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이 일을 할 때에 어떻게 지원을 받는가 하는 것만을 의미했다. 그들의 손에 주어지는 일이 바로 그들의 땅이며 수입이며, 재산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아무런 유리한 점이 없다는 뜻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마치 가두어 놓듯 그 자리에 두고 계시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그들의 일을 박탈하는 이유가 될 수 있는가? 만일 누군가가 어떤 사람의 밭을 약탈하거나 그의 목초지를 거둬들이거나 모든 것을 압수하기 시작한다면, 모든 사람이 거세게 항의할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서 그의 할 일을 빼앗는 것은 훨씬 심한 일이다. (이미 말했듯이) 그 사람에게는 다른 자원이나 물려받을 유산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일에 자신을 아끼지 않으며, 자기의 피까지도 아끼지 않는다.”

노동의 핵심적인 측면은 공동체를 위한 유용성이다. 노동은 특히 비즈니스도 포함한다. 비즈니스는 사적인 소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성의 표현이다: “인류의 공동 사회에 유용성을 제공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욱 칭찬 받을 만한 생활 형태는 없다.”  “경건한 생활은 비즈니스에 비교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는 경건한 자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교제를 유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각 사람이 그에게 지워져 있는 업무와 자기의 소명과 올바르게 행하는 능력과 나머지 은사들을 수행하는 그 근면은 상품이라고 여겨진다. 이는 그 목적과 용도가 사람들 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소통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시에 부자들이 일꾼(노동자)들을 수탈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사흘 동안 일을 시킨 다음에 가난한 사람을 죽이고서도 행복할 수 있다. 그 사람들에게는 만일 그 일에서 이윤을 얻었다면 그 일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을 인간적으로 대하여 그들에게 과도한 짐을 지우지 말고 계속해서 일을 할 수 있고, 그들의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감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은 부자들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잔학함을 시정고자 하셨음에 틀림없다. 부자들은 자기들의 일에 가난한 사람들을 고용하고 그들이 한 노동에 대해서 보상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공정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신학적 이슈이다.  공정한 임금이라는 것은 단지 공정하게 계산하는 규칙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임금은 일꾼(노동자)들의 실제 필요와 관련해서 계산되어야 한다. 갈등이 있는 경우 칼빈은 중재(조정) 메커니즘(arbitration mechanism)을 옹호했다.

칼빈의 경제 이론과 실천 전체를 살펴볼 때, 그가 공업과 장사(trade 거래)를 농업과 똑같은 무게로 취급했던 개혁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비즈니스를 포함하는 모든 측면에 대한 핵심 기준은 공동체(community 혹은 지역사회)에 미치는 효과이다. 모든 경제는 연대성(solidarity)이라는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이것이 사회적 개신교(social Protestantism) 발전의 토대들 중 하나이다. 어떻게 해서 칼빈이 자본주의 발명자들 중 한 사람으로 널리 간주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이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특별한 면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이자를 인정하는 일이다. 루터와 칼빈 양자의 출발점은 성경이 지지하는 일반적인 전제이다: “누구든지 무엇인가를 빌려주고 그 보답으로 더 많은 돈을 취하는 자는 고리대금업자이며, 도적, 강도, 살인자와 같은 저주를 받는다.”

루터의 시대에 이를 물리는 한 가지 주장은 돈을 빌려주는 것은 빌려주는 자가 가능한 이윤을 잃어버리거나 이윤을 벌 기회를 놓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루터는 자동적으로 이자를 물리는 것에는 반대했다: “여기에서 사람이 게으르고 나태한 방탕 가운데서 자신을 살찌우고 싶어서, 궁핍한 이웃을 이용해서 자기 손실을 부풀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의 노동과 염려와 모험과 손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대부를 통해서 진짜 손해를 입을 경우에만, 입는 피해에 대한 (조심스럽게 탐욕을 피하면서) 후속적인 지불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것은 고리대금이 아니다. 물론 빚 전체를 다 없애주는 것이 사실 훨씬 더 좋은 일이지만 말이다. 만일 노인이나 과부, 그리고 고아가 이자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밖에 살 수 없다면, 그것은 “필요 때문에 이루어지는 유일한 돈놀이”이며 따라서 허용되어야 한다. 행동의 규범을 공표하거나 실행하는 것이 법률가들과 세속 정부 당국의 실제 할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업무를 적절하게 행하지 않기 때문에, 불쌍한 설교자들이 그들의 예언자적 사역을 감당하면서 성경의 언어로 그 문제를 공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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