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히 두크로(Ulrich Duchrow) 교수.ⓒ김정현 기자 |
칼빈은 망명자들의 처지를 염두에 두었다. 망명자들은 우수한 기술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돈이 없이 제네바에 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비즈니스를 통해서 직접 이윤을 낼 수 있으려면 먼저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또한 루터의 정황과 비교해서 칼빈의 제네바의 정황은 훨씬 더 산업과 상업이 발전했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메시지와 비즈니스의 현실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애를 써야 했다. 특히 그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다루었다: 출 22:25; 레 25:35-38; 신 23:19 이하; 시 15:5; 겔 18:8, 17. 비엘러(Bieler)는 이러한 본문들에 대한 칼빈의 해석을 자세히 분석했다. 그러므로 비엘러가 발견한 사실에 대한 요약을 인용하도록 하겠다:
“복음으로부터 시작해서, 그[칼빈]가 선배들보다 좀 더 분명하며 차별성이 있는 해석을 하고 있는 그런 본문들에서 그는 자기들에게 이윤을 주는 것만을 찾는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을 지극히 엄격하게 정죄하고 있다. 그 까닭은 성경이 고리 대금업과 그 모든 악폐를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며, 진정한 믿음의 표시로서 다른 사람들을 도울 뜻을 가진 이타주의적인 대출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칼빈은 구약 성경의 규제들을 새로운 현실에 적용함에 있어서 전혀 분별력이 없는 율법주의자들과 문자주의자들을 책망한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들과 다른 시대에 맞지 않는 민사법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그 민사법이 어떤 경고와 보편적인 영적 교훈으로서의 가치는 보유하고 있지만 말이다. 유대인의 법이 다른 민족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증명은 그 법률이 비유대인들에게는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일을 합법화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금전상의 국제적인 거래를 가능하게 해주는 요소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국제적인 무역이 없었다면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 개혁자(칼빈)는 성경이 ‘고리 대금업’이라는 말에 우리가 생산적인 대출이라고 말하고 있는 비교적 새롭고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현상을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
그러나 인간에게 약간의 자유가 주어질 때, 그 자유가 주어지자마자 자연(본성)적으로 기울어지는 과열 현상에 주목하면서, 칼빈은 이자를 붙여서 돈을 빌려주는 일에 대한 자신의 정당화에 온갖 종류의 규제로 울타리를 친다. 돈을 빌려주는 일이 고리 대금업이 아니기 위해서 그 대출금을 생산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부르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출금의 진짜 성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가난의 깊음 가운데서 헤매고 있는 사람에게서 이자를 정확하게 징수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 대신에 가난한 사람은 항상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자를 받는 대출금이 비록 호조건으로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만일 대출해 주는 자가 정상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할 몫에서 대부해주는 양을 전용했다면, 그 대출은 부당한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를 돕는 일에 할당되어야 할 어떤 돈을 부당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을 고리 대금업자의 대열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동일한 원칙이 과도한 이자율을 물리는 사람, 그리고 자기라면 그러한 조건들을 강요 당한다면 추호도 받아들이지 않을 그런 조건에 돈을 빌려주는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나 정상적인 이자율은 어느 정도의 이자율인가? 칼빈은 이자율을 고정시키는 객관적인 기준이 전혀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만일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사람의 영적 도덕적 판단이 그 비율을 결정할 수 밖에 없다. 그의 결정은 복음에 의해서 이해된 대로의 정의와 자선에 의해서 지배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궁핍(필요 needs)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최소한 빌려간 만큼을 벌지 못한 채무자에게 이자를 물리는 것은 정당한 이자가 아니다. 또한 서로 계약한 당사자들의 이해만이 아니라 공적인 이해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결국 고객으로부터가 아니라면 누구로부터 이자를 받는단 말인가?
그러므로 어느 이자율 아래는 정당할 것임을 보여주는 일률적으로 고정된 이자율은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만일 믿는 신자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강제되고 있는 기준들이나 민사법이 확정하고 있는 이자율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 신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끗한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조건이 객관적으로 볼 때나 외부에서 볼 때 완전히 정상적이며 정직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이윤과 탐욕에 대한 갈증에 의해서 이끌리지 않도록 확실히 해야 한다. 그러므로 돈 거래를 하나의 직업으로 보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볼 때, 유일한 결정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에서 계시하시고 가르치시듯 사랑이며 이웃의 복지이다. 그 사랑은 너무나 엄격한 요구여서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보상을 받거나 배상을 받기 위해서 결코 돈을 빌려간 다른 사람으로부터 일할 기회를 박탈하거나 그 사람의 사생활에 대한 재량권을 획득할 수 없다.”
특히 오늘날에 대해서 시의적절한 몇 가지 점은 다음과 같다.
- 생산적인 신용(productive credit)의 효과는 반드시 가난한 자들을 이롭게 해야 한다. 이 관점에서 현대 서구 사회의 은행들과 정부들이 1970년대 이후에 남반구의 빈곤 국가들에게 자행해왔던 바는 루터, 칼빈, 그리고 성경과 완전히 어긋난다. 물론 이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 위험 부담은 반드시 채권자(빚을 주는 사람)와 채무자(빚을 얻은 사람) 간에 공유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미리 이자율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양측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끝에 가서는 동일한 이윤을 갖도록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자는 실제로는 위험을 무릅쓴 경제적인 투자의 실제 결과의 한 몫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이슬람교에서 은행업이 (미리 결정된) 이자에 대한 성경적인 금지에 준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방식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자율은 결코 실제 성장률(잉여)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과는 정반대이다.
- 돈(money)은 실물 경제에 기여해야 하며, 따라서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 돈은 전문적인 머니 딜러(money dealers, 대부업자 혹은 외환딜러 – 역자)의 이윤을 만들어주는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칼빈은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는다: “잘 통제된 국가에서 고리대금에 (말하자면, 돈을) 투자한다고 공언하는 사람은 전혀 관용될 수 없다. 심지어 세속적인 사람도 이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공공연하게 이런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인민의 무리와 사회에서 축출되어야 마땅하다. 만일 정직하지 않은 기술이 있어서 그런 기술을 행하는 자들은 악취가 나며 경멸할만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고리 대금업자의 기술이야말로 바로 그 더럽고 부적절한 거래임에 틀림없다. 그런 거래는 그리스도인과 품위 있는 사람에게는 합당하지 않다. 보통 고리 대금업에 투자한 돈에서 이윤을 얻는 사람은 사악함이 흘러 넘치는 약탈자가 될 것이다.” 이 관점에서 현재의 금융 위기는 급진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공동선에 기여하지 않는 어떠한 재정 기구나 금융 메커니즘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파생 금융상품이나 헤지 펀드나 사적인 에퀴티 회사들 등등의 목적이 투기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것들은 금지 되어야 한다. 왜 은행들이 크레디트를 통해서 금전을 창출해도 되는가? 돈은 공공 상품이어야 한다. 이상은 현재의 현실에 개혁자(칼빈)의 주장들을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몇 가지 예일 뿐이다.
- 국가는 공동선에 확실하게 기여하도록 하기 위해서 경제적인 문제에 과감히 개입해야 한다. 이것은 도량형 통제와 같은 고전적인 주제들만이 아니라 특히 금융 시장에도 관련되어 있다. 또한 공동선을 위한 과세가 핵심 쟁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현재 공공 예산이 부채를 짊어지게 된 상황은 주로 탈세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세금을 납부하고 있는 사람들 – 점점 더 의존적인 노동자들만이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 – 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세금납부를 피하고 있는 부자들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칼빈이 이 주제에 대해서 죽을 때까지 얼마나 면밀하고 깊이 숙고했는가 하는 사실은 그의 사후에야 비로소 간행된 에스겔서 18:8, 17에 대한 그의 주해를 보면 알 수가 있다: “이자를 물리는 사람들 치고서 자기 형제에게 짐을 지우지 않은 사람은 거의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고리대금업(대부업)과 이자라는 명사들은 파묻어서 인류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없이는 비즈니스상의 거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항상 무엇이 허용되는 것이며 어느 정도 허용되는지에 대해서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분명 이것은 신념이 확실한 자본주의자의 언급이랄 수 없다. 그러나 칼빈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가 하는 쟁점은 여전히 남는다.
2. 칼빈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현재의 에큐메니컬한 상황
이 주제에 대한 열띤 논쟁을 촉발시킨 것은 막스 베버의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유명한 연구서이다. 그의 테제는 개신교(특히 칼빈주의)가 “자본주의 발전에 적합한 정신의 전환” (a ‘turn of mind appropriate for the development of capitalism’)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 해석이 이 형태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이 그 후의 연구조사에 의해서 널리 밝혀졌다. 베버 테제에 반대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논증이 있다. 1. 자본주의는 훨씬 더 일찍 출발했다는 것이며, 2. 베버가 자기의 테제를 입증하기 위해서 칼빈 자신보다는 17세기와 18세기의 텍스트들(특히 “시간이 돈이다”라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 그리고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의 매우 엄격한 노동 동력론)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막스 베버의 구체적인 주장들이 무엇인가?
- 청교도인 벤자민 프랭클린이 윤리의 최고선으로서 돈의 축적(the accumulation of money)을 소개했다. 재산을 증식시키기 위해서는 신용부채(credits)에 최고 높은 이자를 추구하는 것이 의무이다. 비즈니스에서의 이윤 증대 역시 직업을 통해 추구해야 할 의무이다. 이것은 신생 자본주의 산업에서의 임금을 가장 낮게 낮추는 방법을 포함한다. 그러나 프랭클린이 예외가 아니었다. 이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 자세가 그 당시의 대중적인 현상(마세너샤이눙 Massenerscheinung)이었다는 것이 베버의 주장이다. 경쟁은 모든 이를 이 새로운 정신과 행위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 이 윤리는 노동을 직업, 소명(베루프 Beruf)으로 보는 루터 및 칼빈의 신학적 평가에 기초해서 주장된다. 이 윤리는 단지 청교도들과 경건주의자들을 추동하는 합리적인 행위가 아니다. 우리를 성공적인 생활로 인도하기를 원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 이 윤리의 반대면이 예정론이다. 성공적이 된다는 것은 택함 받은 자가 된다는 뜻이다. 다시 이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낳는다. 이 느낌은 근대의 특징인 개인주의를 강화시킨다.
- 그러나 복으로서의 부는 소비를 통해서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절약을 통해서 축적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금욕주의(asceticism)의 최상의 길은 더욱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다 (이너벨틀리헤 아스케제 innerweltliche Askese, 내면 세계상의 금욕).
베버는 칼빈주의적인 청교도들과 마찬가지로 경건주의자 및 감리교인들과 관련되어 있는, 17세기와 18세기의 사실에 기초해서 자기의 이론을 세울 수 있었다는 점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과 자본주의 사이의 후대의 연결은 원래의 칼빈과는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음이 명백하다. 특히 칼빈의 가르침에서 예정은 청교도 교리들의 중심도 아니며 그런 함의들을 갖고 있지도 않다. 칼빈의 예정론은 개인주의적인 전망을 지니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교통 및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연결과 관련해서 그 위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핵심은 부의 목적과 관련되어 있다. 칼빈에게는 부의 목적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인데 반해서 청교도들에게는 그 목적이 개인의 구원의 표시이자 목표인 것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서로 정반대이다.
동일한 왜곡이 소명과 노동의 개념에 대한 루터 및 칼빈의 사상에서도 일어났다. 루터는 한 개인의 “세속” 직업이라는 틀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이웃에 대한 봉사 가운데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반응을 중심적인 쟁점으로 보았다. 이것은 칼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칼빈은 “노동”을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의 핵심 과업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다시 부르주아 계층에 의해서 추상적 노동(abstract labor)과 최종적으로는 임금 노동(wage labor)을 의미하는 것으로 흡수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노동의 종류와 경제의 종류와 관계 없이 일을 해야 할 신성한 책무를 지녔다. 따라서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종교개혁은 나중에 마크르스가 상품, 돈, 자본에 대한 물신숭배(fetishism)라 부르게 된 것에 기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적 경험과 성경에 대한 현재의 사회적 역사적 이해에서 볼 때, 칼빈 자신의 이론과 실천에는 몇 가지 약점이 있다.
- 첫 번째 쟁점은 부동산(property)이다. 만나 스토리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칼빈은 하나님이 식량을 직접 주시는 상황과 (후대의) 정상적인 생산과 분배의 상황을 구분한다. 그는 일반적으로 사유재산을 옹호하며, 부의 차이도 인정한다.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한 만나 스토리의 교훈을 부자들에게 자발적으로 구제를 베풀라는 초청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는 사도 바울의 연보 수집을 자기 이론의 한 예로서 활용한다. 바울 역시 이 맥락에서 만나 스토리를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출애굽기 16장에 대한 이 해석은 정확하지 않다. 이스라엘의 정황 가운데서, 부동산은 활용하도록 되어 있는 부동산(property for use)을 의미했다. 각 가족은 생산과 생계유지의 수단으로서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도록 되어 있었다. 주전 8세기 이래로 선지자들의 항의와 또한 부의 축적에 부동산을 이용하는 일을 제약하는 법률 개혁들을 불러 일으키게 된 것은 바로 정확히 시장에서의 교환 가치로서의 부동산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 점에 대한 핵심적인 신학적 주장이 성결 법전에 나와 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aliens 영주권자, 객)이요 동거하는 자(tenants 세입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레 25:23). 이것은 농경 사회에서 기본 생산 수단인 토지를 팔고 사거나 축재하는 상품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사 5장, 8장; 열 번째 계명). 그러므로 칼빈은 한 사회에서 부동산을 조직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차별화 시키지 않고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사실에만 그대로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토지를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보는 이것이 바로 오늘날 심지어 공공재와 서비스까지도 사유 재산화 하려는 전체주의적인 충동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여기에서 칼빈은 우리를 도울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도움을 줄 수 있다.
- 돈과 신용부채(credits)에 이자를 매기는 것이 또 다른 쟁점이다. 칼빈은 내가 앞서 보여주었듯이 축적을 향한 자본주의적 충동을 제약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논의에는 두 가지 약점이 있다. 첫 번째 약점은 그가 부의 불평등 분배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경제적 메커니즘들을 통해서 부가 빈곤을 창출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는 부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지도 압제하지도 말라고 훈계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부를 가난한 자들을 돕는 데 사용하라고 권면한다. 그는 또한 예를 들어서 전문적인 돈놀이를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축재의 다이나믹스를 제약하기 위해 정치에 영향을 주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그는 구조적 대안들을 찾지 않는다. 두 번째 약점은 다시 5퍼센트의 이자율로의 정치적인 제한과 제시된 개인적인 제약들을 준수할 것에 대한 도덕적 요청으로써 축재를 향한 자본의 무제한적인 충동을 중단시키기에 충분할 것을 소망하면서 생산 신용부채들의 경우에 이자를 붙여서 대출해주는 일을 그가 대체적으로 승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칼빈에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회나 교회가 성취한 것을 칼빈에게 묻는 것은 불공평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길들을 찾기 위해서 성경에 비추어서 종교개혁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개혁자들이 근대의 파괴적인 발전에 대항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미 보았다시피, 자본주의로 곧장 직행하는 일이나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영향들 앞에서도 수동적으로 묵종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개혁자들을 이용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또한 칼빈의 신학과 실천 가운데는 개혁파 교회들과 또한 에큐메니컬 운동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지금도 끼치고 있는 중요한 유산들이 있다. 칼 바르트를 통해서, 이 전통이 바르멘 신학 선언(Barmen Theological Declaration)의 형태로 독일 교회들이 파시즘에 합병되는 일에 맞서는 일에 도움을 주었음을 기억하도록 하자. 제2 항은 다음과 같이 칼빈의 직접적인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위로의 선포이듯, 그러므로 똑같이 진지하게 그는 또한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주장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맹렬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위한 값없는, 감사의 섬김을 위해서, 이 세상의 불경건한 묶임에서부터의 흥겨운 해방이 임합니다.”
바로 여기에 칼빈 신학의 중요한 강점 중 하나가 있다. 즉 신자의 삶 전체는 믿음을 표출해야 한다. 믿음은 단지 개인적,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다른 중요한 특별한 면은 칼빈의 교회론과 교회의 실천이다. 신학자이자 법률가의 한 사람으로서 칼빈은 구체적인 교회 생활에서 믿음의 육화를 최우선시하였다. 또한 이 점이 바르멘 선언에 반영되어 있다. 제3 항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독 교회는 형제들의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 안에서 말씀과 성례 가운데,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으로 현존하여 활동하십니다. 교회의 믿음과 순종과 더불어서,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와 그 질서와 더불어서, 교회는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 사죄함을 받은 죄인들의 교회로서 교회가 오직 그에게만 속하며 그의 나타나심을 기대하면서 그의 위로에 의해서, 그리고 그의 지시 아래서 살고 살아갈 수 있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나 질서의 형태를 교회 자체가 원하는 무엇에게든지 혹은 그 시대의 부침하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정치적인 확신에게 넘겨줄 수 있는 허가를 얻을 수 있다는 거짓된 교리를 배격합니다.”
내가 시작하면서 인용했던 <아크라 고백서> (Accra Confession)는 의식적으로 바르멘 선언의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우리는 믿습니다 … 우리는 배격합니다.” 1989년 이래로,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은 에큐메니컬 운동 가운데서 “정의와 평화 및 창조세계의 순전함에 대한 공동의 헌신을 위한 교회회의 과정”에서 경제를 중심적인 쟁점으로 삼는 데 있어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감당해 왔다. 아크라 고백서는 그 과정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LWF 및 WCC에서 계속되고 있다.
… 임의로 든 예들
그런데 중국인들도 비록 전반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따르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각성하게 되었다. 1998년 CASS는 이웃 나라들로부터 대표들을 초청하여 또 하나의 자문 위원회를 조직했다. 물음은 이것이었다: 어째서 중국은 아시아의 금융 위기에 빠지지 않고 구제될 수 있었는가? 그에 대한 답변은 명백했다. 중국은 금융 시장을 자유화하지 않고, 자본의 흐름에 엄격한 통제를 유지했던 것이다. 베버의 칼빈주의-자본주의 테제는 더 이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위기들로부터 칼빈에게서, 그리고 칼빈을 넘어서, 무엇을 배우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