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과제들은 에큐메니컬 운동이 분명하게 풀어가야 할 일이기 때문에 마치 물감으로 오이쿠메네라는 지도를 그리는 일과 흡사하다 하겠다. 우리 모두의 지혜와 신앙과 관심을 한 곳으로 모을 때 가능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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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재웅 박사 ⓒ베리타스 DB |
필자는 2005년 4월 제12차 CCA총회 때 총무 보고를 하면서 에큐메니컬 운동이 관심을 가져야 할 세 가지 일을 제시하였는데, 첫째, 하나님의 진리(veritas)의 근거라는 사실을 추구하는 일, 둘째, 이웃에 관한 사랑(caritas)을 실천하는 일. 셋째, 교회의 일치(unitas)를 꾸준히 이루어가는 일이 그것이다. 아울러 에큐메니컬 운동을 효율적으로 펼치기 위해서는 에큐메니컬 평화회의(Ecumenical Peace Congress, EPC)와 같은 포럼을 만들어 세계평화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갈 것을 제안한 바 있다. EPC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 평화 공동체 건설을 위한 정책 개발
△ 평화 공동체 건설을 위한 친교 강화
△ 평화교육과 평화의식 개발을 위한 전략 수립
△ 평화 운동가들의 교류를 위한 자원 개발
△ 평화에 관한 미션과 정보에 필요한 네트워킹 형성
△ 평화신학을 다듬기 위한 노력 등
실제로 에큐메니컬 기구들은 조직의 한계 때문에 꼭 필요할 때 적절한 교회의 입장을 표현하지 못하고 대세에 편승하여 뒤를 쫓는 경우가 종종 있다. EPC는 이와 같은 한계를 분명하게 극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평화 공동체 건설의 발전된 하나의 형태라 하겠다. EPC를 만들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격려하고 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11:30) 평화 공동체 건설을 위한 에큐메니컬 운동에 의지와 정열을 쏟는다면 예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멍에와 짐을 지워 줄 것이다.
오늘의 세계는 많은 도전에 시달리고 있다. 인구 증가와 가난의 문제, 질병과 보건 문제, 다양성과 차별 문제, 종교 신앙의 광신적 문제, 환경의 지속가능성 문제, 테러 안보와 인권문제, 갈등과 충돌 문제, 외세의 개입과 압력 문제, 교육과 삶의 질 문제, 실업과 생존권 문제 등. 교회는 이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선교정책을 새롭게 다듬어내야 한다고 본다. 즉, 에큐메니컬 영성을 통한 에큐메니컬 선교정책을 수립할 경우,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해방을 위한 영성이라든가, 여성운동을 통해서 꽃 피워진 영성,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가면서 솟아난 영성, 가난과 절망을 헤치고 자라난 영성, 좌절과 소외를 극복하고 다져진 영성 등이 훌륭한 토대가 될 수 있다.
새로운 도전
인류의 미래는 새로운 도전으로 말미암아 크게 위협받고 있다. 즉, 핵 위기 현상, 기후 변화 현상, 유전자 변형 현상, 괴질과 난치병 현상, 폭력과 생명 경시 현상 등은 우리가 함께 힘을 모아 대응해야 할 과제이다. 이런 일은 국가와 기업과 시민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이므로 상호 효율적인 연대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전략적 연대는 적절한 지원이 확보되어야 하고 기술적인 지원이 지속되어야 하며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꾸준한 교육과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문제는 상호 연대가 취약하다는 점이다.
오늘의 교회는 점점 공신력을 잃고 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속적 타성을 답습하고 있다. 교회는 점점 영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예언자적 자세를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는 무기력해진 신자들이 모이는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라”(마9:17) 한다고 말씀하셨다. 교회갱신의 새로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대목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교회를 거듭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일그러진 교회의 이미지를 새롭게 바꾸어 놓아야 한다. 교회의 생명과 사명우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다듬어 내는 에큐메니컬 신학이 활성화되도록 해야 한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하나님의 선교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 한다. 이는 회개를 동반하는 일이다. 우리는 착한 이웃으로 살지 못한 일을 회개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한 일을 회개해야 하며, 힘 있는 사람의 행패를 방관해온 잘못을 회개해야 한다. 참과 거짓 사이에서 비겁했던 잘못을 회개하고 평화 공동체 건설에 게으름을 피웠던 일을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자포자기로부터 희망을 갖게 하는 거듭남의 출발을 뜻한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교회와 크리스천이 회개하도록 자기변화를 유도해야 한다. 그래야만 새싹이 솟아나 에큐메니컬 운동의 꽃이 활짝 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이상이며 표상은 첫째, 교회와 크리스천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분이시니”(엡4:5)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가 되어야 할 사명이 우리 모두에게 맡겨져 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교회나 크리스천이 하나 되기 위해 힘쓰는 무리는 점점 보이지 않고 서로 갈라져 싸우는 추악한 모습만 드러나고 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결국 “그들 모두가 하나 되기를” 바라는 그리스도 예수의 기도를 이 땅에 이루는 일이라 하겠다.
둘째, 교회와 크리스천은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5~16) 우리가 거룩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 본성을 쫓아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앙으로 거듭날 때 거룩성이 돋보이게 된다고 본다. 모든 종교의 본성은 거룩성에 기초하고 있다. 거룩한 교회와 크리스천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에큐메니컬 운동이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라 하겠다.
셋째, 교회와 크리스천은 공교회적(catholic)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이”(엡 5:23)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와 이를 따르는 온 세계의 그리스도인은 하나의 유기체와도 같기 때문이다. 마치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고전 12:12) 그리스도교는 국경을 초월한 공교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교회의 교리와 장정과 전통을 존중하고 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WCC가 발간한 세례, 성례 그리고 교역 텍스트로 공교회적 성경을 잘 보여준 경우라 하겠다.
넷째, 교회와 크리스천은 사도적(apostolic)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살전 2:7) 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사도의 권위와 전통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할 가치요. 의무이며 자랑이라는 사실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사도의 가르침과 분부를 그대로 따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