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경동]최고의 계명

2009년 9월 27일 설교자 박종화 목사

신명기 6:4-9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 또 당신들은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이십시오. 아멘.


로마서 14:17-19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사람은,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씁시다. 아멘.


마가복음서 12:28-33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 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 아멘.


최근에 어느 분과 얘기를 하다가 어느 원로 목사님이 한탄하시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그 분은 목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후배목회자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사회 나가서 교회에 가서 소금이 되어 사는 것이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찾아가보니까 소금 되라고 가르쳤더니 전부 소금 장사가 되어 있더라며 한탄하신 이야기입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소금을 파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소금이 되기보다 소금을 파는 사람, 음식도 짜게 해야 하고 썩지 않게 해야 하므로 파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진짜 소금이 되어야 할 사람은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소금이 못 되고 있다는 그 분의 한탄이 참 가슴 아프게 들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가장 쉽게 하나님께 받은 것이 무엇인지 물으면 이렇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희들한테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즐겁고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하나님을 믿으면 죽었다가도 삽니다. 확실히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더니 믿음을 받은 교회가, 먼저 믿는 자들이 그 믿음 때문에 교만하여져서 또는 그 믿음을 받고 진정 하나님의 뜻을 곡해, 오해한 나머지 믿음을 파는 곳이 되었습니다.


믿음을 팔다니요, 믿음을 구원받는다는 구원의 약속도 팔다니요? 상상이 되십니까? 믿음이 얼마인데 팝니까? 믿으면 받는 구원이 얼마인데 팝니까?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인 믿음을 판다는 것이 상상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었습니다. 우리가 종교 개혁주일을 지키는데 종교개혁이 뭡니까?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이라는 특권을 돈 주고 팔았습니다. 그게 면책부였고, 때로는 면죄부라고도 하는데 이는 교회의 아주 험악한 얼굴을 한 중세기 때 교회의 일이었고, 우리의 역사입니다. 믿음은 팔고 사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받고 감사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한일서 4:8-16 말씀에 아주 단순한 문장으로 하나님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주셨고,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십니다. 사랑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을 어디에 쓰셨습니까? 혹시 사랑을 팔지 않으십니까? 사랑을 사고 파는 일 때문에 우리 사회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추악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까? 사랑을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라 이름하든 그건 사람의 언어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구원의 은총으로 주셨는데 받은 사랑을 사고 팔고 짓누르고 없애고 그래서 이 사회는 멍들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건 그냥 감사하면 되는데 왜 장사합니까? 하나님의 가슴은 그런 뜻에서 아마 찢어지고 아플 겁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묻습니다. “당신 보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가장 큰 계명은 뭡니까?” 예수께서 구약에 있는 두 구절을 인용합니다. 첫째 구절은 신명기 6:4-9까지 우리가 봉독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 그 분을 믿고 의지하는데 맘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그분을 믿고 의지하여라.”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그래서 신명기 6:4-9까지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국민교육헌장, 신앙헌장입니다. 이대로만 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삽니다.


지금도 이 말씀을 헌장으로 담고 있습니다. 팔찌에도 만들고, 안경테에도 쓰고, 가슴에 담고, 문설주에도 쓰고, 집에 있는 책상 앞에도 쓰고, “이스라엘아, 들어라.” 그래서 이 전체 말씀을 ‘쉐마’라고 하는데 히브리말로 ‘쉐마’라는 말은, ‘들어라, 이스라엘아,’ 라는 뜻입니다. 전체 문장을 ‘쉐마’라는 대명사로 쓰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시기에도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뿐 아니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두 계명 속에 하나님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유대백성도 예수도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진실로 그 분을 사랑하십니까? 저는 고백할 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제가 오늘 여러분한테 저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제가 사랑해야 합니까? 사랑을 받지도 않았는데 제가 왜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알지도 못하는데 그분을 사랑하라니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기억도 없고 생각도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할 때 그것은 오늘 성경말씀과 다른 이야기입니다. 오늘 여러분, 확인하셔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는다는 대전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으셨습니까? 혹시 지성적인 이해로 하나님의 사랑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감성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았다고 가슴에 담습니까?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러시면 오늘 말씀대로 하나님께 감사의 사랑을 베푸십시오. 우리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도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 분만이 오직 저를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백입니다.


저는 아직 이스라엘 백성만큼 못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서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죽을 수밖에 없는 저를 용서해 주시고 사랑하셔서 저를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사랑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이 말씀을 제가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은 요한복음 3:16 때문에 믿음이 가능합니다. 예수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삶을 체험해 보지도 못했지만 예수 때문에 그 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사랑을 받고 확신한 다음부터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제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진실을 제가 경험을 안 했고 믿을 수 없으면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한 설에 불과합니다. 그런 설을 하려고 신학공부 할 필요도 없고 그런 걸 믿으려고 예수를 믿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확신하십니까? 그러시면 하나님께 받은 사랑에 대해 갚으십시오.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사랑을 사고 팔지 맙시다. 거래하지 맙시다. 받았으면 확신하고 확신하면 사랑을 감사의 마음으로 되돌려 갚읍시다.” 결단의 문제이지 논란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 계명에 대해서 유대인 중에 아주 훌륭한 학자 한 분이 계십니다. 신학자이고 목회자인 ‘마틴 부버’라고 하는 이분 말씀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은 두 계명입니다. 첫째 계명은 각자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모든 사람은 사랑받은 자기 자신을 아주 진실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만큼 제가 귀중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저를 창조해 놓으시고 저보고 참 좋다고 하실 만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랑받을만한 진실된 귀한 존재입니다. 이기주의 입장에서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나만 사랑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할 정도로 제가 귀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람인 저 자신을 제가 하나님 사랑하듯 저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을 학대한다고 느끼시는 분 있습니까? 살기 싫다고 저주해 보신 일 있습니까? 귀찮다고, 내가 왜 태어났냐고, 우리부모는 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냐고, 내 이 모습이 아주 싫다고, 그래서 목숨을 버리거나 또는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내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사랑할 만큼 너를 사랑한다. 내 앞에서 목숨을 버려? 하나님의 사랑받는 그대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대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진실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하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된 사랑이 진실이 됩니다.


이 땅의 문제는 이웃 없이 자기 사랑하는 이기주의도 문제지만 남을 위해 산답시고 목숨을 자꾸 이상하게 던지는 사람도 문제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가 진실로 하나님이라는 거울 앞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자아실현, 자기 사랑, 진실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울 앞에서 자기를 사랑할 줄 알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울삼아 그 안에서 제가 사랑받는 제가 저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사랑을 회복합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겁니다. 자기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런 전제하에서 이웃사랑의 세 번째는 자기가 자기를 극진히 사랑하듯이 이웃을 나처럼 사랑하십시오. ‘이웃사랑’의 전제는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의 전제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데 이웃이 바로 저 자신입니다. 그렇게 믿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제일 어려운 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조금 할 수 있고 제 자신도 사랑할 수 있는데 제일 어려운 계명은, 이웃이 저의 분신입니다. 제가 저를 사랑하듯 제가 하나님 사랑하듯 제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웃이 저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으면 최고의 사랑입니다.


이웃이 누구입니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보면 유대 사람들한테 이웃은 강도만난 사람이었습니다. 강도 만난 이웃을 사마리아 사람 천대받는 사람이 고쳐주었습니다. 이웃이 누구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웃이 아내입니까? 남편되시는 분들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 주십시오. 이웃이 남편입니까? 아내되는 여러분 남편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상식입니다. 자식되는 여러분, 부모를 가장 친한 이웃으로 알고 사랑하십시오. 부모되는 여러분, 자식을 자기 분신처럼 알고 사랑하십시오.


이웃이 내가 택한 내가 사랑하고 싶은 내 분신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내와 남편 사이에, 자식과 부모 사이에, 그런 나와 똑같은 사랑이 있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이 부족하면 사랑이 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는 이웃이 내가 택한 이웃이면 사랑하고 싶은 이웃이면 그래도 우리는 세상을 사랑스럽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삶 속에서 우리가 실현하기 힘든 이야기를 하십니다. 원수까지도 이웃이라고 알고 사랑하여라. 참 어려운 대목입니다. 성경 말씀이 이 하나만 어려운 게 아니라 여러 대목이 어렵습니다. 성경말씀대로 사는 것이 사실은 굉장히 어렵고 그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진실하고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깊게, 지킬 수 있으면 하나님은 좋아하실 것입니다. 완벽하게 지키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이웃이 원수일 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성경말씀에 원수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로마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을 선으로 이겨라. 선으로 이기라고 했습니다. 저는 평생 원수 맺고 산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일상사회에서 가정사회에서 직장 이야기, 밖에 돌아다니면서 저한테는 제 마음속에 무수한 원수들이 있습니다. 제가 맺기도 하고 제가 원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라는 겁니까? 느낌이 하나 왔습니다. 원수를 맺고 있는 사람이 제 눈앞에 나타날 때, 좋은 마음 가지고 일 하다가 원수가 나타나면 모든 일이 멈춰집니다. 원수 때문에 일을 못 합니다. 그 원수가 안 나타나면 좋겠는데 원수가 나타납니다. 원수 생각이 안 났으면 좋겠는데 자꾸 생각나는 원수 때문에 하던 일을 다 못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인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를 안 두는 게 좋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된 게 아니라 제가 원수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조금 비판을 받았다고, 저를 싫어했다고 제가 원수가 되기도 했고 원수를 만들었습니다. 그 원수 앞에서 저는 원수의 생각과는 상관 없이 제가 하고 싶고 제가 진실하게 고백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좌절당해서 그와 원수 맺은 것입니다. ‘하나님, 제발 제가 원수라는 생각에서 해방 받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목적은 ‘원수 관계로 살면 원수도 불행하고 원수로 생각하는 너도 불행하고, 해방을 받으라.’ 그런 뜻으로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개인관계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는 악도 사랑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악은 심판하고 물리치고, 악의 너울에 서서 고생하는 사람은 회개를 하든지 구원을 받아야 할 것 아니냐? 사람은 사랑하자.’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저는 이렇게 듭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기준에는 못 미치는 진실이 없기에 하나님이 저를 죽음의 골짜기에서 내버려 둘까 죽게 놔둘까 하다가 저를 건져주셨잖습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제가 예수께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고 죽으셨기에 제가 살아났지 않습니까. 이것은 저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분 말씀이 죽기까지 사랑할 줄 아는 사람, 그 분이 하나님이고 그 사랑을 실천하신 분이 예수님이고 그분이 오늘 오셔서 나는 사랑을 말로 하는 게 아니고 내 몸으로 한다. 영으로 한다. 죽을 너를 대신 끌어안고 너 대신 죽을 수 있고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는 정도의 사랑이 아니라 죽음을 죽이고 죽은 이후에 부활의 생명까지 담보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원수사랑이란 죽을 수밖에 없는 저와 같이 죽을 수 있는 깊은 사랑 동시에 죽음으로 끝날 줄 알았던 사랑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올 죽음을 극복한 새로운 생명이라 이름하는 부활사랑, 그 사랑을 하나님이 오늘 저한테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 사랑을 아십니까? 그 사랑을 알면 죽음으로 끝나는 원수 사랑에 대물림 되지 마십시오. 원수됨을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이 태동하도록 원수사랑 이후에 생명의 사랑을 여러분이 받으십시오. 예수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이게 개인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집단적으로는 어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이 국가, 경제 부분에서는 어렵습니다. ‘비스마르크’라는 제상 아시죠?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말씀에 있는 산상수훈을 보면 정치를 못한다는 결론이 납니다. 성경말씀대로는 정치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말씀대로는 정형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다 망하라는 겁니까? 최근에 돌아가셨습니다만 ‘바이제커’라는 유명한 물리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독일의 바이제커 대통령의 형이고, 노벨 평화상 까지 받은 학자인데 이분도 훌륭하신 학자입니다. 막스 클랑크 연구소를 만드시고 존경받는 분이신데 이분이 답을 썼습니다.


사랑, 원수사랑 있는 그대로 예수님 뜻에 맞게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을 해 보자. 지혜 좀 짜보자. 독일과 불란서는 철천지 원수입니다. 한일 관계보다 복잡합니다. 원수 관계로 끝까지 갈 것이냐, 히틀러처럼 전쟁했다가 그렇게 풀어지느냐? 안 풀어집니다. 원수 관계지만 당신도 살고 우리도 살자. 사는 방식은 둘이 합해서 유럽공동체라는 틀을 만들고 거기서 생존경쟁 하면서 같이 살자. 원수된 것을 지금 원수라는 각도에서 풀지 말고 같이 살면서 원수를 풀어보자. 그래서 두 나라가 철천지 원수인데 일종의 정치적 화해, 그렇게 말하지만 둘이 모여서 유럽 공동체를 만들기로 하고 사이가 꼭 좋진 않겠지만 잘 살아갑니다. 이런 관계 정도의 원수 관계를 약간 극복한 사랑을 뭐라고 할까요?


두 번째는, 사우스 아프리카는 백인 소수 통치로 수많은 흑인을 압사시켰습니다. 정치, 경제, 정신, 문화, 언어, 모두 몰살되었습니다. 만델라 대통령, 투투 대주교, 훌륭한 분들이 나와서 흑인 정부도 세우고 백인은 백인대로 양보를 하며 지냈습니다. 흑백은 끝까지 원수된 상태에서 흑인은 살 수 있습니까? 백인은 백인대로 편하게 살 수 있습니까? 못삽니다. 둘이 합의한 겁니다. 정권은 흑인이 잡기로 하고, 백인은 양보하고, 그 대신에 백인이 범했던 혹시 흑인도 범했던 모든 잘못은 전부 밝히기로 하고 보복은 없기로 흑인과 백인이 통합하여 살면서 원수된 것을 통합 이전에 원수 된 것을 통합한 다음에 하나씩 풀어가기, 원수된 사고방식 가지고 풀어가는 방법과 일단 화합하여 원수를 푸는 것은 다를 겁니다.


완벽하게 원수사랑은 할 수 없으나 서로 나도 살고 당신도 살고 전쟁을 통해서 수많은 죄없는 사람이 죽어가는 원수 푸는 방식보다 서로 당신 살고 나 살고 서로 함께 사는 생산적 사랑을 만드는 지혜만 짤 수 있다면 좋지 않으냐, 하면서 그런 지혜 있는 사랑을 “Intelligent love of enemy”, 지적 원수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진화론이 있을 때 인간은 진화한 겁니다. 무작위로 진화된 겁니다, 그래서 진화의 과정은 믿지만 인간을 보면 세계를 보면 창조주의 계획된 뜻이 있습니다. 창조주의 목적은 목적대로 있고 그것이 과정상 진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만든 말이 있습니다. “Intelligent design”, 지적 설계, 생각나서 얘기 드립니다.


이웃사랑을 완벽하게 실천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이 주신 모든 지혜를 총동원하여 서로 살며 사랑하며 자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랑을 지혜를 동원하는 사랑이라고 합시다. Intelligent Love, 한 번 참고해 보십시오. 학문의 토론장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실천할 수 없으면 사람이 만든 연합하고 합동할 지혜는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주변에 원수관계가 있습니까? 한번 최소한 합리적 이성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같이 살기 위하여, 사회와 사회끼리, 한일 관계처럼 나라와 나라끼리 같이 평생 원수지고 살 건가요? 같이 살면서 원수 된 것을 풀어보시는 차원이 높은 지혜, 남북관계, 전세계 관계, 우리 앞에 놓인 원수됨이 많습니다. 그 속에 노예되기 보다 자신있게 살면서 원수됨을 풀어서 복되게 살 수 있으면 더 좋은 거 아닙니까?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큰 사랑, 죽음도 끌어안고 부활이라 이름하는 새로운 삶을 주십니다. 자신있게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받았다고 확신하면 오늘 “하나님, 사랑합니다.”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을 이웃과도 실천해 봅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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