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재 교수 ⓒ베리타스 DB |
김경재 교수(한신대 명예)가 ‘속죄론’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가질 것을 당부했다. 김 교수는 30일 삭개오작은교회에서 열린 ‘제3회 갈릴리복음성서학당’ 제3강에서 ‘속죄론이 남긴 빛과 그림자 : 자율과 타율의 이분법을 넘어서’라는 주제로 강의하며, 속죄론을 오해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올바른 속죄론을 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흘린 피로 인류의 죄가 도말되었다는 이른 바 ‘속량론’은 현대인에게 그리 와닿지 않는 교리다. 현대인들은 주체적인 자기의식으로 인하여 죄의 값을 ‘죄의 당사자’가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남이 대신 져준다는 교리는 ‘고대사회의 신화적 잔재’라고 여긴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더구나 예수가 십자가 상에서 흘린 피로 인해 구원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는 도식은 고대사회의 군주적 신관의 잔재일 뿐이라며 이를 ‘폐기하라’는 주장을 휴머니즘의 이름으로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속죄론을 강요하다가는 되려 부작용만 생길 뿐이다. 김 교수는 설명하길, ‘생명은 피에 있다’고 생각한 이스라엘 고대인에게 있어 ‘예수의 피로써 정결케 되며 피흘림 없이는 사함도 없다’(히브리서 9장 22절)는 교리는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었으나,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교리를 ‘객관적 진리’로 강요할 경우 속죄론이 마음에 와닿기는 커녕 오히려 속죄론의 주술화, 경직화, 비인격화가 초래된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이미 속죄론이 ‘주술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말로만의 속죄론이 되어가는 형국이라는 것. 죄는 단순한 ‘범법 행위’를 넘어서 인간 실존을 해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지 않음으로 십자가의 가치마저 퇴색되었다. 또 한국교회 안에 진지한 죄의 고백과 회개, 그리고 이로 인한 ‘선한 열매’를 맺는 과정이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음으로 속죄론의 주술화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고 김 교수는 주장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가졌던 덕목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죄의 심각성’을 처절할 정도로 깊이 깨달았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나라의 종교사나 민족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날카로운 ‘죄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는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죄와 너무 쉽게 타협하지 않는가?’라고 김 교수는 말했다.
덧붙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손상시킨 인간 죄악의 댓가는 그 무엇으로도 치를 수 없다”던 안셀름(Anselm, 1034-1109)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말했다. 안셀름은 인간의 죄에 대한 용서가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라 성자(예수)의 대속의 죽음이 있고서야 이뤄졌다는 ‘법정적 보상설’을 주장함으로 속죄론에 있어서 인간 죄악의 심각성을 강조한 대표적인 신학자다.
그렇다면 지나친 자율성으로 인해 극단적인 ‘속죄론 폐기론’을 주장하면서도 죄의 문제에는 둔감한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한국교회는 어떠한 속죄론을 말해야 하는가?
‘자율성’과 관련해 김 교수는 “사실 인간의 삶은 타율적인 삶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대리적 삶이고 빚진 삶”이라고 강조하며 ‘완전히 자율적인 삶’은 불가능하다는 견해와 함께, 인간이 자신의 죄를 비롯한 행위와 실존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는 생각은 ‘영웅적인 자기과장’이라고 전하며, 예수의 ‘대속의 십자가’가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또 “그렇기 때문에 ’빈손 들고 앞에 나가 십자가를 붙드네’라고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의 영혼의 진실된 고백”이라고 전했다.
또 ‘죄의 문제’에 대해, 십자가를 통한 죄의 회개를 체험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간이 골방에서 자기 삶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죄적 실존을 깨닫기 힘드며, 십자가 사건이 쏟아 붓는 영적 조명등 아래에서만 자신의 적나라한 죄적 실존을 깨달을 수 있다”며 속죄론을 통해 자신의 죄적 실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나아가 “죄와 죽음의 권세를 절대사랑, 절대용서, 절대순명으로써 이기신 예수의 생명 속에 나의 실존을 내던져 일치시킴으로써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되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이러한 ‘십자가의 대속적 능력’을 체험한 신자는 ‘의롭다함을 받음’(칭의)의 단계에서 점진적 ‘성화’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