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공적신학의 지평, 하나님 나라”(2)

미래목회포럼 기조강연 '한국교회의 공적 책임을 중심으로'


칼 바르트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유비(類批)와 상응의 예들

첫째로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시어, 긍휼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시는 그와 같은 사람을 위한 한 이웃이 되신 것에 유비하여 “정치적 영역 안에서 교회 역시 항상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우선적으로 인간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국가라든지 자본이라든지 나라의 명예라든지 문명과 문화의 발전이라든지 인류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이념이라든지 등과 같은 추상적인 대의(cause)보다 인간에 대한 관심이 결정적으로 앞선다. (171)

둘째로 교회는 신적 칭의에 대한 증인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권리(Recht)와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막아주는 권리(Recht)를 수립하시고 확인하시는 칭의 행동을 하셨고( '복음과 율법'을 참고), 교회가 기다리는 미래는 이와 같은 신적 칭의의 결정적인계시이다. 바르트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 칭의(Rechtfertigung)에 뒤 따라야 할 정의(Recht)에 유비하여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논한다. 따라서 교회는 결코 “무정부주의”나 “폭군” 편에 설수 없고, “항상 시민 공동체로 하여금 법의 추구에 의해서 그리고 법의 확립을 위하여 “인간을 제약하고 보존하는, 국가의 근본적인 존재목적을 진지하게 여기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교회란 국가의 질서가 공정한 법에 근거하고 있고, 모든 정치적인 활동이 이 법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헌법에 근거한 국가이기를 멈추지 아니하는 한 존립할 수 있다고 하였다. (172)

셋째로 교회는 인자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오신 사실에 대한 증인이다. 이것에 유비하여, 교회는 모든 거짓된 편파성을 버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사회 가운데 더 낮은 자들과 더 낮은 층의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야 할 것이다. “가난하고 사회경제적으로 약하고 위협을 받는 사람들이 항상 교회의 우선적이고 특별한 관심사이고, 교회는 사회의 이와 같은 약한 지체들을 돌봐야 할 국가의 특별한 책임을 주장할 것이다.”(173) 바르트는 국가가 이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긍휼을 제도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항상 정치적 영역에서 사회정의를 위해서 헌신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하면서(173),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고 교회는 여러 가지 사회주의적 가능성들(사회적 자유주의, 협력주의, 노동종합주의, 자유무역, 온건한 혹은 과격한 마르크스주의) 가운데서 항상 사회정의를 최대한도로 기대할 수 있게 하는 운동을 선택할 것이다(다른 모든 고려들은 접어두고). (173)

넷째로 “교회는 은혜의 말씀과 성령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들로 자유롭게 부름 받은 공동체이다.”(173) 바르트는 이에 유비하여 “교회는 정치적으로 합법적인 영역에서 자신의 통찰과 선택에 따라서, 독립적으로 자신의 결단들을 실행할 자유와, 가정, 교육, 예술, 과학, 종교, 문화와 같은 영역에서 법의 규제가 아니라 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갈 자유를 각 시민이 국가에 의하여 보장받아야 할 기본적인 권리라”(173-174)고 말한다.

다섯째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다른 분이 아닌 그들의 이 주님께 매여 있고 헌신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독교적인 자유와 속박에 유비하여  바르트는 “자유”와 “책임”의 관계를 말한다. 즉, 교회는 국가가 개별 시민들에게 보장해야 할 정치적 자유와 기본법을 개별 시민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책임으로 이해한다. “시민들은 정치적이든 비정치적이든 자신의 자유의 전 영역에서 책임을 진다. 그리고 시민 공동체는 전체로서 자신의 자유를 주장함에 있어서 물론 책임을 진다.”(174)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라고 하는 교회의 본질적 속성에 유비하여 개인주의도 집단주의도 모두 비판하면서, 개인들과 전체(the whole)의 이익을 인정해야 하지만 개인이든 전체이든 결코 최종적인 결정권을 가질 수 없다고 본다. 즉, “교회는 이 둘을 모두 시민의 존재, 곧 법 앞에 서 있는 시민 공동체의 존재에 종속시킨다.”(174)

여섯째로 “교회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하나의 신앙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국적과 인종과 성별과 계층을 초월하여 실존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성인 시민들의 자유와 책임의 평등성을 주장한다. 물론, 인간적인 필요들과 능력들과 과제들의 다양성은 인정을 해야 하지만. 바르트는 여기에서 세례를 통하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신분을 지녔다고 하는 평등의 원리에 유비하여, 국가의 시민들은 법 앞에서 평등하고, 이 시민들은 이 법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작업을 함께 함에 있어서 평등하며, 법이 확보해 주고 있는 인간의 생활의 제한과 보존에 있어서도 평등하다고 한다.(175) 하지만 바르트는 이와 같은 평등의 원리와 함께 다양한 은사에 따른 다양성의 원리를 제시한다. 교회는 자신의 영역에서 한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과 이에 따른 다양한 과제들이 있음을 인식하면서 정치지적 영역에서 “입법과 행정과 사법과 같은 다양한 기능들과 ‘권력들’의 분권을 말한다. 교회 안에서도 여러 섬김들이 여러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처럼 시민 공동체 안에서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집중될 때, 교회든 국가든 공동체의 일을 망가트릴 것이기 때문다.(175-176)

일곱 번째로 바르트는 밝은 빛 가운데 사는 교회에 유비하여 시민 공동체 안에서 그 어떤 비빌 정책들도 비밀 외교들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교회는 참 하나님과 그의 자기 계시, 곧 어둠의 권세를 파멸시키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불 밝혀진 빛이신 그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얻어서 살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이 주님의 날의 동터 오름 속에서 살고 있으니, 세상과의 관계에서 교회의 과제는 이 날이 밝아 온다고 하는 것은 일깨우고 말하는 것이다.(176)

여덟 번째로 바르트는 말씀의 자유와 그것에 대한 증언(설교와 가르침 등도)의 자유에 유비하여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말과 언론의 자유를 주장한다. “교회는 자신이 성경에서 증명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에 의해서 세워졌고 양육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자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말이 이 자유로운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로운 통로요 대변자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176-177) 교회는 정치적 영역에서 바른 말을 하여 바른 결정에 이르게 해야 하고, 공개토론의 기회들을 권장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 더하여 바르트는 여론에 대한 잘못된 통제와 제어와 조종과 억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177)   

아홉 번째로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통치가 아니라 섬김을 위하여 부름 받았다며, 이것에 유비하여 시민 공동체 안에서도 섬김이 모든 것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potestas”와 “potentia”를 구별한다. 전자는 법을 따르고 법을 섬기는 좋은 국가요, 후자는 법에 선행하는 초법적인 나쁜 국가라고 한다. 그는 히틀러는 물론, 비스마르크도 나쁜 국가를 만들었다고 예증하고 있다.

열 번째로 교회는 그 기원에서부터 “에큐메니칼”하기 때문에, 정치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좁은 지역에 한정되는 것에 저항한다. 교회의 에큐메나칼 성격처럼 국가도 자국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나라들과 다양한 문화들과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열한 번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알고 있으나, 그의 자비는 영원하고 그와 같은 진노와 심판은 잠시 잠깐이라고 하는 것을 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정치적 영역 혹은 시민 공동체에서도 일어나지만, 그것은 잠깐이고 정의와 평화와 인간다움의 상태가 더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교회는 “검찰의 조처로부터 법정의 결정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그것의 과제수행에 있어서 자격미달인 정부에 대한 무장봉기로부터 합법적인 국가에 대한 외부적 위협을 막아내는 방어전쟁에 이르기 까지 정치적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강제력과 폭력을 통한 갈등해소들을 인정해야 하지만, 가능한 한 이와 같은 폭력적인 수단을 끝 까지 삼가면서, 최선의 해결책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178-179)

윌겐 몰트만에 있어서 교회의 밖에서 발견되는 하나님 나라의 징표들

몰트만은 교회 밖의 하나님 나라를 주장한다. 그는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보편사와 창조세계 전체 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봄과 그 징표와 그것을 일구는 도구가 있는 것으로 본다. 몰트만은 교회의 역사참여 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고 있는 메시아의 역사 참여에 동참하는 교회의 역사 참여와는 별도로 이 역사 참여의 하나님과 그의 메시아는 일반 역사 속에서 그의 “폭발적”이고 자유케 하시고 해방시키시는 역사를 창조해 나가신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죽음의 악순환”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길들”이라고 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와 연쇄적으로 고리를 물고 있는 (1) 삶의 경제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빈곤의 악순환’, (2)정치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힘의 악순환’, (3) ‘인종적, 문화적 소외의 악순환’, (4) 과학과 기술, 그리고 산업화에 따른 ‘자연파괴와 오염’, (5) ‘무감각성과 무의미성 그리고 하나님께 버림받음의 악순환’으로부터의 해방의 돌출들이 역사 속에서 일어난다고 하였다.

몰트만은 이와 같은 "해방을 향한 길들"의 다섯 차원 모두에서 해방이 일어나야만, 삶 전체를 억압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역사의 지평 속에서 분별되고 발견되는 하나님 나라의 파편들이요, 징표들이요, 표지판들이요, 미리 맛 봄들이요, 그것을 일구는 도구인 것이다. 파렌홀츠는 바로 이 시기의 몰트만('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저술한 시기) 신학이 방금 위에서 지적한, 보편사 속에서 발견되는 “메시아적인 파편들(messianic fragments)”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위에서 몰트만은 역사 차원에서 일어나는 교회 밖의 해방운동들에 대하여 주장하였거니와, 이 글은 교회 밖, 곧 인류 보편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의평화와 맞물려 있는 창조세계 보전 운동들 역시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봄이요, 징표요, 파편이요, 그 도구라고 본다. 예컨대, 1970년에 제정된 ‘지구의 날’, 1972년 유럽의 경제학자들과 과학자들과 기업인등으로 구성된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 같은 해 ‘스톡크홀름 회의’(유엔인간환경회의), 유엔환경프로그램(UNEP), 1983년 세계환경개발위원회, 1987년 ‘우리의 공동미래’, 그리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확정한 1995년 ‘지구정상회의’, 1997년 교토의정서 등은 오늘날 환경문제를 염려하는 초국가적 기구들로서 인류의 보편사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선교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1975년 나이로비 WCC의 JPSS와 1983년 벤쿠버와 'WCC와 서울 JPIC 대회’는 인류의 보편사 속에서 일어나는 정의와 평화와 창조세계 보전 운동들하고 연대하고 있다.

맺는 말

결론적으로 필자는 오늘 한국사회의 공적인 이슈들(public issues)을 칼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유비”(analogia)와 “비유”(parables), 그리고 생명공동체인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봄과 징표와 파편과 도구로서 ‘교회와 세상’에 조명하여 논하였다. 이 글은 필자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한국사회의 공적 이슈들을 여섯 가지로 보고, ‘교회와 국가’에 대한 기본적인 신학적 입장을 제시하면서, 이 여섯 가지 공공 이슈들에 대한 공적인 신학의 응답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1) 교회와 국가의 관계: 루터에게 있어서 국가의 존재이유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처럼 인류를 원죄로 인하여 야기되는 카오스와 무정부상태와 부정과부패로부터 보호(preservation)하는 데에 있었기에 그의 국가관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칼빈과 칼 바르트에게 있어서서는 국가관이 매우 적극적이었다. 칼빈은 역사와 창조세계가 하나님 아버지의 통치 밑에 있고, 교회는 이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분의 몸의 지체들로 보았으며, 또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 국가를 보았기 때문에, 루터보다 적극적인 국가론을 펼쳤다. 그리고 바르트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와 창조세계의 주님이라며, 교회와 국가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심원으로 하는 두 개의 원으로 보았고, 나아가서 이 ‘교회와 국가’를 주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봄으로써, 국가의 존재이유를 적극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칼빈도 제네바에서 그의 생애 끝 까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장로직을 통하여 교회와 국가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주장하였고, 특히 바르트는 국•교의 엄격한 구별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유비”(analogia)하여 적극적인 관계를 추구하였다. 우리는 칼빈과 바르트의 교회와 국가관계를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환언하면, 우리는 교회가 국가와 세상으로부터 분리하는 분리주의(16세기 과격파 종교개혁자들)나, 교회 밑에 국가가 종속하는 관계나 반대로 교회가 국가에 종속하는 관계나 교회가 국가화하거나 국가가 교회 화하는 관계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리를 지향하면서도 둘의 긴밀한 관계를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고난을 감수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어도 교회는 교회이고 국가는 국가이다. 장로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소망교회의 장로이다. 무엇보다도 장로는 장로교 헌법에 따라서 그리고 개교회의 내규에 따라서 해당 개 교회와 노회와 총회에서 요청되는 모든 의무를 수행해야 하고, 한 나라의 대통령은 장로라는 교회적 신분과 관계없이 대한민국의 헌법과 실정법에 따라서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나라가 요청하는 모든 의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대통령이 해야 하는 고유 업무들이 장로직 수행으로부터 영향을 받거나 장로로서 해야 할 업무들이 대통령직 수행으로부터 영향력을 받을 경우에, 혼선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으로서 혹은 서울 시장으로 장로가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을 나라 차원에서 수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든지, 어떤 공직자가 부하 직원들에게 복음을 전도한다든지 공적인 직무 수행 전에 공적인 기도를 한다든지 하는 일들은 그와 같은 혼선의 예증이 될 것이다. 헌법에 국교분리가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아직 헌법이 확정되기 이전인 1948년 대한민국의 처음 국회에서는 이승만 임시의장의 제의로 이윤영 위원이 기도함으로써 시작되었(그 기도는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로 시작하였다)(조선일보 2008년 9월 6일자)지만 말이다.

물론, 중세에서 19세기 초 까지 이어졌던 신성로마제국의 240명 이상의 영주들은 자기 영주국의 중앙에 영주를 위한 교회를 가지고 있었고, 서방교회의 중심인 로마에는 바티칸 대성당이 있으며, 동방교회 중심인 콘스탄노플에는 소피아 사원이 있고, 모스크바의 클레물인 안에도 정교회 성당이 있으니, 이는 신민이 모두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는 전제 하에 성립하였던 국가교회의 면모들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한국은 다종교 사회로서 이와 같은 기독교 국가와는 거리가 먼 것이 확실하다. 

2) 남북의 대치상황: 테러와 전쟁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하고, 불가시적 폭력과 정의 없는 평화를 거부해야 하며, 정의와 평화를 전제하는 창조세계의 회복과 지구생명 공동체 추구에 힘써야 하는 우리는 그 어떤 폭력이나 전쟁을 통한 남북통일도 거부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인류 및 지구 생명 공동체를 자신과 화해시키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내재적(immanent Trinity) 코이노니아와, 인류 및 모든 창조세계와의 경세적(economic Trinity) 코이노니아를 누리기를 원하시며, 종말론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만유가 함께 어우러지는 영원한 코이노니아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몰트만).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고후5:19)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자신과 화해하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창조세계 전체와도 화해하시기를 원하신다(칼 바르트). 이 화해의 하나님은 우리 남한과 북한의 화해를 원하신다. 그의 십자가로 유대교 기독교인들과 이방 기독교인들의 담을 허물어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엡2:13-18)는 모든 인류가 하나 되기를 원하시고, 인류와 지구 생명 공동체가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생명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역사로 다(多)이념, 다(多)종교, 다(多)문화, 다(多)가치의 사회 속에 화해와 코이노니아를 육화시킬 것을 계시하시고, 그것을 실현하고 계심을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의 이념과 문화와 삶의 스타일이 우리의 그것과 매우 상이할지라도 이들과 화해하고 코이노니아를 나누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된 뜻임을 확신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요구하는 “다름”과 다원성과 “타자성”은 결코 화해와 코이노니아에 장애가 될 수 없다. 종말론적 샬롬 공동체를 선물로 약속 받은 교회 공동체는 평화적이고 정의로운 남북통일을 실현함으로써 자신의 소망을 좀 더 가시화 시켜야 할 것이다.

3) 남남 이념갈등: 오늘 우리 한국의 교회와 사회는 남과 북의 대치 상황에서 보수와 좌파라고 하는 이념갈등으로 국론분열을 경험하고 있다. 정치 영역은 물론, 교육과 문화의 각 분야가 이와 같은 갈등에 휩싸여 있다. 우리는 말씀의 자유와 말씀에 대한 선포와 증언의 자유에 유비(analogia)하여, 헌법이 정하는 국체의 정체성 안에서 자유롭게 여러 가지 이념들 표현할 자유가 있어서, 이와 같은 갈등은 상호 보완하여 나갈 때에 진정한 공동체 추구에 있어서 유익을 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이념으로 인하여 상대방을 정죄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정부의 헌법 하에서의 대립 갈등하는 이념들이 정의롭고(법과 질서), 각 문화권에서 상대적 주권과 자유를 누리며, 서로 섬기고, 평등과 다양성을 사회문화적으로 보편화시키며,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생각하며, 개인주의나 집단주의가 아니라 개인과 전체에게 모두 유익을 주는 공동체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갈 때에(칼 바르트의 “유비”이론) - 시장경제의 지구화의 병폐를 최소화하는, 자유 사회민주주의(a free and social democracy)가 이것에 근접할 것이다. - 우리의 남남 갈등은 우리나라에 크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the Republic of Korea)이라는 말의 “republic"이란 라틴어의 ‘res publica'에서 온 것으로서 ’공공의 일들“(the public things)라는 뜻이다. 나아가서 생명 공동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우리나라의 모든 영역들과 분야들이 서로 소통하는 그물망으로서 진정한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공동체가 될 것을 요청한다. 이와 같은 공동체 추구에 있어서 ‘정의와 평화와 창조세계의 보전“은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일 것이다.  

4) 시장경제의 지구화로 인한 양극화: 지구화는 오늘의 세계를 “지구적 차별정책”(global apartheid)으로 몰고 간다. 북반구와 남반구사이에, 가난한 나라들과 부자 나라들 사이에 빈익빈 부익부의 간격을 극대화시키는 지구화 시대에,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경제정의이다. 힘이 있고 가진 나라들을 더 잘 살게 하고, 힘없고 갖지 못한 나라들을 더 못 살게 하는 지구화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샬롬의 생명 공동체인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에 반하는 반 하나님 나라(anti-Kingdom)의 가치들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샬롬의 생명 공동체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 그리고 소외된 자들, 나아가서 가난한 나라들과 평등성과 상호 관계성과 상호 의존성을 의식하면서, 상호 연대(solidarity)하는 경제정의를 요구하고 있다(바르트와 몰트만). “샬롬의 생명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교회는 복음의 가치와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가 요청하는 경제생활을 해야 하고, 시민단체들과 연대하여 시장경제의 지구화에 맞서는 경제정의 실현을 위해서 힘써야 할 것이다. 희년 공동체(레위기 25장)는 선물로 주어질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교회로 하여금 이 땅 위에서 경제정의와 생태 정의를 실현할 촉구한다. “개발”과 관련하여 경제정의는 정치적 민주화와 더불어 창조세계의 회복과 지구생명 공동체 형성과 맞물려 있다.

5) ‘개발’과 환경파괴: 지구화로 인한 창조세계의 파괴와 지구생명 공동체의 해체는 경제 사회적 정의 및 평화문제와 맞물려 있다. 지구자원의 고갈과 이상기온은 모더니즘적 거대담론인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자본주의의 결과이다.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적인 식민지주의와 신식민지주의와 같은 모더니즘의  정치적 경제적 부정의는 전쟁과 보이지 않는 폭력을 통해서 인류사회의 평화를 깨뜨려 왔고, 창조세계를 마구 파괴해 왔으며, 지구 생명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다. 창조세계와 지구 생명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은 인류사회의 지속 가능성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이 양자 간의 균형을 깨뜨리는 “개발”은 인류와 모든 생명체들을 파멸로 몰고 갈 것이다. 종의 다양성과 자연의 조화로운 다양성을 축소시키는 자연과학과 기술에 의한 “개발”과 생명공학이야 말로 인류와 지구 생명 공동체 모두의 행복을 파괴할 것이다. 대운하 사업역시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나가는 교회는 이 땅 위에서 인류사회(역사)와 지구 생명 공동체(우주)가 함께 어우러지는 샬롬 공동체를 구현해야 할 것이다. 은혜의 약속에 따라 선물로 주어질 종말론적 샬롬 공동체를 소망하는 교회는 정의와 평화와 창조세계가 보존되는 샬롬 공동체를 이 땅 위에서 실현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같이 장차 지금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질 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6) 다문화 다민족사회: 정보화 문화와 멀티미디어 문화와 대중문화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를 위해서 순기능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으나, 그 역기능과 폐해 또한 만만치 않다. “단일문화”(monoculture)를 지향하고, 다(多)문화와 다(多)가치의 사회를 시장경제로 획일화시키는 지구화는 각 나라와 각 지역의 문화와 가치와 종교의 “다름“과 다원성과 ”타자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우리는 다국적 기업들의 시장 경제 논리와 정보 혁명이 초래하는 문화와 가치의 축소주의에 맞서서, 우리의 고유한 문화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고, 다(多)문화와 다(多)가치의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을 일구어 나가야 한다. 복음과 복음을 통해서 계시되고 약속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고 있는 교회는 우리 한국의 고유한 문화 속에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문화화(inculturation)해야 하고, 다른 나라와 민족의 다문화 다가치의 사회 속에도 그것을 문화화해야 할 것이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라는 통일성의 축은 초문화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는 바, 이것이 다(多)종교와 다문화와 다가치의 사회 속에 문화 화되어야 한다. 복음을 믿고, 복음,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계시되고 약속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나가는 교회는 문화 속에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항상 다시 육화시키는 대행자(agent)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대행자로서 이 땅 위의 모든 문화들과 종교들 속에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구현해야 할 것이다.

7) 교육문제: 우리는 바르트가 제시한 “유비”(analogia fidei)의 예들과 “생명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로부터 교육의 기본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성자)이 성육신하시어, 우리의 참 이웃이 되시어 참 인간이 되게 하심 같이, 우리는 참 인간이 되게 하는 교육을 해야 하고,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인류 칭의를 믿음으로 받아들려 일어나는 이신칭의에 근거하여,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교육을 해야 하며, 셋째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교역에서처럼 우리는 사회적 약자를 최우선시 하는 교육정책을 펼쳐야 한다. 넷째로 은혜의 말씀과 성령과 사랑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아 자유를 누리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우리는 각 문화권이 상대적인 독립적 주권과 자유를 누리는 교육을 해야 하고,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본성에 유비하여 우리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넘어선, 개인과 전체가 함께 유익을 누리는 공동체 교육을 해야 하며, 여섯째로 세례와 은사의 다양성에 근거하여 평등교육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하는, 하지만 공동체를 지향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 일곱째로 말씀의 자유와 말씀에 대한 증언의 자유에 근거하여, 언론의 자유와 각 문화 영역들에서 상대적인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교육을 해야 하며, 여덟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처럼 이웃을 섬기는 교육을 해야 하고, 끝으로 교회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와 문화의 에큐메니즘을 추구하는 교육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교육이 본문에서 제시한 생명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 추구에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교회와 기독교인들. 특히 기독교 정치인들은 이와 같은 신학적 주장에 근거한 바람직한 교육의 방향을 법제화하는 일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8) 공적 신학의 다양성과 통일성: 이 글은 “Ⅰ. 공적인 신학의 이해와 접근방법의 역사”에서 공적인 신학이 다양하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공적인 신학들의 파노라마와 퍼레이드로 만족할 것인가? 그것의 통일성은 무엇인가? 우리는 ‘신앙과 직제’ 전통을 통하여 교회일치 모델들의 대전제는 “다양성 속의 통일성”(unity in diversity) 혹은 “다양성 속의 코이노니아”(koinonia in diversity)라고 하는 사실과, 이것의 근거로서 신학의 “다양성 속의 통일성” 혹은 “다양성 속의 코이노니아”가 요청됨을 알고 있다. 적어도 이 글은 “생명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고 “생명 공동체로서 교회와 세상”을 모든 신학들의 통일성으로 본다.

모든 교회들의 다양한 신학들은 통일성과 코이노니아를 추구하면서 샬롬의 생명공동체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신학의 목적과 기능은 교회와 세상으로 하여금 샬롬의 생명공동체를 추구하게 하고, 그와 같은 추구를 반성케 하며, 그와 같은 추구를 다시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의 신학이다. 그래서 신학의 목적과 기능은 말씀의 삼중성과 화해의 복음을 표준으로 케류그마, 리투르기아, 다다케,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를 통한 교회의 말과 행동을 반성하고 그것이 그것 되도록 하기 위한 것(칼 바르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을 보전하고, 정의와 평화가 강같이 흐르는 세상을 만들며, 국가와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려는 교회와 세상의 말과 행동을 반성하고 그것이 그것 되게 하는 신학이다. 따라서 신학은 말씀을 섬김으로 교회의 기능들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섬김으로 창조세계와 세상과 국가가 함께 어우러지는 생명 공동체를 섬겨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교회 혹은 보편교회(the catholic church)의 공적인 신학(고대 에큐메니칼 신조들, WCC의 모든 문서들에 나타난 신학, 각 개신교파들의 신앙고백들, 그리고 이것들에 근거한 공적 신학들)에 입각하여 개교회의 공교회성과 개별 신학자들의 신학의 공공성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인류와 지구생명공동체가 살고 있는 전(全) 오니쿠메네의 공적인 이슈들을 대상으로 신학을 펼쳐야 할 것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신학은 교회의 일들만을 위해서 기능(機能)하는 것(칼 바르트)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그리고 구현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능한다. 몰트만은 이렇게 말한다.

  신학은 또한 하나님 나라의 기능으로서 사회 안에 있는 삶의 정치적, 문화적, 교육적, 경제적 및 생태학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정치신학과 문화신학, 생태신학과 자연의 신학에서 보여 질 수 있다. 이 모든 영역들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사회의 공적인 일들(res publica)에 참여하는 공적인 신학(public theology)이다. 바로 이 신학은 공적인 일들을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시각에서 보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그리고 예언자적으로 참여한다.

몰트만은 “모든 삶의 영역들을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로 정위시키고, 나아가서 이 모든 영역들을 이 하나님 나라에 상응하도록 변혁시킬 것”을 강조한다. 몰트만에게 있어서는 역사의 여건들 속에서 “모든 삶의 영역들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義)에 모순되는 조건들도 포함하고, 그것에 상응하는 조건들도 포함 한다.” 몰트만은 하나님 나라에 상응하여 변혁되어야 할 “공적인 영역”(public sphere)의 초점을 “한 주어진 사회의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및 약한 자들”에 두면서, “유치원들, 학교들, 종합대학들, 신문들, TV, 교육기관들과 서비스 기관들”의 변혁도 언급하였다. 그런 즉, 몰트만에게 있어서 공적 신학의 궁극적인 표준은 하나님 나라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리고 몰트만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은 역사 차원의 생명과 우주 차원의 생명 모두를 아우른다.

이형기 교수 (Ph.D. 장신대 명예교수, NCCK 신앙과 직제위원회 위원장)

기사제공: 아폴로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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