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고 강원용 목사 설교] 살아있는 믿음

2003년 6월 15일 경동설교

 
구약의 말씀: 하박국 2:2 ~ 4

   주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서신서의 말씀: 골로세서 1:15 ~ 17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만물이 그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의 안에서 존속합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22:31 ~ 33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두고서는 말하면서, 너희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느냐?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무리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다.

 

제가 경동교회에서 설교를 한 지가 58년이 됩니다. 그 동안 비교적 다른 사람들보다는 정직하게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직하면서도 대단히 삼가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도 말썽이 참 많았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할는지 모르지만, 제가 제 얘기가 아니라 칼 바르트의 말, “지옥은 우리 앞에 있는 게 아니다. 이미 뒤에 있다”라는 말을 한 것 때문에 온 기독교신문과 전국 교회에서 “지옥은 없다, 강원용 목사 설교” 해가지고 굉장히 떠들썩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저는 굉장히 삼가면서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사도바울이 ‘너희들은 언제까지 젖을 먹겠느냐? 다 컸으면 단단한 것을 먹어야지 아직도 젖 먹을 생각만 하느냐?’ 하는 얘기를 했는데, 단단한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교인들이 배탈이 날까 봐서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여러분 가운데에 배탈 날 사람이 있을 것을 각오하고 좀 단단한 음식을 주려고 합니다. 걱정은 되지만, 박종화 목사가 배탈은 잘 고치는 사람이니까, 그걸 믿고 얘기하겠습니다.

우선 여러분이 지금 21세기에 사는 사람들인데, 성서 창세기 1장 1절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엿새 동안에 창조했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 사람을 만들었다, 하는 그걸 믿습니까? 만약 요사이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그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건 아주 무식한 사람이든지, 아니면 대단한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을 죽인 세력은 이방인이 아니고 유대인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이 죽였습니다. 왜 죽였느냐? 왜 죽여야 되었느냐?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면 절대로 세상의 메시아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세상에 살게 한 것은 지옥의 땔감으로 쓰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민사상에 예수님은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이런 예수의 태도에 유대인들은 격분했던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박국서를 보세요. 그저 길을 가면서도 읽고 누워서도 읽고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저놈을 어떻게 죽일꼬’ 하는 얘기를 복음서에서 찾아보세요. 전부 예수가 율법을 어길 때 어떻게 죽일꼬 하고 모의했습니다. 특별히 제일 소중히 지키는 안식일 법, 간통죄, 그런 것에 도전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죽일 이유는 이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곧 성전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성전을 숙청한 것을 놓고 사람들은 성전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성전을 깨끗하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제 스승인 볼테르는 ‘그게 아니다. 성전의 정결을 없애 버린 것이다’라고 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집이니까 영원히 있을 것이다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뭐라 하셨어요? ‘이 집은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새 성전을 세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건 어디서 잘 나타나느냐 하면 오늘 읽은 마태복음에서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시대가 오면 이삭의 시대의 하나님이고 야곱의 시대가 오면 야곱의 시대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현장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지, 아브라함 때에 딱 멈춰 버린 그런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시간이 없어 긴 얘기를 할 수 없습니다만, 소위 70년대 운동권 기독교인들이 성서 중의 성서로, 밤낮 말하던 것이 누가복음 4장 16절부터 21절입니다. 자세히 읽어보세요. 이사야서 35장에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35장과 누가복음 4장을 비교해서 읽어보세요. 예수님이 고쳐 버렸습니다. 이사야서에 있는 말을 빼 버리기도 하고, 없는 말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했느냐면, 오늘 이 말씀입니다만,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서를 읽을 때, 오늘 현재 살아 있는 말씀으로 읽지 않으면 그건 죽은 언어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오늘 여기서 읽고 만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유대교 모슬렘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인의 반 이상은 유대교 신자이고 모슬렘 교도입니다. 구약을 그대로 믿는 게 모슬렘 아닙니까? 우리는 구약을 예수님을 통해서 읽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유대교 신자가 되고 맙니다.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까, 배탈 나기 쉬운 얘기지만, 말해 보겠습니다. 십계명을 믿습니까? 에밀 부룬너는 이미 1920년대에 십계명을 믿는다는 것은 A형의 혈액을 가진 사람에게 E형 혈액을 수혈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 살던 때, 법률도 없고 제도도 없고 그런 때에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인데, 오늘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다른 형의 피를 수혈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예배시간에 사도신경도 읽습니다. 지난주에는 성공회에서 와서 니케아신조를 읽었습니다. 읽는 것에는 반대를 하지 않는데,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역사적인 결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니케아신조와 사도신경이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아세요? 그것은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서 격론을 벌이고, 찬성파도 있고 반대파도 있는 가운데 투표를 해가지고 결의를 하고서 반대한 사람은 다 처형해 버리고서 만든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지도자들이 모여서 만든 것입니다. 그걸 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요? 이런 얘기를 하자면, 제가 좀 신경과민인지는 모르지만, 지나친 얘기를 하면 정말 배탈이 날까 봐서 더 얘기를 할 수 없습니다.

제 얘기를 이렇게 꼭 해석해 주십시오. 내가 지금 나이가 여든 여섯입니다. 그런데 10살 때 내가 지금도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10살 때의 모습으로 다니면 주책이죠. 난 여든 여섯의 사람으로 삽니다. 그렇게 살지만, 내 속에 10살 때의 강원용도 있는 겁니다. 어느 시점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사건, 그것은 버리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오늘에 재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오늘 예배시간에 우리가 시편을 읽었습니다. 시편을 왜 읽습니까? 시편 속에는 굉장한 얘기들이 나옵니다. 하나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다 처벌할 것이고 등등……. 그런데 우리가 왜 읽습니까? 시편은 예수님이 사시던 그때 성전 예배 때에 신도들이 읽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걸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한마디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믿는다는 것, 우리의 신앙은 내가 숨을 쉬고 있는 현재, 여기서 살아 계신 하나님, 살아 있는 예수를 믿는 겁니다.

여러분에게 잘못하면 소화 안 될 얘기를 하나 더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하나님 얼굴이 보입니까? 하나님 얼굴이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떠오르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그림! 그러나 그건 예수의 모습이 아닙니다. 화가가 상상해서 그린 그림입니다. 하나님은 성서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나는 너희를 초월해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왜 머릿속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만들어 냅니까? 그리고 도대체 믿는다는 게 뭡니까? 성서에 있는 모든 이야기를 역사 속에서 살아 있는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극히 잘못된 것 중에 두 가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율법학자가 와서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너는 율법학자인데 그것도 모르냐?” “예, 율법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됐지? 뭘 물어보냐?” “하나님은 알겠는데 이웃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얘기를 합니다. 길가에서 피 흘리는 고난당한 사람을 돌보는 사람, 그 사람은 제사를 지내는 종교지도자도 아니고, 레위 사람인 교회 장로 집사도 아니고, 개라고 보고 지옥의 땔감으로 보는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회를 처음 세울 때에 바로 그 사마리아 사람을 본받는 교회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교회를 세울 그 당시에, 불한당을 만나 피 흘리던 사람이 누구였느냐 하면, 첫째로 3.8선이 깨어진 뒤에 사회적으로 뿌리 뽑힌 사람들, 학비도 없이 고생하는 학생들,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인 지금은 우리가 돌보아야 할 피 흘리고 있는 이웃은 누구냐? 제 얘기를 듣고 그대로 따르라는 말은 아닙니다. 잘못되었으면 저를 씻어내어 주십시오. 저에게는 상처받고 피 흘리는 내 이웃은 우선 많은 사람들, 물론 많은 사람들입니다. 바그다드에서 피 흘리고, 이북에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여러 번 얘기했습니다만, 바그다드 사람, 이북 동포, 단지 그들만이 아닙니다. 바로 살아 계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있다 그겁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에 굶주린 자와 함께 있고 헐벗은 자와 함께 있는 나, 바로 나를 대하는 것이 그들을 대하는 거라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 피 흘리고 있는 내 이웃은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수없이 죽어가는 동물들, 수없이 죽어가는 생물들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 대지가 다 피 흘리고 있고, 공기가 다 피 흘리고 있고, 물이 다 피 흘리고 상처받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다 길가에 피 흘리고 있는 이웃입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특히 최근 몇 년 사이에 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어려서부터 가장 감동을 받고 정말 마음속으로 모셨던 아시스의 성 프랜시스는 훨씬 전에 이미 그랬습니다. 만물들, 심지어 저 흘러가는 구름 속에 흘러가는 물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날아가는 새와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내 사랑하는 자매 새들아, 내 사랑하는 자매 구름아!” 하고 노래했습니다.

저는 그분을 좋아하면서도, 그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그것을 절감합니다. 지금 대지가 얼마나 아픕니까? 아픈 소리가 안 들립니까? 밀렵꾼 때문에 사라져가는 생물들의 신음 소리가 안 들립니까? 저는 이런 점에서 이번에 새만금 사건에 개신교 목사와 카톨릭의 신부와 불교의 스님이 새만금의 아픔을 안고 거기서부터 이 먼 길을 삼배 삼보, 무릎을 꿇고 무릎이 다 터져서, 그 아픔을 안고 온 것을 놓고, 사람들이 새만금 찬성, 반대, 너절한 소리들을 하고, 왜 종교인이 정치에 개입하느냐는 시시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정치에 개입한 겁니까? 아파가는 대지, 신음하는 그 대지의 아픔, 수없이 죽어가는 생물들의 아픔, 그 아픔을 보고 견딜 수 없으니까, 내 몸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삼배 일보로 무릎이 터지면서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그 아픔을 느끼고 있느냐 없느냐, 환경운동에 참가하고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고, 그것을 내 상처받는 내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런 생각을 안 가질 수 없지 않습니까?

둘째로,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마태, 누가, 마가, 요한복음만 많이 읽으면서 사도들이 예수를 뭐라 했느냐 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골로새서 1장 15절부터 17절을 보세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말구유에 태어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승천하신 분만이 아닙니다. 우주만물이 생기기 전에 우주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생겼고, 우주만물을 살리시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 모든 만물 위에 있고 그 가운데 있는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눈앞에 피어 있는 꽃송이 속에서, 여기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예수님을 봅니다. 바로 저속에 하나님이 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전 우주를 위해 태어나 전 우주를 위해 죽은 그리스도를 정말 오늘 믿는다면 기독교가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 교회들이 성장하느라, 부흥하느라 야단입니다. 교회들을 세워 돈을 긁어모으려고 애를 쓰고, 확장하려고 애를 씁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원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란 뭐냐? 벌써 1950년대 WCC, 세계교회협의회 신앙연구회에서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있는 교회라고 선언했습니다. 교회는 지금 그리스도가 돌보는 이 세상을 위해서 있습니다. 21세기에 가서는 우리 선교의 대상은 우주가 될지 모릅니다. 이 큰 우주! 그러나 현재는 적어도 지구, 지구가 우리교회의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으로만 끌어들이고 자기 세력만 확장시키려고 하는 것이 어떻게 교회입니까? 이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면, 중세기 시대의 유럽교회입니다.

이번 기독교장로회 50주년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독교장로회가 어떻고, 예수교장로회가 통합을 하고 어쩌고! 지금 장로교들끼리 합하자 어쩌자 해서 뭐하자는 겁니까? 장로회란 것이 무엇입니까? 오백 년 전에 칼뱅이라는 사람이 만든 겁니다. 루터 교는 루터에 의해 나왔고, 감리교회는 영국 웨슬리에 의해서 나온 겁니다. 그 당시의 그 상황에서 나온 것이고, 그들은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왜 우리가 그걸 가지고 이러는 겁니까? 다시 말하지만, 옛 역사 속에서 루터교회는 15세기 16세기에 죽었습니다. 감리교회? 그것도 죽었습니다. 21세기에 왜 그걸 붙들고 나가냐는 겁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간곡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내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내가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는 죽은 예수가 아니고 산 예수입니다.

이런 참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나는 죄인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왜 하느냐? 나는 나 자신이 죄인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사랑을 도무지 살아내지 못하니까. 벌컥 화도 내고, 누가 섭섭하게 하면 속이 끓고. 나는 내 죄인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현실 속에서 살면서 ‘저 사람은 얼굴만 봐도 잘 믿는 사람이다.’ 하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렇지 않았지요. 예수의 별명이 뭔지 아세요? 죄인의 벗입니다. 죄인의 벗! 구체적으로는 창녀와 세리의 벗이에요. 그런데 창녀와 세리에게 ‘너 회개하고 하나님께 매달려라’고 한다면, 그게 스승이지 벗입니까?

그럼 그 예수를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하는 겁니까, 대체. 저는 이런 마음을 가진지 여러 해입니다만, 삶의 현장에서는 자꾸 넘어집니다. 넘어지지만, 저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구별 없이 넘어질 수 있다. 그런데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뭐냐? 믿는 사람은 여러 번 넘어져도 일어서지만, 믿는 사람은 일곱 번 넘어져도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다.”
여러분 이것도 배탈 날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사실 죄가 없습니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을 때, 내 죄는 이미 사해졌습니다. 루터가 뭐라 했습니까? “진짜 신자가 되려면 대담하게 죄를 지어봐라. 그래야 용서라는 것도 뭔지 알지 않겠느냐?” 내가 회개를 하면 죄를 사한다는 말은 부흥회 전도하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회개를 하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저는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살기 때문에, in spite of, 내 허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용서받은 기쁨으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일으켜주신 분의 손에 의해서 용감하게 살아가는 그것이 살아 있는 믿음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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