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25 : 7 ~ 8
주님, 주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의 길을 곧게 트이게 하십니다. 의로우신 주님, 주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의 길을 평탄하게 하십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의 율법을 따르며, 주님께 우리의 희망을 걸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사모하고 주님을 기억하겠습니다. 아멘.
서신서의 말씀: 요한1서 3:14 ~ 18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 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아멘.
복음서의 말씀: 요한복음서 20: 19 ~ 21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아멘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제 설교가 없다 하더라도 성찬예식, 세례식을 거행하고, 성가대의 합창을 다 들으려고 하면, 평소의 예배 시간보다 훨씬 늦어질 것입니다. 사실 교회 축제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크리스마스가 아니고 부활절입니다. 제가 참석한 러시아 정교회의 부활절 예배는 네 시간 반이 걸렸습니다. 밤 12시에 시작해서 보통 새벽 4시쯤 끝납니다. 축제임을 기억하고, 이 축제를 시간에 제한받지 말고 축제답게 지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설교를 길게 하겠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한마디로 말한다면, 뭘 믿는다는 말입니까? 교회 나온다고 다 신자다, 그렇게 볼 수가 없습니다. 제 얘기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분명하게 고린도전서 15장 7절에서,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믿지 않는 거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부활을 믿는 것이 참으로 믿는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사건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성서의 기록을 가지고도 부활에 대한 얘기를 정확하게 해낼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에 대한 신앙도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만일 제가 여러분에게 종이를 나눠주고, “당신이 믿는 부활이 무엇인지 적어 주십시오.” 하고서 다 모아 본다면, 결코 같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저도 이 짧은 시간에 여러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부활을 어떻게 믿느냐 하는 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말하는 그대로 믿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서 부활절 설교를 한 지가 6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약 60년간의 설교 원고를 살펴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상당히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앞으로 얼마를 살지는 모르지만 또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이런 점을 여러분이 이해하시고 잠깐 동안 내가 생각하는 것을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는 과거 사람들이 몰랐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우주가 얼마나 큰가를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의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약 천억 개의 별이 모여서 한 개의 은하계가 되는데, 그런 은하계가 천삼백억 개 이상이나 발견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이런 매크로 코스모스만 아닙니다. 이 자리에 서 있는 저나 앉아 있는 여러분의 몸속에 수십조 개의 세포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미시의 세계, 이것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기가 막히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저는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요사이에 다시 다윈의 진화론이 얘기되고 있습니다만, 원숭이가 사람이 된 예를 한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가 막힌 창조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분명히 성서에 기록된 대로 태초에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럼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했느냐? 무슨 수로 창조했느냐? 그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무한대의 파워로 이 큰 우주에서부터 내 몸 속의 작은 세포, 상상할 수 없이 작은 것까지 만드셨다. 이 모든 것은 그분의 창조이다.
이 창조는 사랑에 의한 창조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창조 속에 죽음이 생긴 것은 분명히 사람의 탐욕, 욕심 때문입니다. 나도 하나님처럼 되어 보려는 욕심에 의해서! 이런 탐욕으로 생명은 죽음으로 변해지고, 사랑은 미움과 질투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생명이 지배하는 나라가 죽음의 나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것이 카인과 아벨의 역사입니다. 아벨은 죽었고 카인만 남았습니다. 동생을 죽인 카인의 후손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을 하나님은 다시 창조하셨습니다. 그 두 번째 창조는 그 하나님이 직접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그 예수님의 짧은 삶은 한마디로 말하면 완전히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예수라는 이름 대신에 “Man for Order,” 남을 위해 산 존재라고 불렀습니다. 그 사랑의 극치가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타납니다. 이 우주만물을 창조한 원대한 사랑을 우리는 전혀 몰랐는데, 그것을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십자가의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였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뭐란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 일서 3장 16절의 이야기입니다.
이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바로 생명이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너희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다.” 이 죽음의 나라에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기 위해서 그는 갖은 고난을 겪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 예수의 부활은, 죽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이지만, 이 죽음보다 더 큰 힘은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사랑이 죽음을 끝장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4절 이하에서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 죽음의 나라가 생명의 나라로 바꾸어졌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로 산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여전히 죽음의 나라 안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미 생명의 나라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뜻입니다. 예수로부터 온 그 생명은 어디 있느냐? 내 안에 들어와 있고,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 이것을 고린도후서 4장 10절 이하에서 명백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생명이 죽어 가는 내 삶 속에, 바로 지금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말로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신앙 없이 이 자리에서 성찬을 받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신앙이 없이 받는 이 떡과 잔은 단순한 음식에 불과합니다. 목사님은 여러분에게 이 떡을 나눠 줄 때, “이것은 너희를 위해 찢긴 내 몸이니 먹어라. 이 잔은 바로 너희를 위해 흘린 내 피니 마셔라.”라고 합니다. 어떤 때에 우리가 떡과 포도주를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의 살이라고 먹고 피라고 마십니까? 신앙을 가질 때입니다. 죽어 가는 내 삶 속에 예수의 부활이, 생명이 들어왔다는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앙의 사인(sign)은 뭐냐? 아까 요한일서 3장 14절을 보면, 내 속에서 미움과 탐욕이 이제는 사랑과 평화를 위한 삶으로 바꿔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교회에 나오고 성찬을 받고 부활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내 속에 아직도 미움이 그대로 있고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미움이 내 속에서 움직이는 한 나는 살인자다 그 말입니다. 성서에 있는 얘기입니다. 살인자가 어떻게 생명을 논할 수 있느냐? 생명을 빼앗는 자가 어떻게 생명의 세계에서 살 수 있느냐? 이것이 오늘 성서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사느냐? 우리는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중세기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20세기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이 21세기에는 죽음의 세력, 죽음을 만드는 세력이 이 지구에서 지배권을 가지는 시대가 끝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구의 생명이 끝나 버릴 것입니다. 이 환경 파괴의 세력이 정지하지 않는다면, 22세기의 역사는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21세기만은 정말 평화의 세계가 오기를 원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21세기는 전쟁으로 시작했습니다. 9.11 테러에서부터 시작되어서, 결국 부시는 테러를 없애 버리겠다며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부시는 작은 테러를 큰 테러로 바꿔 버렸습니다. 대량살상무기를 없애 버리겠다며 이라크 전쟁을 벌인 부시는 가장 큰 대량살상무기를 바그다드에 쏟아 부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자유를 위하고 해방을 위한다고 세계에다 막 큰 소리를 쳐봐야, 이라크의 석유에 욕심을 낸, 그 욕심에 의해서 만들어진 전쟁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현실 속에서도 가장 기가 막히고 두려웠던 것은, 죽음이 바로 지구 전체로 퍼지고 있는 이 기가 막힌 상황을 미국의 CNN이라는 텔레비전은, 또 그것을 전해 받은 한국의 텔레비전은 작년에 월드컵 때 방송하던 것과 아주 비슷하게 방송했다는 것입니다. 바그다드에 폭탄이 터지면서 확 불이 오르는 것을, 공을 “슛” 하면 “와” 하고 소리 지르는 것과 같이 그렇게 방송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내가 더 기가 막힌 얘기를 한다면, 서울 시청 앞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반대하기 위해서 모여서 떠들어댄 바로 그 기독교 신자들이 오늘 아침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런 기가 막힌 세상에서 오늘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죽음이 현실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이라크의 전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웁니까? 이 이라크 전쟁으로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이제 이란 시리아 북한 어디로 갈지는 모르지만 갈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한반도로 올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부활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저는 이번 바그다드 폭격을 보면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저것을 어떻게 보고 뭘 하실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무서운 죽음의 무기가 온 하늘을 뒤덮는 가운데 아무 죄 없이 손과 발이 잘린 어린아이가 미국에서 치료를 해준다고 하니까, 나를 이렇게 만든 미국에는 갈 마음이 없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손과 발이 없는 그 아이의 눈물 젖은 얼굴 속에서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예수님의 얼굴을 봅니다. 이것이 제게는 분명히 현실입니다. 왜 그런가? 성서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네 앞에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 내가 그 안에 있다. 병들어 죽어 가는 그 사람 속에 내가 있다. 죽음이 지배하는 이런 세상 속에서 내가 굶주리고 병들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무서운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계 속에서, 정말 죽어 가고 매 맞고 있는 이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이것이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태도가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에 나타납니까? 오늘 요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무서워서 문을 꼭꼭 닫고 숨어 있는 곳에, 문도 안 열고 불쑥 나타납니다. 거기에 모인 제자들은 예수가 처형당한 것을 무서워하며, 자기들도 죽게 되지 않을까 무서워서 숨었습니다. 그 가운데 나타나셔서 “너희들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려고 왔다”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유령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자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너희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죽은 예수다.” 부활하신 예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의 현실,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평화가 없는 현실, 죽음만이 눈앞에 보이는 세계, 미움과 약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피할 곳을 찾아 모여 숨어 있는 바로 그 한가운데에 오십니다. 지금도 오십니다. 오늘도 오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부활은 소생이 아닙니다. 소생이라면, 어떻게 잠겨져 있는 그곳에 불쑥 들어올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은 살아 계실 때의 그분과 다른 유령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손에 못 자국을 보라고 하고, 옆구리에 창 자국을 보라고 하는 바로 그분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한 예수의 모습입니다. 그가 바로 우리 안에 와서 평화가 실종된 우리 속에, 부시의 그 무시무시한 그 테러와 대량살상무기가 지배하는 이 세계 속에 와서 평화를 선포하고, “너희들을 위해서 내가 먼저 죽었다. 이제 생명의 나라에서 살아라.”고 하십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뭡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와서 “네가 정말 부활한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는다면 너랑 나랑 관계없지 않느냐?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구체적으로 내 어린 양을 돌봐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어린 양들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습니까? 한국 땅에서 어떻게 되어 있고, 지구 위에서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네가 나를 믿는다면, 내 어린 양을 돌보아 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뭘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부활절에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탐욕의 씨가, 그 죽음의 씨가, 살인의 씨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사죄를 받은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는 용서와 의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회개는 곧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 행동은 주님의 어린 양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찢기고 피 흘리며 죽어 가는 사람들과 굶주리고 목말라 죽어 가는 사람들 속에 있는 주님을 우리가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절을 지키는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내가 나이 많으니까 아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보다 내가 먼저 죽을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지 저는 모릅니다. 여러분 절대로 나에게 질문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거 모릅니다. 천당이 어떤 곳인지, 내가 가서 잘 침대가 어떤 건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하나는 압니다. 로마서 8장 39절에 나오는 것처럼,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압니다.
우리는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부활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있습니다만, 그분들이 지금 여기 우리와 같이 앉아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생명의 나라 안에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도 가고 여러분들도 가지만, 우리는 함께 있을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생명의 나라로 이미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믿는 우리만 아니라 전 지구가, 죽어 가는 지구가, 모든 피조물이 다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되는 날을 믿습니다.
생태학이란 것이 있지도 않고 공해니 환경이니 하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9절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이 죽음의 세력 안에서 신음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과 함께 참 생명이 지배하는 영광의 나라를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나라가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죽음의 세계는 그 모양까지 다 끝나고 오직 생명과 사랑만이 지배하는 바로 그 새 창조의 날을 향하여 우리는 지금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정말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살인자의 미움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서 정말 주님의 어린 양을 돌보기로 다시 한번 다짐하면서, 그 길이 어려운 것 같지만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다시금 생각하면서, 이 부활절의 복을 받도록 하십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