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누가 4:16-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21)
성경에 나오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의 판별기준은 그 예언의 말씀의 성취여부입니다.
설교문
예레미야는 당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예언을 했습니다. 바벨론과의 일전을 앞두고 모인 군대 앞에서 “너희들은 패배한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그가 살아남은 것이 기적입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반역으로 여겨졌습니다. 반면 당시 대부분 예언자들이 하나냐와 같이 낙관적 예언을 했습니다. “이미 1차포로 잡혀간 사람들은 곧 돌아오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우리 손에 붙이셨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는 예언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오죽하면 친척들마저도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겠습니까? 그는 시대의 천덕꾸러기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하나냐는 잊혀지고 외로웠던 예레미야는 최고의 예언자로 기억되게 되었다. 그것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역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99% 주류예언은 거짓예언자가 되었고 1%도 안되는 괴팍한 예언자 예레미야는 가장 큰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포로기 많은 예언자들이 자기들이 바라는 이상을 예언의 말씀으로 전했습니다.
에스겔은 회복된 나라의 이모저모를 구상합니다. 성전을 중심한 나라,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에 최우선 되는 나라, 토지 재분배가 이루어지고, 남북왕조가 통일되고, 목자와 같은 왕이 세워지는 새 나라에 대한 예언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예언대로 성취되지는 않았습니다.
제2이사야는 세계의 대권을 가진 고레스왕과 이스라엘이 만나 새역사가 일어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온 세계민이 섬기는 하나님으로 추앙받고 시온이 세계의 성지가 되어 당당하게 출 바벨론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골짜기는 메우고 산은 깎으면서 광야에 탄탄대로를 놓으면서 시온으로 돌아올 것을 예언했습니다.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포로민들이 귀환 명령을 받은 것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왕이 귀환 명령을 내린 고레스(Cyrus) 실린더를 보면 여전히 그는 마르둑신을 찬양합니다. 꼭 제2이사야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럼 이런 예언자들은 거짓예언자입니까? 사깃꾼입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자신의 사역에 대해 말씀 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550년 전에 선포된 희년에 이루어질 일들을 예언한 부분을 읽으시고 “이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언은 당대에 혹은 그와 가까운 세대에만 성취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언자는 꿈을 세웁니다. 그 꿈의 구체적인 실행여부에 억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지치고 실망한 민중들이 구체적인 희망에 부풀게 만들어 줍니다. 그 꿈이 가까운 시기에 꼭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 말씀은 죽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불꽃을 일으키고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게 합니다.
그 말씀은 수백 수천 년이 지난 다음에도 여전히 생명력있는 말씀입니다. 550년전 이사야의 말씀이 예수님 때에 와서야 ‘이제 이루졌다.’고 선언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예언자들의 선포는 이미 지나간 역사에 종결된 결과물들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 실현을 기다리는 진행형의 말씀입니다. 아직까지 너와 나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불꽃으로 생생한 예언자의 목소리에 실려 오늘 우리들에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암몬이나 모압과 같은 나라는 정치적인 파국과 더불어 그들의 국가 종교와 국가 신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데 비해 이스라엘의 신 야훼는 똑 같이 나라가 망했으나 오히려 전 세계적인 신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예언자들이 위기를 넘어서는 놀라운 상상력 때문입니다. 나라는 망했지만 그들의 예언처럼 오히려 변방의 나라의 신이었던 야훼는 바벨론과 페르시아 전 세계의 무대 한복판에 나서서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언은 한번 실행되고 이루어졌다고 해서 종료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언은 여전히 새로운 상황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말씀들입니다.
예를들어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다고 합시다. 이 말씀은 시대마다 다른 과제를 입고 나옵니다. 양반과 상놈의 신분제도를 타파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노예제 폐지를 위한 싸움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느 시대에는 의무교육의 권리를 확보하는 투쟁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특별한 계층만이 선택적으로 교육을 받던 시대에 누구나 다 교육을 받게 하자는 주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결사반대했습니다. ‘그 비용을 누가 다 감당하려고 그렇게 비효율적인 교육을 하려고 하느냐? 개나 소나 다 가르치냐?’ 면서 보수세력들의 반대가 매우 거셌습니다.
보통선거제도를 확보하는 것도 아주 힘든 싸움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선거 후보자들의 기호를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숫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 작대기 개수로 기호를 표시했습니다. 기호의 구별조차도 힘든 사람과 정치 분야의 박사와 똑 같이 한 표를 행사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공평하냐는 주장들이 힘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해 보이는 예언들이 우리 앞에 하나하나 현실로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논쟁, 투쟁이 수반됩니다.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남여의 성역할, 정규직 비정규직의 구분등 수많은 과제들이 예언의 과제로 남아있기도 합니다. 하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각 시대에 따라 수많은 과제로 옷을 갈아입으며 그 말씀을 완성해 나갑니다.
예수님의 선언은 갑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희년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 졌다는 징후가 아무 것도 없는 때였습니다.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의 힘이 쇠약해 졌다든가 민족적으로 어떤 희망의 사건이 보인다든가 하는 기대할 만한 징후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가장 암울한 시대적 징후 가운데서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예수님 시대는 가장 혹심한 상황이었습니다. 기근과 천재지변, 로마의 가혹한 착취, 유대 지도자들의 교만 속에서도 백성들은 누구하나 위로해 줄 사람 없이 단지 죄인으로 정죄받는 상황이 당시 민중의 삶이었습니다. 당시는 로마의 최전성기인 7황제의 한복판을 지날 때였습니다. 민중을 착취하는 로마 군대가 가장 활기차게 움직이고 조금만 불손한 태도가 보이면 누구나 십자가형에 취해지는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징조를 보시고 ‘희년의 예언이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선언 하신 것일까요?
아직 희년의 성취로 보이는 징후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 자신의 마음과 각오 속에만 존재합니다. 그의 마음에 품은 불꽃이지만 그는 그렇게 인정하고, 그렇게 선언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의 내적 확신이 가장 확실한 시대적 징후입니다. 낡디 낡은 시대에 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나오자 세상이 당황해서 그에게 십자가를 지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장 큰 희망의 징조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처럼 “아니다. 이 낡은 시대는 아니다.”라며 새 세상을 선포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각오와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굳 뉴우스입니다. 이천년 전 십자가에 대한 교리적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이미 뉴우스가 아닙니다. 복음은 여전히 오늘 우리들에게도 굳 뉴우스가 되어야 하며, 오늘 우리들을 그 굳 뉴우스를 만드는 일에 부름 받았습니다.
예언의 말씀들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불타올라 예수님처럼 “오늘 이 말씀이 이 자리에서 이루졌다.”고 선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