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고 강원용 목사 설교] 믿음으로 산다는 것

2002년 9월 29일 경동설교

구약의 말씀: 하박국서 2:1 ~ 2

   주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서신서의 말씀: 갈라디아서 2:20 ~ 21

   주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8:7 ~ 8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 주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9월 1일 주일에도 설교를 했으니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시키라고 했더니, 당회에서 담임목사가 외국에 나가면 명예목사가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는 설교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회원들께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가 언제까지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지난 9월 1일에 신앙은 점점 성숙한 경지로 가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얘기를 이어서 하려고 합니다. 그때 읽은 성서의 말씀대로 "네가 언제까지 아기들처럼 젖을 먹고살겠느냐, 이제는 단단한 음식도 먹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만,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할 때, 그것을 못 먹는 것도 문제지만, 아직 젖을 먹을 아기에게 단단한 음식을 주는 것도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수 믿고 교회 나온 지가 금년으로 71년째입니다. 그 동안에 제가 믿어온 것을 되돌아보면, 한자리에 머물러 있은 것이 아니라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변화는 결코 서로 모순이 되는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해서 안 되었지만, 점점 성숙한 경지로 들어왔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사이 교회에서 1945년부터 1962년 사이의 자료를 다큐멘터리로 만든다고 하는데, 그 시절에 제가 한 설교와 그 이후에 80년대에 들어와서 한 설교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생겨났는지는 자료를 조사해보면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모순이 아니라, 젖을 먹던 시절에서 단단한 음식을 먹는 시절로 바뀌어진 것뿐입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인데, 이 문제에 관해 71년 동안 제 안에서 상당히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제가 이 교회의 담임목사를 그만둔 것이 16년째입니다만, 담임목사로서 여기서 설교하던 때와 많은 차이가 있는 것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제 얘기가 혹 소화가 안 되어서 부작용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만, 건강이 허락하고 여러분이 좋아한다면 한번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신앙생활이 뭐냐 하는 것을 얘기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짧은 시간에 상당히 조심스럽지만, 이 정도는 아마 새로 나온 교인도 소화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꺼냅니다만, 혹 그렇지 못할 때는 양해해 주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뭐냐 하는 것은 구약성서의 하박국서에 잘 나타납니다. 하박국은 기원전 600년경에 살던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얘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하는 얘기입니다. 이 얘기가 신약성서에도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옳다고 하지만, 그러나 하박국서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박국이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을 때, 의인은 의로운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참된 의,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나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박국과 바울, 구약과 신약의 차이입니다.

구약에서 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시로 읽고, 그것을 밤낮으로 새겨서 그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의는 우리 사람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건 다만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의롭지 못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지금도 구약만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는 유대교나 모슬렘, 회교와 우리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박국에서 말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은 성서 말씀을 달리면서도 읽고 마음에 새겨서 그대로 사는 것! 그런데 신약성서에서는 그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에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셔서, 비로소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 외에는 안 된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이런 믿음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 기독교인데, 이 기독교가 결국 둘로 갈라졌습니다. 하나는 모스크바에서부터 에디오피아까지에 분포하는 동방정교회, 다른 하나는 로마를 중심으로 서방으로 이어진 카톨릭교회. 그런데 이 두 교회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정통이라는 것입니다. 동방정교회는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자기들만이 정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카톨릭교회에서는 거룩한 공회, 바로 그 보편적 세계의 교회가 하나이며, 그것은 바로 자기들의 교회라고 합니다.

이렇게 대립이 되어 왔습니다만, 그러나 결국 교회에서부터 믿음이 시작되므로, 교회에서 살고 교회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둘 다 꼭 같습니다. 서방의 카톨릭교회는 교황의 권위를 베드로에게서 찾았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 19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그리고 네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 땅에서 네가 열면 하늘의 천국 문이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그 반석 위에 세워진 것이 카톨릭교회이기 때문에 교황은 바로 베드로의 후계, 예수님의 대리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교황의 말은 절대로 틀림없고, 교황은 하나님의 대리자니까 절대 복종해야 하며, 이 교황이 내리는 조서에 복종하지 않거나 다른 해석을 하면 이단자이고, 이단자는 파문해야 하고 파문되면 지옥 가는 것이라고 하는 데까지 나가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이러한 것이 차츰 굳어지면서, 이단 토벌, 마녀 토벌이 계속해서 벌어졌습니다. 이단자와 마녀들을 죽일 때, 칼로 찔러 죽이거나, 총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총살을 하면 피를 흘리고 죽게 되는데, 피를 흘리고 죽는 것은 예수님처럼 죽는 것이니까 안 된다고 하여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화형을 시켰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교도는 힘으로라도 정복해서 믿게 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십자군 전쟁입니다. 인류의 전쟁 중에서 가장 참혹하고 잔인했던 전쟁은 기독교도들이 일으킨 십자군 전쟁입니다. 이런 중에 암흑시대가 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무 자유가 없습니다. 그저 교회를 쳐다보고 살아야 합니다. 교회 법에 어긋나면 지옥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사도신경을 읽고, 지난 성찬식에는 니케야 신조를 함께 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그것들은 하나님이 보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교회 신학자들이 모여서 만든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모여 그런 공동의 신앙고백을 만든 것은 좋은데, 문제는 그것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소위 반대파는 다 숙청해버렸습니다. 니케야신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수도원에서 수도하던 마르틴 루터가 고민을 하고 고민을 해서, 자기 몸이 불에 타서 재가 되어버리는 것 같은 고민 속에서, 로마서 1장 17절이 떠오르면서 이거다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교황의 말만 듣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개신교가 생겼습니다. 그 개신교 가운데 장로교도 들어 있고, 그 장로교 가운데 우리 경동교회도 들어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교황의 권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복종할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개신교는 교황을 내몰고 그 자리에다 성서, 신구약 성서를 앉혀 놓았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는 예수님이 "내 말이 너의 안에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로마서 10장 8절에 보면 "말씀이 내 입안에, 말씀이 내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믿는 것이다"고 합니다. 성서가 절대권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성서를 그대로 믿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개신교는 교황이 앉았던 자리에 종이로 만든 성서를 앉힌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과학 책이 아니고 상징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해석이 다르니 싸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화형까지는 안 갔지만 교파분열이 생겼습니다. 칼빈, 루터 등 분열이 생겼습니다. 우리 한국도 개신교가 여러 교파로 갈릴 뿐만 아니라, 장로교는 일흔 몇 개로 나눠져 있습니다. 이런 것이 과연 믿는다는 것이냐?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서라는 책은 지금으로부터 제일 늦게 쓰여진 것이 1천 9백년 전, 제일 빨리 쓰여진 것이 2천 8백년 전이나 되는 책입니다. 그때 중동지역, 특히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통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책은 아주 많이 쓰여졌습니다. 요사이 그것이 거의 다 발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성서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것은 기원후 4세기경에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서 이렇게 발견된 자료들을 쭉 펴놓고 그 중에서 몇 개 골랐습니다. 여기서 골라진 것이 정전(正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 버린 것입니다. 또 읽지도 못하게 했어요. 그래서 땅속에 묻은 것들이 지금 다 나오고 있습니다.

이 부분부터 여러분들이 잘못하면 체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만, 이 성서는 본래 있던 것들 중에서 많은 것을 뽑아버린 결과물입니다. 그의 좋은 증거 하나가 요한복음 8장 1절에서 11절까지의 단락 아래에 "어떤 사본에는 없다."고 쓰여 있습니다. 사본이 세 개입니다. 왜 없어요? 도대체 예수님이 간통한 여자까지 변호했다는 것을 성서에 집어넣다니, 도저히 덕이 안 된다, 빼버리자 한 거죠. 없던 것들을 집어넣은 것도 있어요. 교회를 위해서. 마태복음 18장 18절, 19절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카톨릭 교회의 터를 만드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교회를 베드로 위에 세우겠고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신 것, 그것은 마태복음에 본래 쓰여져 있던 내용이 아닙니다. 이것은 결국 교회를 위해서 집어넣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만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요한계시록을 성서에 넣을 거냐, 말 거냐? 야고보서를 넣느냐, 마느냐? 얼마나 오랫동안 논쟁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이 성서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을 그대로 믿는 것이 정말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려면 우리가 같이 공부해야 합니다. 내가 한 가지만 얘기를 드리겠습니다. 나는 사도 바울이 사도 중에 대표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사도 바울이 써놓은 글 중에 결코 찬성 못하는 것이 여러 개 있습니다. 세 가지만 얘기하겠습니다.

한 가지는 '빌레몬서'에 관한 것입니다. 빌레몬은 노예인데, 도망쳐 나온 이 노예를 달랩니다. "너의 주인에게 돌아가라." "내가 가면 벌을 받는데 어떡합니까?" "편지 써줄게 가라." 그래서 주인에게 노예를 돌려보내면서 쓴 글이 빌레몬서 아닙니까? 현재 우리는 노예제도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로마서 13장 1절에 "너희는 위에서 권세 잡은 자에게 순종하라.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는데, 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얘기가 있습니다. 여기에 내 결혼식 주례를 받은 사람이 많이 앉아 있습니다만, 저는 한국의 다른 목사들처럼 결혼식 주례 때 에베소서 5장을 읽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에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주님께 순종하듯 하라고 합니다. 여기에 동의해요? 찬성해요? 이런 성차별주의라니,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까? 그것을 쓴 사람과 생각이 같지 않다고 해서 믿지 않는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니케야신조니, 사도신경이니 하는 것을 존중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안 믿으면 신앙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친구가 하나 미국에 있는데, 장로로 뽑혔습니다. 장로시험을 치는데, "사도신경을 그대로 믿는가," "나는 그대로 안 믿습니다," "아하 장로 자격이 없다," 그대로 떨어졌습니다. 정말 그런 거냐 말이죠. 내 결론은 성서를 그런 식으로 읽는 것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3천 년 전에 중동지역 팔레스타인에서 쓰여진 이 글들을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느냐? 그것은 바로 그 성서를 통하지 않고는 예수가 누군지, 하나님이 누군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만"을 주장한 마르틴 루터는 "말씀으로만"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성서는 아기 예수가 누운 말구유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구유에 가지 않고는 예수를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아기를 보려고 말구유를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그 말구유에는 지푸라기도 있고, 오물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누운 아기 예수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루터의 말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야고보서를 성서에서 빼자고 했습니다.

이랬던 것이 우리 개신교 안에서 차츰 차츰 바리새주의와 같은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성서말씀을 그대로 믿으며, 거기에 의문을 가지면 안 된다고 하는 그런 광신적인 신앙은 결국에 오늘도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는 것입니다. 그 점이 바로 어디에 나타나느냐? 아까 읽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21절에 있습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나를 사는 것이 아니다. 본래 내 안에서 나를 다스리던 옛 나는 이미 자리를 비웠고, 이제 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 내가 지금 몸으로 살아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다. 만일 우리가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으면,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것을 헛된 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게 사도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고, 그분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뭐냐, 그분은 누구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예수의 전기를 쓰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전기로 써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안에 와 계신 그리스도를 믿느냐?

요한일서 4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냐?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랑을 알지 못한다. 행하지도 못한다. 헌데 그 사랑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은 예수 안에 나타났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났고, 예수는 부활해서 하나님의 우편에 가 있지만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다. 그걸 우리가 믿는 것이다." 그럼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그분은 누구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옛 나, 오만하고 잘난 척하는 그러한 나, 그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 안에서 내가 사는 것이다. 이것이 나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 얘기로 끝낼 수 없는 것은, 여러분이 저더러 "당신 정말 그렇게 삽니까?"라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훌륭한 분들이지만 저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아까 읽은 누가복음에서 뭐라 했느냐 하면, "내가 다시 이 세상에 올 때에 믿음으로 사는 자를 과연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기가 막힌 얘기 아니에요? 우리 나라 안에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전 인류의 4분지 1이 믿는 사람인데! 그러나 저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우리는 결코 내 안에 와 있는 그리스도, 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울이 말한 바 "의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나니,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그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사는 것이냐?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이런 저런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것을 영어로 표현합니다. "because of"는 믿음으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in spite of"입니다. 나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족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와서 함께 살고 있다고 하는 이 "in spite of, 그것이 바로 신앙에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내 안에 들어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 안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건 무얼 뜻합니까? 나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내 죄는 내 안에 와 있는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사죄를 받고, 용서를 받고, 없어지고, 그것을 믿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면 오해를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맘대로 하고, 다 죄를 지어도 좋단 말이냐? 첫째로 여러분이 좀 놀랄지 모르지만 그 물음에 답은 "그렇다."입니다. 이 놀라운 이야기는 마르틴 루터의 이야기지, 내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모든 죄는 그대로 용납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은 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용서받은 것을, 그것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에게서는 무엇이 나타나야 하는가? 그 사랑을 못하고, 그 사랑과 어긋나는 자신을 발견하고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한 회개, 부단한 회개, 그 회개를 통하여서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그 사죄를 믿는 믿음은 해방 받은 자유로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얼굴과 행동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특징이 있다면 믿음으로 사는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았으니까!

이것이 내게 들어오게 되는 때, 말할 수 없는 감사! 그 감사는 어디로 이어지느냐? 그 받은 사랑을 내가 어떻게 얼마만큼 나타나느냐? 여기서 우리는 실패합니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근본적인 다른 점은 믿지 않는 사람은 한번 실패하면 실패자가 되고 말지만, 믿는 사람은 넘어지면 일곱 번 넘어진다고 했습니다. 일곱 번 넘어진 자리에서, 십자가 위에서 죽은 자신 안의 주님을 바라볼 때 비칠거리며 일어나서 다시 걸어가는 그것이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패러독스, 그런 역설, 그것이 우리 삶 속에 있을 때, 우리가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성도와 교제하고, 세례 받고 그래서 성찬에 참여하고, 친교를 갖고, 설교를 듣고 그래야만 내가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사회를 보는 우리의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북한에서 굶주리는 동포는 굶주린 사람들입니다. 보수주의자들처럼 그들을 공산당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굶주린 그 사람 속에 예수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회의 모든 부조리 속에서 지금도 끌려가고 빌라도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고난당하는 예수님을 봅니다. 우리는 또 이렇게 훼손되어 가는 자연, 이 자연 속에서 예수님의 몸에 상처를 주는 인간들의 죄를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그리스도를 통해 바뀔 새 하늘과 새 땅, 찬란한 다음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에 의하여서 신앙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사랑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몇 년 전에 쓴 적이 있습니다만, 누가복음에 나오는 병든 아이의 아버지가 하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네가 믿느냐?" "예, 제가 믿습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서 믿음으로 사는 자의 모습을 봅니다. 믿습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소서. 힘이 빠진 거기에서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 다시 힘을 내어 일어섭니다. 바로 이러면서, 우리는 마지막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서 끝없이 전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목표를 향해 달음질치는 이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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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