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 목사 ⓒ베리타스 DB |
“야훼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가운데 제일 간교한 것이 뱀이었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동산에 있는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되, 죽지 않으려거든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그러자 뱀이 여자를 꾀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주었다. 남편도 받아 먹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리웠다.”(창세 3, 1-7)
창세기를 읽을 때마다 유념할 일이 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은 까마득한 옛날 원초(原初)의 무대에서 발생한 사건이면서 오늘 우리한테서도 발생하고 있는 사건에 대한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아담의 범죄는 곧 우리의 범죄다. 그가 따먹은 선악과를 우리도 따서 먹고 있다. 그가 에덴에서 추방되었듯이 우리도 에덴에서 추방되고 있으며 그가 하느님 뵙기를 두려워했듯이 우리도 하느님한테서 숨으려고 한다. ‘아담’ 이야기는 ‘사람’ 이야기고 그래서 곧 당신과 나의 이야기요, 우리의 이야기다. 순간의 잘못으로 인류를 실낙원의 수렁에 몰아넣은 한 못난 선조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릇 신화(神話)라는 틀에 담겨 전달되어 온 이야기는, 그것이 전해지고 있는 시대의 모든 ‘현대인’들이 주인공이며 화자(話者)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신화로 존속할 수가 없다.
눈동자는 눈동자를 보지 못한다. 사실은 그래서 만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눈이 눈을 본다면 눈이 눈을 보고 있는 그만큼 만물(대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 거울이 거울 자신을 비추지 않고 스스로 통 비어 있기에 모든 것을 비출 수 있듯이.
요컨대 눈이든 거울이든 자기 자신한테 사로잡히면 제 기능을 다할 수 없다는 얘기다. ‘자기’에 대하여 완전한 ‘무(無)‘로 존재할 때, 그때에 비로소 그는 완전한 ‘자기’로 존재하게 된다. 자기-비움이 곧 자기-완성이다. 반대로 자기에 사로잡힘은 곧 자기-상실을 가져온다. 스스로 죽는 자는 살 것이요, 스스로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전자(前者)의 길을 완벽하게 보여준 사람이 예수요, 후자(後者)의 길을 보여준 사람이 아담이다. 이 점을 좀더 확연하게 대조코자 바오로 성인은 예수를 가리켜 ‘제 2 아담’이라고 했다. ‘제 1 아담’이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이끌듯이 ‘제 2 아담’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이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첫 사람 아담이 그랬듯이 오늘 우리도 자기를 비우지 못해서 실낙원의 아픔을 겪어야 한다. ‘나’라고 하는 이 물건 하나 치우지 못해서 온갖 고통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이 물건이 살아 있어서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펄펄 뛰며 자기방어 기제(機制)를 발동하고 상대방을 공격하고 야단발광을 치느라고 오늘도 세계는 온통 시끄럽고 살벌하고 여기저기 증오와 살인의 지옥불이 타오르고 있다. 남을 태워버리기 위해서 제가 먼저 타야 하는 게 불이다. 내가 너를 아프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먼저 아프게 해야 한다. 어리석음의 극치다. 그런데 너무나도 오랫동안 이런 일에 길들여진 탓일까? ‘나’를 살리기 위해 ‘너’를 죽이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식으로 통하는 세상, 그 세상의 질서를 하나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의 어리석음은 깊어지고 세상은 더욱더 어두워질 수밖에.
어떤 처녀가 전화를 걸어왔다. 외출 준비로 바쁜 시간이었기에 급히 용건을 묻자, 그 예쁜 목소리의 주인공이 들려주는 사연은 대강 이러했다. “나는 재수생이다. 어려서부터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한다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아왔다. 내 생각에도 약간 그런 점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어저께 학원에서 담임한테 공개적인 비난을 받았다. 내가 반장인데, 일처리가 잘못되었다고 학생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인격을 모독하는 말을 들은 것이다.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학원에 가고 싶지도 않아서 거리를 헤매다가 지현성당 앞을 지나는데 누가 강연을 한다고 써붙였기에 들어갔더니 당신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강연이 끝난 다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성당에 전화번호를 물어 이렇게 전화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미칠 지경이다. 그 선생 보기 싫어서 학원에도 못 가겠다. 그렇다고 아주 그만둘 수도 없으니 어쩌면 좋겠는가?”
시간도 없었지만 상담 기술에 대하여 젬병인 나로서는 뭐라고 권면의 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엄벙덤벙 말이 오고 갔다.
“자네가 선생이라면 그럴 경우 어떻게 했겠는가?”
“내가 선생이라면 반장이 잘못했더라도 공개적으로 인격을 모독하는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감이다.”
“교무실이나 복도로 불러내어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고 잘못을 고치도록 일러줄 것이다.”
“역시 동감이다. 그렇다면 그날 자네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선생이 잘못을 했다고 생각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나도 선생님이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동감이다. 자네 말대로라면 확실히 선생이 잘못했다.”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선생이 잘못을 했는데 왜 자네가 괴로워하느냐는 점이다. 자네가 자네의 잘못 때문에 잠을 못 자면서 괴로워한다면 이해가 되겠는데, 왜 남의 잘못 때문에 자네가 괴로워하는가?”
처녀는 내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버스 시간이 바야흐로 코앞에 닥쳐왔기에 더 이상 전화기를 들고 있을 수 없었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다시 통화하거나 만나자는 약속을 했는데, 그 뒤로 연락이 없다. 엉겁결에 대답이라고 하긴 했는데 내가 생각해 보아도 뭔가 그럴듯하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을 그런 말을 처녀에게 던진 셈이다. 선생이 잘못을 했는데 왜 내가 괴로운가? 그 처녀가 그 말을 무슨 화두(話頭)처럼 붙들고 씨름한다면 뜻밖에 괜찮은 ‘깨달음’에 이를 수도 있겠다 싶긴 하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중단된 대화를 속으로 이어보았다.
“선생이 다른 아이에게 잘못을 했다면 내가 왜 괴로워했겠는가? 바로 나에게 잘못을 했기 때문에 괴로워한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만일 선생이 자네한테 비난하는 말을 퍼부었을 때 자네한테 그 말을 받아들일 ‘나’가 없었다면 그래도 괴로워했을까?”
“내가 있는데 어떻게 없다고 하는가?”
“글쎄, 만일에 없다면 말이다.”
“없는 내가 무엇을 괴로워하는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처녀의 존재를 머리에서 지워버리고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자기를 부정(不定)하지 않고서는 당신 뒤를 따를 수 없다고 예수님이 이르셨지. 아상(我相)이 남아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고 ‘금강경’도 말했지. 옳다. ‘나’를 비우는 자만이 완전한 ‘나’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근본이렷다!”
나에게 남은 일은 이 ‘앎’을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배로, 배에서 손발로 끌어내려 마침내 온몸으로 육화(肉化)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담의 길을 돌이켜 예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뱀이 등장하고 하와가 먼저 따서 먹고 하는 따위, 이야기의 ‘소도구’에 정신 팔릴 것은 없다. 핵심은 아담이 하느님의 명령(법도)을 어기고 자기의 생각(뜻)을 좇는다는 사실에 있다.
아담(사람)에게는 처음부터 ‘하느님 명령’(이 말을 비신화화하여 ‘자연의 법도’라고 해도 좋다.)을 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졌다는 게 성서의 설명이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창세 2, 17) 하느님이 아담에게 하신 이 말씀 속에는 ‘네가 먹고자 한다면 먹을 수도 있다.’는 뜻이 들어 있다.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면 구태여 따먹지 말라고 명령할 이유가 없다. 하느님을 거역할 수 있는 만큼의 능력을 부여 받은 존재, 이것이 인간의 위대함인가? 아담은 그 능력을 발휘하여 하느님을 거역했다. 그 결과 ‘자기’를 보게 되었다. 눈동자가 눈동자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거울이 거울을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서 아상(我相)이 생겼고 실낙원의 고통이 생겼다. 범죄(하느님에 대한 거역)가 고통을 낳고 고통이 다시 범죄를 키우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 악순환 속에서 우리가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벗어나 해탈하는 길(the Exodus)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우리의 ‘길’이신 예수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바오로는 말했다. 아담이 있기에 고통이 있고 고통이 있기에 예수가 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난 것은 저주인가? 축복인가?
저주면 저주요, 축복이면 축복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아담의 길을 밟는 동안 그것은 우리에게 저주요, 예수의 길을 밟는 순간 그것은 우리에게 축복이다. 고(苦)가 우리를 바야흐로 해탈시키는 것이다.
유마(維摩)가 문수(文殊)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여래(如來)가 되는 씨앗입니까?”
문수가 말했다.
“…무명(無明)과 존재를 향한 집착이 여래가 되는 씨앗입니다.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이 여래가 되는 씨앗입니다. …공중에 뿌린 씨는 싹을 내지 않지만 땅 위에 뿌린 씨는 잘 자라납니다. 마찬가지로 무위(無爲)의 궁극성을 믿는 자들에게는 불법(佛法)이 자라나지 않습니다. 수미산같이 높은 오만함과 함께 내가 있다는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도 정작 깨달음에 대해 크게 발심(發心)할 때 비로소 불법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번뇌야말로 여래가 되는 씨앗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늘의 법도(自然)를 어겼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공해(公害)다. 오염된 세계, 곧 우리의 ‘실낙원’이다. 물이 썩고 공기가 썩고 흙이 썩고 드디어 생명이 사라진다. 그런데 바로 이 전 지구적인 공해 문제가 인류를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끌어간다. 물(物)만이 아니라 물(物)과 함께 영(靈)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깨달음으로 다가가게 한다. 그 동안 제한된 종교인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전수되어 온 ‘깨달음의 세계’가 드디어 전 인류의 상식으로 육화(肉化)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공해는 우리에게 저주인가 축복인가? 저주면 저주고 축복이면 축복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글·이현주 목사(1944년 충북 충주 출생, 1977년 감리교 신학대 졸업 1995년 강원 철원 반석교회 시무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당선으로 등단, 2006년 드림실험교회 참여해 현재까지 사역, 저서로는 '사람의 길 예수의 길', '대학 중용 읽기', '이아무개 목사의 금강경 읽기'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