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목회자적 입장에서 본 공적신학의 접근

공공신학(Public Theology)에 대한 이해와 접근

                              ▲권성수 목사

최근 미래목회포럼(공동대표 이성희, 신화석 목사)은 "공공신학(Public Theology)에 대한 이해와 접근 - 한국교회의 공적 책임"이라는 주제로 목회자 및 신학생 초청 신학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다음은 권성수 목사 (대구 동신교회)의 "목회자적 입장에서 본 공적신학의 접근" 전문.

이형기 교수는 “공적신학의 지평: 하나님 나라--한국 교회 공적 책임을 중심으로”란 논문에서 공적신학의 역사와 다양한 접근방법을 제시한 다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교회와 세상’을 공적신학의 지평으로 제안했다. 이형기 교수는 특별히 교회를 “생명공동체”로 규정하고 교회의 자리와 역할을 제시했다. 이형기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미’ 이루어진 샬롬의 ‘생명공동체’(하나님 나라)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샬롬의 ‘생명공동체’(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성령의 역사로 사도적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교회는 세상 속으로 파송 받아 사도적 직무를 수행하여 “교회 밖의 보편적인 세계의 온전한 회복과 우주적 차원의 회복”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형기 교수는 칼 바르트의 ‘칭의’와 하나님 나라의 상관관계를 다루면서, 바르트가 “우리가 ‘복음’ 설교를 통해서 성령으로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 회개하고 구원을 얻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을 보편적으로 칭의하신 것”이라고 했다고 소개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인류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칭의가 보편적인 하나님 나라를 기대(anticipate)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교회는 물론이고 국가도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외적이고 상대적이며 임시적인 형태(Gestalt)”로 본다는 것이다.

이형기 교수는 윌겐 몰트만이 “교회 밖의 하나님 나라를 주장”한다고 하면서 보편사와 창조세계 전체 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봄과 그 징표와 그것을 일구는 도구”가 있는 것으로 본다고 지적했다. 몰트만은 경제적 차원에서의 ‘빈곤의 악순환,’ 정치적 차원에서의 ‘힘의 악순환,’ 인종과 문화에서의 ‘소외의 악순환,’ 과학 기술과 산업화에 따른 ‘자연파괴와 오염,’ ‘무감각과 무의미성, 그리고 하나님께 버림받음의 악순환’으로부터 해방이 하나님 나라의 단편, 징표, 표지, 미리 맛봄, 또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도구라고 했다.

이형기 교수는 한국사회의 공적 이슈들을 여섯 가지로 보고 각 이슈에 대한 공적신학의 응답을 제안하였다. 이형기 교수는 공적신학은 공적 이슈들을 신학적으로 논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아래의 이슈에 대해 아래와 같은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1) 교회와 국가의 관계: 이형기 교수는 교회가 국가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거나 교회와 국가 중 어느 것이 다른 것에 종속되는 것을 반대하면서 양자의 긴밀한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가령 장로 대통령은 장로로서 교회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고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고유 업무가 장로직 수행의 영향을 받거나 장로의 고유 업무가 대통령직 수행의 영향을 받아 혼선을 빚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형기 교수는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든지, 어떤 공직자가 부하 직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든지 공적인 직무 수행 전에 공적인 기도를 한다든지 하는 일들은 그와 같은 혼선의 예증이 될 것”이라고 했다.

2) 남북의 대치상황: 이형기 교수는 테러, 전쟁, 폭력, 정의 없는 평화 등을 거부하고, 정의와 평화를 전제하는 창조세계의 회복과 지구 생명 공동체를 추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우리는 “북한의 이념과 문화와 삶의 스타일”이 우리의 그것과 다를지라도 북한과 화해하고 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적이고 정의로운 남북통일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남남 이념갈등: 이형기 교수는 보수와 좌파 간의 이념갈등으로 국론이 분열되는 상황에서 “헌법이 정하는 국체의 정체성 안에서 자유롭게 여러 가지 이념을 표현할 자유”로 상호보완 함으로써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했다. 흑백논리로 상대방을 정죄하지 말고 개인과 전체에게 모두 유익을 주는 공동체를 추구하는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와 평화와 창조세계의 보전’을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삼고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생명공동체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시장경제의 지구화로 인한 양극화: 이형기 교수는 힘이 있고 ‘가진’ 나라들은 더 잘 살게 하고, 힘없고 ‘갖지 못한’ 나라들은 더 못 살게 하는 지구화를 수정하고, 상호연대의 경제정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교회는 “시민단체들과 연대하여 시장경제의 지구화에 맞서는 경제정의 실현을 위해서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5) 개발과 환경파괴: 이형기 교수는 지구화로 인한 창조세계의 파괴와 지구 생명공동체의 해체는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자본주의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이형기 교수는 “종의 다양성과 자연의 조화로운 다양성을 축소시키는 자연과학과 기술에 의한 ‘개발’과 생명공학이야말로 인류와 지구 생명공동체 모두의 행복을 파괴”한다고 하면서 대운하 사업도 여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비판했다. “하나님 나라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나가는 교회는 이 땅 위에서 인류사회(역사)와 지구 생명 공동체(우주)가 함께 어우러지는 샬롬 공동체를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6) 다문화 다민족 사회: 이형기 교수는 “‘단일문화’(monoculture)를 지향하고, 다(多)문화와 다(多)가치의 사회를 시장경제로 획일화시키는 지구화는 각 나라와 각 지역의 문화와 가치와 종교의 ‘다름’과 다원성과 ‘타자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교회는 이 땅 위의 모든 문화들과 종교들 속에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형기 교수는 이상의 방향에 따라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고, “모든 교회들의 다양한 신학들은 통일성과 코이노니아를 추구하면서 샬롬의 생명공동체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형기 교수의 논문을 읽고 공적신학의 역사와 다양한 입장들과 바르트와 몰트만의 공적신학의 방향에 대해 총론적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형기 교수가 한국 실정에서의 공적신학의 방향을 6대 이슈를 중심으로 제안한 것도 사고(思考)를 전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공적신학은 신학이 사적 영역에 머물러 섹트(sect)화 하는 것을 막는다. 공적신학은 신학이 불신자와 신자의 공동관심사를 불신자와 신자가 같이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언어로 다루는 것이다. 공적신학이 공적인 이슈를 합리적인 언어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이 지구촌과 우주의 주인이심에도 불구하고 신학이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맴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공적신학은 당연히 해야 할 신학 작업으로서 회심(回心)을 추구하지 않고 사회의 웰빙(well-being)에 관여한다고 할지라도(노영상), 공적신학을 전개할 때 가장 크게 부딪히는 문제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 발전시키느냐의 문제로 보인다.

이형기 교수님은 신사참배 운동을 찬성하고 보편구원론을 찬성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신사참배 운동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오타로 보이기에 확인해 본 후에 논의해야 하겠지만, 보편구원론은 뜨거운 쟁점이 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인류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칭의가 보편적인 하나님 나라를 기대(anticipate)하는 것”이라는 바르트의 주장을 이형기 교수는 비판 없이 소개하면서 다(多)이념 다(多)종교 다(多)문화 사회에서 만인의 상생과 교제를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1장에서 이미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인의 조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만유와 만인이 하나님의 관심사인 것이 분명하다. 만유와 만인이 하나님의 관심사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도 역시 만유와 만인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분명하다. 요한계시록에서 만유와 인간의 회복, 새 하늘 새 땅 새 인간을 볼 때도 우리가 만유와 만인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구약에서 선민을 내신 것은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다. 선민이 만민의 모든 관심과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도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인 것을 강조하셨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점에서도 우리는 당연히 공적인 이슈들에 대해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따라서 공적신학의 타당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목회자의 관점으로 볼 때 교인들은 이 세상의 여러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다. 교인들이 각기 처한 환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교인들이 자기 분야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길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도 당연하다. 목회자는 교인들의 그런 관심과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 관점에서 확실한 지침을 제공해야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목회자가 지금까지 공적인 이슈들에 대해 분명한 지침을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교인들은 목회자로부터 가치관과 세계관과 이슈별 방향을 제공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알아서 살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주일에는 신자로 살지만 평일에는 불신자로 사는 면이 교인들의 심각한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그리스도인 학생들의 경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대학에 들어가서 첫 학기에 몇몇 교수들로부터 기독교에 대해 야유하는 발언 몇 마디를 들으면 자신들의 신앙의 탑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갈등을 하고 때로는 신앙을 포기하기도 한다.

최근에 목회자로서 목회 현실의 매우 심각한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유치원 학생의 경우 유치원 3년,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이렇게 15년 교육을 받으면 사회에 나가서 나름대로 일을 맡아 자기 역할을 감당한다. 거기에 대학 교육 4년을 합쳐서 19년 교육을 받으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해 나간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교인들을 30년간 붙잡고 설교하고 교육해도 교인들은 여전히 유치원생들로 남아 있다는 심각한 문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운동권이나 이단은 몇 주내지 몇 달 만에 골수분자들을 만들어내는데, 어째서 목회자는 교인들을 수십 년 붙잡고 있어도 교인들이 여전히 유치원생들 수준으로 머물러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교인들이 구원의 기본 교리들도 남들에게 가르쳐 보라고 하면 못 가르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형편에서 공적 이슈들에 대해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발언하고 행동하는가 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목회자의 목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목회자의 무의식적 직무유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포럼이나 심포지엄이나 세미나를 보면, 학자들이 거의 매번 총론이나 원론이나 서론을 다루는 것으로 그친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총론에도 물론 관심이 있지만, 각론에 더 관심이 크다. 가령 지금 북한에 교회들이 식량을 도와주어야 하는가, 도와주지 말아야 하는가? 북한의 인권문제는 다루어야 하는가, 다루지 말아야 하는가? ‘사랑의 빛 나누기 운동’을 어느 정도 공개해서 전개할 것인가? 대운하 계획에 찬성해야 하는가, 반대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 연예인들의 자살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자살하면 지옥 가는가, 안 가는가? 목회현장에서 이런 식의 질문은 끝없이 꼬리를 문다. 목회자는 총론만이 아니라 각론을 다루어야 하고, 실제로 이슈별로 성경적인 원리를 제시하고 어떤 경우에는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신학이 공적 이슈들을 다루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그런데 신학이 문제는 공적 이슈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형기 교수의 논문을 읽으면서 공적신학의 타당성에는 100% 공감하고 공적신학의 동향과 방향 및 실제적인 이슈들에 대해서 새삼 자극을 받게 되었지만, 개념의 혼란이 많다는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이형기 교수님은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보편적인 하나님의 인류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칭의라는 바르트의 주장을 비판 없이 제시하셨는데, 성경적으로는 분명히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법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다(롬 5:1). 바르트의 칭의 개념과 성경의 칭의 개념이 이렇게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보편적인 칭의가 보편 구원론과 맞물리고 그런 개념에 근거하여 만유와 만인이 서로 상생하고 서로 교제하는 이론을 자연스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칭의’ 개념 자체가 원초적으로 성경의 그것과 다를 때에, 성경과 다른 칭의 개념에 근거한 상생과 협력 이론이 과연 성경적이며, 기독교적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는 것이다.

이형기 교수의 논문을 읽으면서 이형기 교수가 하나님 나라 관점을 제시한 것은 공적신학의 올바른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 자체도 성경이 제시하는 대로 둘로 나눠 생각하는 것이 개념의 혼란을 막고 성경적 기독교의 정체성을 바로 살리고 그것에 근거한 성경적으로 올바른 공적신학을 수립할 수 있다는 면에서 필요하다. 성경은 창조 면에서의 하나님 나라와 재창조 면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원리상 구분하여 제시한다. 하나님은 창조 질서도 다스리시고 재창조 질서도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창조 면에서 만유와 만인의 아버지시오 왕이시다. 하나님은 창조 면에서 만유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회복하신다. 하나님은 창조 면에서 만인을 사랑하시고 공급하시고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창조 면에서 햇빛과 비를 의인과 악인에게 차별과 구분이 없이 제공하신다.

하나님은 또한 재창조 질서도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타락하고 범죄했다. 한 인간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간들이 죄와 사망과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한 인간(神人)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타락한 인간을 재창조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인간들을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시고 승천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님을 받아 보내심으로 그 구원을 적용하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칭의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은 창조 질서 면에서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시지 않지만, 재창조 질서 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관계를 맺은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신다. 하나님은 창조 면에서는 만인이 하나님의 자녀들(행 17:25-28)로 보시지만, 재창조 질서 면에서는 신자들만 하나님의 자녀들로 보시고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보시지 않는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들이지만,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들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불신자들은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의 백성들이다(엡 2:2). 창세기 3장에 인간의 타락과 관련하여 사탄이 나오면서 성경 전체에 사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의 적대와 투쟁이 있다. 창조 질서 면에서는 만유와 만인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지만, 재창조 질서 면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의 적대와 투쟁이 있다는 것이다(슥 3:1-5). 사탄도 물론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지만(욥 1장), 하나님은 포괄적 주권 밑에서 사탄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적대와 투쟁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 예표된 하나님 나라 메시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활동하실 때에도 사탄의 나라를 의식하시고 사탄의 나라와의 충돌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수립하셨다(마 12:28-29). 예수님은 악령들이 추방되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으로 선언하셨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수립 작업에 사탄의 부단한 방해와 적대 공작이 있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사탄이 그를 시험하였지만(눅 4:1-13),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도 여전히 사탄은 그를 넘어뜨리려 했다(막 15:30). 예수님은 사탄의 모든 방해 공작을 물리치시고 사탄을 이기시고 구원을 완성하셨다(골 2:15).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로(롬 14:17)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확산된다(사도행전).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세적 표현이요,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반영이요 전조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는 만민을 축복하기 위한 축복의 통로로 선민을 세우신 것처럼, 신약에서는 교회를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의 통로로 세우셨다. 교회는 신약 시대의 ‘선민’이고 ‘만민’의 제사장 나라이다(벧전 2:9-10). 교회는 현재 하나님의 나라의 표현이고 세상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할 영역이다. 재창조 질서 면에서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확장해 나가야 할 대상이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하나님 나라 완성을 주제로 다루는 요한 계시록도 교회와 세상은 재창조 질서 면에서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다. 교회는 ‘신부’로 비유되어 있고(계 19:7), 세상은 ‘창녀’로 비유되어 있다(계 17장).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세상은 붉은 용에게 속한 교회의 피를 빨아먹는 “큰 음녀”다 (계 13장, 17장). ‘신부’가 ‘창녀’에 의해 박해를 받지만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 용장으로 재림하셔서 붉은 용과 바다 짐승(적그리스도)과 땅 짐승(거짓 선지자), 이 ‘사탄 삼위일체’의 미혹을 받아 그 밑에 복종하던 ‘창녀’를 심판하시고 ‘신부’의 구원을 완성하신다(계 19:10).

우리는 성경의 이런 큰 그림 속에서 공적신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조 질서와 재창조 질서의 구분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해야 한다. 창조 질서와 재창조 질서를 구분하되 재창조를 통한 창조의 완성이란 관점에서 공적신학이 이루어져야 한다. 재창조를 통한 창조의 회복을 고려하지 않을 때, 즉 창조 질서 안에서만 하나님의 나라를 운운하는 공적신학을 할 때 그런 공적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다. 메시아를 통한 죄와 사망과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겠는가? 빅터 앤더슨(Victor Anderson)이 지적한 대로 공적신학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공적신학” 자체가 “스캔들과 우치(愚癡)”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 질서와 재창조 질서의 구분이 없이 공적신학을 전개할 때 개념의 혼란이 온다. 개념의 혼돈은 신학의 혼란을 낳는다. 신학의 혼란은 정체성의 혼란을 낳고, 정체성의 혼란은 의식과 언어와 생활의 혼란을 낳는다. ‘만인의 칭의’나 보편구원론과 같은 신학과 윤리의 혼돈이 오는 것이다. 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지만 구분되어야 하는 보편사와 구원사의 혼돈이 온다.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의 ‘신부’와 마귀의 백성인 세상 ‘창녀’의 혼돈이 온다. 구원사가 보편사 속에 들어가서 보편사를 변화시키고, 신부가 창녀 문화 속에 들어가서 창녀를 정화시키고, 교회가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이 흐려지게 된다.

공적신학의 논의에서 이와 같이 기독교 진리의 정체성을 흐려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공적신학은 반드시 해야 할 당위이지만, 공적신학을 전개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기독교와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거나 변질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영상 교수가 지적한 대로,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수많은 공적 문제에 대한 논의들을 살필 때, 그것이 과연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논구된 것인지 의심이 가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교회의 정체성이 약화되거나 변질될 때 교회의 사명도 그만큼 약화되거나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화 명령(창 1:28)과 복음 명령(마 28:18-20)과 윤리 명령(요 13:34-35)을 사명으로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창조시의 아름다운 상태로 보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교회와 세상을 섬기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이 분명하고 강할 때는 세상에 대한 사명 감당을 통해서 그만큼 분명하고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우리의 정체성이 약하고 변질되면 세상에 대해서 그만큼 약하고 변질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이 빛,”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다(마 5:13-16). 광채 잃은 빛이나 가려진 빛은 세상을 밝힐 수 없다. 맛을 잃은 소금은 세상의 부패를 억제하고 삶의 맛을 낼 수 없다. “공적 생활을 영적으로 의미 있고, 도덕적으로 살만하고, 문화적으로 번영하게 할 수 있는 신학적인 역량”에 따라 삶에 빛과 맛을 주는 것이 좌우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우리의 분명한 정체성(Identity)에 근거하여 세상을 복음화(Evangelization) 하고 세상을 복음과 사랑으로 변화시키는(Transformation)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공적신학은 ‘정체성+복음화+변화’(IdET)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정체성과 복음화(복음 명령)와 변화(문화 명령과 윤리 명령), 이 셋은 동시에 확인하고 추진해야 하며 항상 상호연관성을 지니게 해야 한다. 우리가 ‘큰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마 4:16) 안에서 ‘작은 빛’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빛’ 안에서 누리는 참된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고, 전해야 한다. 우리가 복음도 전하면서 동시에 나눔과 섬김의 사랑을 베풀어서 ‘어두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세상 속으로 뚫고 들어가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정체성을 약화시켜서도 안 되고, 정체성이 약화될 우려 때문에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정체성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복음화와 변화의 능력이 약하다고 하여 정체성을 강화시킬 때까지 복음화와 변화를 접어두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체만을 가꾸고 키우는 사유화(provitization)도 문제이지만, 교회가 세상에 물들어 오염되는 교회의 세속화(secularization)도 문제이다. 교회는 세상에 복음만 전하고 사랑을 통한 변화를 추구하지 않아서도 안 되고, 세상에 사랑만 베풀면서 복음화를 제쳐두어서도 안 된다. 정체성과 복음화와 변화, 이 셋은 상호연관성 속에서 동시에 확인하고 강화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과 복음화와 세상 변화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갈 때에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의 적대와 충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사탄의 유혹을 받아 타락한 이후로 사탄은 계속 거짓말(요 8:44)과 유혹과 참소로 교회를 공격한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 메시아로 활동하실 때에 사탄의 나라와의 적대관계를 의식하시고 활동하셨다. 악령추방을 통해서 사탄의 나라가 약화되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으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사탄의 나라를 공격하셨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사탄의 나라는 철퇴를 맞았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보혈로 사탄을 이기시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완성하셨다. 계시록도 성부 성자 성령, ‘거룩한 삼위일체’(sacred trinity)의 하나님 나라와 사탄 적기독 거짓선지자, ‘사탄 삼위일체’(Satanic trinity)의 사탄의 나라가 적대하고 충돌하여 마침내 사탄의 나라가 망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가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룸으로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 지금 사탄과 악령들은 사람들로 마귀를 닮게 하여 사탄의 나라를 확장하고 있다. 그리스도화(Christianization)와 귀신화(demonization)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의식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 강화하면서 세상에 대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나눔과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 귀신화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화 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문화와 입장과 이념과 종교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정체성과 복음화와 세상 변화, 이 셋을 살려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상생하고 교제하기 위해서 우리의 정체성과 복음화와 변화 사명을 포기하거나 약화시키면 안 된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빛’의 정체성을 포기할 수 없음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밖의 어둠 속에 있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상생과 교제를 위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포기하거나 약화시키면 안 된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빛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어둠과 상생하고 교제하면 그것은 빛이 아니고 어둠이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상생하고 교제하면서도 우리의 정체성과 복음화와 변화의 사명을 약화시키거나 변질시키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가?


가령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과 복음화와 변화의 사명을 유지하면서 우리와 종교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상생과 교제를 추구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앞서 언급한 창조 질서와 재창조 질서의 구분을 염두에 두면 된다. 우리는 창조 질서 면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구분 없이 하나님의 햇빛과 비를 맞으며 서로 정의와 평화 속에서 어울려 살아야 하고, 살 수 있다. 우리는 타종교인과 얼마든지 소외자 돕기, 가난과 억압과 질병과 문맹 퇴치, 맑고 깨끗한 환경 보존, 민주화, 통일 등을 위해서 상생하면서 협력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재창조 질서 면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타종교인들과 함께 노제를 지내거나 삼보일배를 할 수 없다. 우리는 타종교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 길이 있습니다. 당신과 제가 함께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공동의 선을 추구합시다.”라고 하는 식으로 상생과 교제를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깨달은 구원 진리와 체험을 말하고 타종교인은 타종교인으로 깨달은 것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복음 진리를 전하면서 타종교인에게 “당신도 저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원합니다.”고 말할 수 있다. 타종교인이 그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강요할 수는 없다. 우리는 바울이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범사에 종교성이 많은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행 17장)처럼, 우리도 그렇게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 면에서 ‘장로’가 ‘대통령’이 될 경우, 장로 대통령은 재창조 질서 면에서 장로로서 헌법에 보장된 대로 기독교 신앙을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한다. 장로 대통령이 불교와의 상생과 교제를 위해서 법명을 받을 필요가 없고, 받아서도 안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로 대통령은 사석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자신의 복음 신앙을 전할 수 있다. 그러나 장로 대통령이 비(非)그리스도인들도 참석한 공석에서 한 도시를 성시화한다거나 국가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식의 발언을 할 수 없다. 만일 불교 대통령이 나와서 한 도시를 불교화한다거나 국가를 불교 국가로 만들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대통령의 종교에 따라 국가의 종교가 이 종교에서 저 종교로 왔다 갔다 하는 식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나라가 종교전쟁에 휘말려 들 것이다.

장로 대통령은 창조 질서 면에서 타종교인들과 같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상생과 교제를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장로 대통령이 국정 운영의 모든 분야에서 기독교인들과만 상생하고 교제하고 협력한다면, 그것은 결코 옳지 않은 일이다.

목회자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지방 자치 단체장과 의원들을 선출할 때 기독교인들만 뽑으라는 부탁을 교인들에게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 하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이라도 창조 질서 면에서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 발전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뽑아야 하는 것이다.

불교가 ‘종교편향’의 명목으로 기독교 대통령과 경찰청장 등 위정자들을 압박할 때에 압박을 받는 당사자는 법당에 찾아가서 부처 앞에 절함으로써 상생과 교제와 협력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으로서 분명히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변질시키면서까지 상생과 협력을 도모하는 것은 빛이 스스로 광채를 포기하는 행위이다.

불교가 ‘종교편향’의 명목으로 기독교와 기독교 정치인들을 압박할 때 국가가 문화 진작의 이름으로 교회를 보조하기보다 사찰을 보조한 액수가 비교할 수 없이 많다 할지라도, 교회와 기독교 정치인들은 레바논 같은 종교분쟁의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고 창조 질서 면에서 불교와 상생하고 협력하기 위해서 ‘종교편향’ 반론을 펴지 않은 것은 매우 잘 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종교편향’ 명목으로 법과 제도를 고치게 만들어서 결과적으로 교인들의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제한할 의도가 감지될 때는 교회와 기독교 정치인들은 그런 일을 사전에 철저하게 막아야 하는 것이다.


좌우 이념의 충돌이 있는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정체성과 복음화와 변화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상생과 교제의 국가 공동체 발전에 협력하는 길은 무엇인가? 성경은 어떤 특정한 이념과 제도만을 고집하지 않고, 어떤 제도 하에서든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나눔과 섬김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문제는 어느 이념과 제도가 창조 질서 면에서 정의와 평화의 국가 공동체를 발전시키는데 가장 적합한가 하는 것이다. 어느 이념이 절대적으로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이념이 상대적으로 적합하냐의 문제이다.

이 문제 대해서 이념의 스펙트럼이 이념의 적합성을 고려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자유와 성장을 상대적으로 강조하고, 평등과 분배를 상대적으로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이념의 스펙트럼(spectrum)이 형성되어 있다. 극좌와 극우가 있고 중도가 있고 중도 좌와 중도 우가 있고, 그 사이에 다양한 이념적 입장의 스펙트럼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극좌는 김정일 식 북한 공산주의 이념을 절대가치로 숭상하고 북한 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입장이다. 극우는 ‘빨갱이 잡아라. 우리나라에 빨갱이가 몇 백 만 명이 있다. 우리나라는 빨갱이 천국이 되어 가고 있다.’는 입장이다. 극좌와 극우 사이에 여러 이념적 입장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다양한 입장들로 구성된 이념의 스펙트럼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입장을 선택하고 어떤 입장들과 상생하고 교제해야 하는가? 사회주의의 강조점인 프락시스(praxis)에 있어서 김일 공산집단이 기근과 압박으로 자국민 수백 만 명을 죽게 하고도 김정일과 일부 공산당원들만 호의호식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도 극좌를 따라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생각이 다양한 포스트모던 시대에 극우도 국론분열을 촉진하고 상생과 교제를 깬다는 점에서 적합하지 않다. 극좌와 극우 사이에 중도를 중심으로 세금을 좀 더 거두자, 좀 덜 거두자는 식의 논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중도를 중심으로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조금씩 치우치는 입장들은 서로 논의를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조정하면서 상생과 교제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상생과 교제가 가능한 입장들 중에 어느 입장을 취하는 정당에 자유롭게 가담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최대한 구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설교 시간에 ‘좌파 정권’ ‘우파 정권’을 운운하는 것은 이념적 입장을 달리하는 교인들을 소외시키는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목회자가 어느 정당의 이념을 대변하는 것 같은 발언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나라 전체가 자국민을 압박과 사망으로 몰고 가는 북한식 공산주의의 침투로 정체성 상실의 위기와 국가 존립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목회자가 입을 다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짖지 못하는 경비견과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가 정의와 평화를 상실하고 불의와 압박을 일삼는 제도로 넘어갈 위험에 대해서 목회자는 언제든지 경고하고 교인들의 의식을 바르게 깨우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북한을 돕는 문제에 있어서도 북한 정권이 핵 개발을 하고 인권 탄압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것은 정의와 평화를 깨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북한을 도울 때는 북한 정권을 돕는 것이 아니라 북한 주민들을 돕는 것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억압과 기근에 몰려 고통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최대한 지혜롭게 도와야 한다. 교회는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그들을 탄압하지 못하도록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목회자는 이런 식의 설교를 해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언론기관이 불공정한 방송을 내 보낼 때에도 분명한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언론기관이 교회가 우리 국민들의 상생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전혀 방송하지 않고, 기독교와 교회의 어두운 면만을 부각시키는 방송을 할 때 교회는 분명히 항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름 유출 사고로 태안반도 주민들이 신음을 할 때 기름 제거 작업을 하려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도로를 매운 자동차들 중에 교회 이름이 새겨진 봉고와 버스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젖으로 침을 삼켜야 하는 감격과 감동을 받았다. 교회연합체가 봉사자들 전원의 간이식사와 방제복과 방제 장화까지 챙겨주는 모습을 보고 우리 국민들의 상생을 위해 발 벗고 나선 교회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언론기관은 태안반도 봉사자의 경우 교회만을 부각시킬 필요는 없지만, 도로변에 몰린 자동차들의 사진을 찍을 때 자연스럽게 교회 이름이 들어간 사진을 찍어 보도하면 되는 것이다. 언론기관이 봉사자 인터뷰를 할 때도 무작위로 해서 “어디서 오셨습니까?”라는 질문에 “00 교회에서 왔습니다.” 하는 것을 다른 개인과 단체와 함께 공평하게 보도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언론기관이 교회의 잘 하는 모습은 보도하지 않고 못한다고 보이는 모습만 부각시키는 것은 언론기관의 불순한 의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언론이 교회에 대해 공평무사한 보도를 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발해서 언론을 통해서 국민 전체의 상생과 교제를 도모하도록 촉구해야 하는 것이다.

언론기관이 교회의 선행을 보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보도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이웃돕기 모금을 할 때이다. 특별히 연말 이웃돕기 모금을 할 때는 언론기관이 기부한 개인이나 단체의 이름을 화면에 띄우고 보도를 한다. 우리 모든 교회들은 그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특별히 요즈음처럼 기독교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하늘을 찌르는 상황에서 연말 이웃돕기 모금 방송 때에 기독교인들의 이름과 교회들의 이름들로 TV 화면 전체를 매일 도배하는 일을 해야 한다. 언론기관이 연말 이웃돕기 모금을 상당 기간 진행하기 때문에 그 기간에 교회의 대사회적 이미지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마 6:3-4)는 주님의 말씀을 문맥과 상관없이 해석하여 적용하면 안 된다.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자기 과시형 구제를 비판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선행을 과시해서 자기의 영광을 전시하는 차원에서는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차원에서는 우리의 선행을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내 보여야 한다.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같은 산상보훈에서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다(마 5:16).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우리의 선행을 사람들 앞에 나타내어서 그들로 그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 나라를 확산시키는 일을 할 때 해외 선교는 물론 국내 외국인 선교에도 관심을 많이 기울여야 할 때가 되었다. 지금 국내 외국인이 1백 만 명을 넘기고 있고, 특별히 농어산촌 지역에서는 외국인과 결혼한 가정들이 늘어나고 한국 남성이 외국인과 결혼하여 혼혈 자녀를 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지금은 지구화(globalization)와 지구지역화(glocalization) 시대이다. 지구가 하나의 마을처럼 좁아졌고, 지역에서 일하면서도 지구촌 의식을 품게 되었다. 근로와 유학과 결혼을 위해 입국한 외국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그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위상을 제고하는 차원과 하나님 나라 확장 차원에서 매우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국내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체험할 경우 자기 조국의 가족들과 친척들과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한국인이 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직간접적으로 전하게 될 것이다.

시골교회의 경우 교인들이 외국인 여성과 그 혼혈 자녀들에게 김치와 한글 및 한국문화 교육 등으로 사랑을 베풀면 사랑을 받은 당사자들은 물론 그들과 연결된 사람들이 복음의 영향을 받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시골교회의 영적인 분위기가 쇄신될 것이다. 시골교회 교인들이 교회에서 외국인들을 볼 때 지구촌 의식과 해외 선교 의식이 자연스럽게 강화될 것이다.

중국 유학생의 경우 교회가 복음과 사랑으로 그들을 도울 경우 그들이 복음의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기억할 것이다. 중국 유학생들이 귀국하면 각성의 지도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돕는 것은 결국 미래의 한중 교류에 기여하는 것이고 우리 자녀들의 국제의식과 국제교류에 기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주고 그들은 우리 자녀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주면 우리 자녀들을 세계인들로 키우는 일과 우리 자녀들의 삶의 지평 확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상과 같이 목회자로서 공적신학의 몇 가지 구체적인 이슈와 그 이슈에 대한 입장을 IdET(정체성, 복음화, 변화)의 관점과 창조 질서와 재창조 질서의 구조적 시각 속에서 소개했거니와 공적신학의 관심은 아무리 넓어도 지나치지 않는다. 우주와 자연과 인간 세계의 1평방 센티미터도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하나님은 우주와 자연과 인간 세계의 창조자 섭리/운행자 구원/심판자이시다.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공적신학의 총론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신학자들이 공적신학의 각론을 더 많이 다루어 주기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구체적인 공적 이슈들을 각기 분석 평가하고 그 이슈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정리하고 가급적이면 대체적인 선을 그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건전한 신학의 지도에 따라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실천해야 할 입장에 있다.

하나님은 재창조 질서를 통해서 창조 질서를 회복하시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 지복을 누리는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 그 지복을 누리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와 희락이 완벽하게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天國)도 영원히 존재하고, 불의와 파괴와 슬픔이 완벽하게 지배하는 사탄의 나라(鬼國)도 영원하다. 천국에서의 구원 완성과 지옥에서는 심판 완성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로 남게 될 것이다. 우리가 공적신학을 거론할 때 이 점을 망각하지 않도록 다시 한 번 주의해야 할 것이다. 지옥에서 의식적으로 영원히 고통당할 사람들을 마치 천국에서 영원히 의식적으로 복 받을 사람들로 착각하게 만드는 궁극적 우(遇)와 죄(罪)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적신학을 통한 상생과 교제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새 하늘과 새 땅”의 지복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권성수 목사 (대구 동신교회)


기사제공: 아폴로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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