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학당 3-5, 2009년 10월 14일, 오후 7:00-8:30, 삭개오작은교회]
오늘의 주제: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현체험
강의 : 김경재 교수(한신대 명예)
[1] 주제가 명료화 하고자 하는 문제의식
1. 초대 기독교의 발생을 연구하는 성서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가장 짧은 핵심적 기독교신앙의 고백문의 압축형태라고 본다: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야) 이시다”는 고백이다. 후대 기독교인들에게 이 호칭(예수 그리스도)은 너무나 일상적인 익숙한 단어가 되어 도리혀 그 의미를 잃어버릴 위기를 당한다. 그러나, 제1세기 AD. 30-90년 어간의 당시 역사적 삶의 자리에서 보면, 그 근본적 고백(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은 결코 당연시 할 수 없는 엄청난 ‘걸림돌’(스칸달론)이었다.
2. 성서학자들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해 돌무덤에 봉인될 때까지 유대인의 한 남자로서, 갈리리출신의 랍비로서, 수많은 놀라운 교훈과 행동을 보임으로서 당시 유대사회에 새로운 생명의 열을 불어넣은 존재로서의 예수실재를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라고 부른다. 그리고, 죽음의 권세 넘어 부활하시고 제자들 가운데 현현(顯現) 하시면서, 새로운 제자공동체를 형성케한 예수실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 the resurrected Christ) 혹은 ‘선포된 그리스도’( the proclaimed Christ)라고 부른다. 부활절 이전의 예수(pre-Easter Jesus)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post-Easter Jesus) 사이엔, 무엇인가 결정적이고 인간의 합리적 ‘역사이성’이 뚫고들어가 해명하기 불가능한 어떤 신비한(?) 일이 발생했다. 기독교 신앙은 그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에 따라서 그 운명과 성격이 결정되는 종교라고 말 할 수 있다.
3. 오늘 우리가 내건 주제는 3가지 과제를 우리들에게 묻는 셈이다.
(i) 복음서에 담겨 있는 다양한 ‘역사적 예수의 교훈과 행동’의 핵심 본질이 무엇이라고 이해하는가?
(ii) 죽임당하신 예수를 하나님이 일으켜 부활시키셨다는 대담한 초대교회의 목숨건 증언 에서 , ‘부활’ 혹은 ‘부활하신 분의 현현’을 어떻게 이해 하는가? 다시말하면 ‘부활’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실존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iii) ‘부활절 이전의 예수’(역사적 예수)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선포된 그리스도)의 상호 관계성에서 ‘불연속적 연속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 ‘역사적 예수’의 다양한 면모와 그 분의 현존이 가져온(담지한) 본질적 새로움
1. 복음서가 증언하는 역사적 예수의 면모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서 그분의 존재와 행태(行態)의 놀랍고 비범하고 신성한 실재를 나타내고 있다. 복음서가 일반적 의미에서의 객관적 서술형식의 예수전기(Biography on Jesus)가 아니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증언한 초대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신앙고백적 전기’일지라도, 그 안에는 역사적 인물이었던 예수의 뚜렷한 4가지 면모를 보여준다.
(i)육신과 정신의 병자를 고쳐주는 영적 치유자로서 예수(Jesus as the spiritual healer)
(ii) 율법의 본래적 의미를 새롭게 드러내시며 가르치신 지혜의 교사로서 예수( Jesus as the wisdom teacher)
(iii) 하나님 나라 운동의 선구자와 그 나라의 실재를 현존케한 예언자 예수(Jesus as the social prophet and the bearer of Kingdom of God)
(iv) 자기몸을 희생함으로 죄로인해 막힌 담을 허는 제사장으로서 예수 (Jesus as the mediator Priest)
2. 지난 교회사 2,000동안을 회고하거나, 한국 현재 기독교를 뒤돌아볼 때, 개인 크리스도인 과 교회공동체는 위의 적어도 4가지 가장 본질적인 예수의 면모중 일부만 강조하거나, 남어지 다른 면모는 부정 혹은 폄훼하는 과오를 저지른다. 건전한 교회, 건강한 예수 복 음 공동체는 위에 언급한 4가지 면모를 통전적(統全的)으로 이해하고 고백하는 예 수상(像)을 회복해야 한다.
3. 위에서 언급한 ‘역사적 예수’의 4가지 행태를 통해 드러난 ‘본질적 새로움’은 무엇인가?
예수의 교훈과 행위속에서 어떤 새로움이 그 제자공동체로 하여금 그들신앙의 토양이었던 유대교를 떠나게 하고, 당시 지중해 문명권의 다른 종교들로부터 구별되는 특수성을 지 니게 하는가?
(i) 하나님 아버지 신앙과 직접적 교통의 길 -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동안 ‘종교의 본래적 기능’이라고 말 할수 있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간역활기능’을 철폐시키고, 사람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직접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가르쳤다. 성전, 사제집단, 경전권위, 종 교전통을 상대화시켰고, 그 신성불가침을 무효화시켰다. “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 렘에서도 말고, ... 오직 영과 진리로서 예배하라.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찾으신다” (요 4:23-24)
(ii) 생명가치 곧 온 천하보다도 더 중요한 영혼의 무한한 가치와 사랑의 절대윤리 -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다”라는 말로서 당시 유대교의 근저를 무너뜨렸다. 여기에서 ‘안식일’이란 인간의사회적 삶 속에서 궁극적 권위와 가치를 대변하는 것이다.( 종교, 국가권위, 법체계와 법질서, 종 속을 요구하는 절대적 이념들).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은 마침네 “서로사랑하라!”는 사랑의 절대계명으로 완결된다. 예수의 몸과 삶은 자기를 비워 투명하게 함으로서 하 나님의 실재가 사랑이심을 드러내 보이셨다.
(iii) ‘하나님의 나라’ 단어로 총괄표현된 정의롭고 평화로운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 예수의 짧은 33년의 생애와 교훈은 ‘하나님의 나라’ 가 하늘에서 처럼 땅에서도 이뤄 지이다 라는 행동하는 기도의 연속이었다. 십자가 사건은 그 행진의 피할 수 없는 결 승점 이었다. 예수종교는 창조된 현실적 세계, 곧 역사적 현실세계를 포기하거나 폐기 처분하고 타계지향적으로 역사를 외면하는 종교가 아니다. 역사현실을 하나님의 창조질서 곧 정의 자유 평화 사랑의 공동체로 변화시키려는 우주적 비젼 속에 산다.
[3] 십자가 처형사건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좌절이었는데, 그 이후 도대체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
1. 신약성경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사건과 세상의 현실을 절대로 미화하거나, 종교적인 신화 적 위로말로서 근거없는 ‘종교적 허구의 환상’을 갖게하지 않는다. 도리혀, 너무나 솔직 하고 처절하게 진실을 보도한다. 맨 처음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공동체의 베드로 첫설교 가 그것을 증언한다(행2: 22-24). 엠마오 길을 걷던 젊은이의 낙담그대로다. “나사렛 예 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 이거늘, 우리 대 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24:19-21A).
2. 신약성경의 증언을 종교사기집단의 위조문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초대 교회공동체의 원초적 증언고백은 진실의 고백이다. 그들은 모두 예수의 처참한 십자가 죽임당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희망과 기대는 완전 끝장 난 것이다. 거기엔 무슨 예수의 위대하고 숭고한 윤리적 교훈을 집대성하여, 그가 남긴 유지만이라도 계승해 나가자는 영웅담이나 학자들의 다짐이 털끝만치도 없다. 도리혀, 자기 신분의 위험을 느끼고 숨어서 은거하고 도피하고 현실적 생계유지 문제 때문에 생업에 복귀하는 모습을 그대로 고백한다.
3. 한무리의 인간집단이 그 어떤 체험을 증언함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이익이나 보상이 주어지는 것 아니고, 도리혀 자기 신상의 위험, 조롱담함, 박해받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음을 진지하게 생각 한다면, 두가지 중의 하나가 남게된다. 하나는, 그들의 증언이 아무리 진지하더라도, 흔히 정신병동에서 치료받는 정신질환자들이 그들 자신에게는 진지하고 리얼하게 체험되었다고 말하듯이 그들이 정신병리적인 집단적 환각상태(hallucination)에 빠진 경우 이라고 가정해볼 수 있다. 그러나, 심리의학적으로나 종교신비체험연구에서 비젼(vision)과 환영(apparition)은 정신병환가가 보이는 ‘환각’(hallucination)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의 숭고한 윤리적 실천, 고매한 자기동일성을 견지하는 인격적 정체성, 자기희생적 봉사, 솔직 담대한 증언등 삶의 열매를 볼 때, 그들이 예수부활의 ‘환각’을 일으켰다고 말 할수 없게 한다. 그들은 현대 인간 이성과학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체험적 실재’(experiential reality)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4. 도대체 부활절 새벽 미명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가 처형된지 며칠만에, 예수 갈릴리 제자들 가운데 새로운 생명운동이 일어났고, 몇주안에 십자가에 처형당한 그분이 실제로 ‘메시야였다고 진정한 주님이었다”고 증언하는 이 이해 할 수 없는 사건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합리적 역사이성과 실증적 과학사상으로 무장된 현대인들에게 그들의 행동과 기독교의 발생은 오늘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거림돌’(스칸달론)이고 ‘어리석은 맹신자’들의 ‘거대한 신화적 스캔들의 우연한 확장사건’으로 볼 수밖에 없는 ‘불편한 주제’이다. 그러나, 좀더 진지하게 그들의 증언에 현대지성인들도 귀기울여 보아야 할 점이 많은 것이다. 가장 주목해야 할 점들을 명시하면 아래와 같다.
(i) 초대교회 처음 증언자들은, 예수의 부활사건의 발생가능성이, 신적존재인 예수 자신의 내면적 생명력이 작동하여,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았다는 신화적 ‘종교창시자 의 초능력’을 말하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장사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존경하고 사랑했던 스승 예수가 ‘진실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ii) 그들의 고백적 증언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새로 운 창조적 사건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를(예수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4)고 고백증언한다. 위 성구의 후반부 의미는, 예수의 지고한 사랑, 헌신, 신실, 참된 삶은 죽음이 지배하기엔 너무나 지고한 것임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뜻이다. 부활증언의 신약성경 핵심은 “하나님이 예수 를 죽은자들로부터 다시 살리셨다”( God raised Jesus from the dead)는 것이다. 이 근본적 고백은, 부활사건은 인간의 합리적 설명요청을 거부하는 배타적 창조사건이 라는 뜻이다. 부활신앙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신실성을 믿을 것인가 말 것 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iii) 복음서의 부활전승 가운데 ‘빈무덤 설화’가 말하는 예수 몸의 부활증언에도 불구하 고, 그 부활(resurrection)은 단순히 죽은 시신의 소생(resuscitation)이라고 증언하 지 않는다는 점이다. ‘새로운 형태의 육체’(new mode of physicality), ‘변화된 영 체’ (transformed spiritual body)라고 증언 고백한다. 부활이전의 역사적 예수 몸과 부활체 예수의 몸 사이엔 ’불연속적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말이다.(고전15:42-49)
(iv) 초대교회 제자들의 부활신앙에서 간과해서는 않될 중요한 점이 또 하나 있다. 처음교 회 신도들의 부활신앙의 더 중요한 관심은 개인의 생명이, 특히 의롭게 살다가 희생당 한 생명이 죽음 이후엔 어떻게 되는냐의 사후관심 문제보다 더 중요한 관심의 지향성 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옛시대를 지배하는 악의 지배권, 혈육적 원리의 삶, 불의한 힘의 논리, 위선과 사악함의 옛시대가 종말론적으로 끝나고, 새로운 생명의 시대가 동텄다는 승리와 희망의 외침이었다. 비록 아직도 옛 세력은 맹위를 떨칠 지라도, 승부는 이미 결정되었다. 정의와 사랑이 거짓과 미움을 이긴다는 것을 확신하는 세계관의 근본혁명의 변화를 선언하는 고백이었다.
(v) 부활의 가능성문제나 사실성 문제를 생각할 때에 유념해야 할 점은, 부활증언의 진실성 판단을 소위 ‘과학적 세계관’의 실증적 검증가능성 여부에 맞긴다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자연과학이란 가시적 현실세계를 일정한 설명패러다임을 가지고 가장 정합적으로 논리 일관성있게 설명하는 잠정적 ‘작업가설 체계’이다. 진정한 과학이론은 언제든지 보다 정합적이고 고차원적인 ‘설명이론체계’가 등장하면 이전의 ‘작업가설체계’를 바꾸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진정한 과학정신은 실재(reality)를 닫혀진 체계로 보지 않는다. 실재는 열려져있고, 정태적 완결형태라기보다 형성중인 과정적 실재이다. 인간의 합리적 실증과학이 모든 것의 신비를 다 판정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태도는 과학적 태도가 아니라 과학이름을 도용한 하나의 절대적 ‘종교적 신념’이기 때문이다.
(vi) 복음서의 부활증언 전승자료와 빈무덤에 관련된 보도자료에 일치성이 없는 것은, 약점이라기 보다는 도리혀 ‘부활’의 진실성증언의 역설적 증거라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치 살인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수십명의 증언자들이 미리 단합된 조작증언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증언서술은 서로 상이하며 관점이 다르며, 위치가 다름으로 차이성이 있게된다. 그 증언의 다양성과 차이성은 증인들의 허위증언의 드러남일 수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증언자들의 신빙성의 원인으로 채택된다. 지혜로운 판검사는 꾸미거나 담합하지 않는 거치른 증언 속을 관통하는 핵심적 진실을 읽어낼 수있는 것이다. 하물며, 땅 위에서 발생한 형사적 사건에 대한 증언서술 정도가 아니라, 부활사건이라는 전대미문의 신비한 하나님의 사건에 있어서랴. 4개의 복음서 증언자들은 서로다른 공동체의 ‘삶의 자리’에서 체험전승된 내용을 전하고 있으며, 후일에 경전으로 집대성될 줄 모른 상태에서 증언되고 있는 자료들이기 때문이다.
(vii) ‘역사적 예수’는 기독교신앙을 영지주의 에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며, 부활신앙은 기독교신앙을 윤리적 휴매니즘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안전핀 역할을 하여 지킨다. 대지에 깊이 뿌리 박은 나무만이 푸른 창공으로 가지를 뻗혀 하늘높이 자란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진진한 공부는 신앙의 굳건한 ‘대지’에 대한 공부요, ‘부활의 그리스도’는 푸른 창공에로 뻗어나간 생명나무 공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