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천 기장신학연구소 소장 ⓒ베리타스 |
“종교개혁역사 책을 얼핏 보면 루터, 칼빈, 파렐, 베자 등 온통 남자 이름뿐입니다. 그러나 사건 속으로 좀 더 들어가면, 그 사건들을 품어낸 또 다른 존재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기장신학연구소 이재천 소장이 종교개혁의 이면에 숨겨진 ‘여성’과 ‘여성성’을 끄집어냈다. 또 ‘여성성 회복’이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 요청된다고 역설했다.
먼저 이 소장은 개혁을 도왔던 2명의 여성을 소개했다. 마가렛 공주(Marguerite de Navaree, 1492-1549)와 르네(Renée de Este, 1510-1575).
왕의 누이였던 ‘마가렛’은 정치적 음모와 타락으로 점철된 절대왕정의 지배집단 속에서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참 교회를 회복하려는 개혁 세력의 보호자를 자처했으며, 그녀의 영향력 덕분에 프랑스에서는 개혁 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가 여러 해 동안 지연되었다. 그녀의 고귀한 정신은 딸 달베르(Johanna d’Albret)d게 이어졌다. 달베르의 아들 앙리 4세가 낭트 칙령(1598)을 발표함으로써 개신교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였던 것. 또 마가렛의 영지 네락(Nérac)은 청년 칼빈이 개혁운동에 참여하도록 영향을 주었던 르페브르를 만난 곳이기도 했다.
또 다른 여성 ‘르네’는 루이 12세의 딸이자 마가렛의 조카로서 개혁사상을 지닌 인물들과 어울렸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칼빈이었다. 르네는 당대의 지성인들을 초대해 자신의 영지에서 모임을 연 이후 30년 동안, 그 모임에 참석했던 칼빈과 서신을 통해 정신적 교류를 나눴다. 임종 직전의 칼빈이 남긴 두 통의 편지 중 하나도 르네에게 보내는 것으로, 이 편지는 자신이 병으로 약해져 남의 손을 빌리고 있는 데 대한 사과로 시작해, 개혁신앙의 자유를 위해 힘써 달라는 간곡한 부탁으로 마무리 된다.
이처럼 칼빈은 여성들과 동역하는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오늘날 칼빈의 이미지가 ‘날카롭고 신경질적이며 권위적인 남성의 모습’으로 굳어진 데 대해 이재천 소장은 “그의 초상화 탓”이라며 “초상화 대부분이 병 때문에 비쩍 말랐던 생애 후반기에 제작됐다”고 말했다.
또 “칼빈의 성격이 날카로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린 소녀와도 같은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며 이러한 ‘여성적 감성’은 그의 신학 세계에 투영됐다고 말했다. 칼빈이 중세교회의 교회론을 거부하면서도 어거스틴의 ‘어머니 교회 이미지’만큼은 신중하게 받아들여 발전시켰다는 것. 이 소장은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눈에 보이는 교회(the visible church)의 본성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용어로서 ‘어머니’를 사용하며 ‘어머니(교회)가 우리를 인태하고, 낳고, 가슴에 안아 젖을 먹여 기르고, 육신을 벗을 때까지 안내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 것을 예로 들었다.
이러한 ‘여성성’은 목회현장과 종교개혁 현장에서도 발견되는데, 제네바에서 26년 동안 목회하며 갈등에 휩싸일 때마다 칼빈은 어머니와 같은 희생적 자세로 대응했다. 또 저마다의 개성이 대단했던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을 칼빈이 품고 화합시켜냈기에 개혁교회의 틀이 갖춰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재천 소장은 칼빈의 ‘여성성’이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오늘의 교회는 모든 것을 힘의 관점에서 보는 남성적 사고방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며 “이러한 모습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교회변혁은 ‘자기 부정’의 정신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 정신은 온갖 아픔을 품어 새로운 생명의 싹을 틔우는 ‘어머니들’의 가슴에 본래적으로 살아있다. 그렇다면 교회의 희망은 우리 안에 이미 자리하고 있는 것”이라며 글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