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와 도요히코 목사 사회헌신 100주년 기념 한국심포지엄 ⓒ 백아름 기자 |
▲ 가가와 목사의 손자 가가와 도꾸아끼씨가 발표하고 있다 ⓒ 백아름 기자 |
고베의 빈민촌에서 한 평생 빈민들과 울고 웃으며 빈민 선교 운동을 펼친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 그가 사회선교에 헌신한 지 벌써 100주년을 맞았다. 이에 예장생협, 청어람 아카데미, 바른교회아카데미는 27일 오후 명동 청어람에서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의 사회선교 헌신 100주년 기념 한국 심포지엄'을 열었다.
심포지엄에서 발제를 맡은 김재일 목사(예장생협 이사장)는 '왜 지금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인가'를 주제로 가가와 목사의 삶을 조명했다. 김 목사의 말에 따르면 가가와 목사(1888-1960)는 대학시절부터 어려운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해 빈민촌에서 봉사했다. 그러나 얼마 후 건강 상태가 급속하게 나빠져 진단을 받아보니 폐결핵이었던 것. 당시 치료제가 없었으니 사망 선고를 받은 거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극적으로 살아난 그는 요한 웨슬레 등의 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한 뒤 22살에 고베의 빈민촌에 들어가서 빈민 운동을 시작했다.
가가와 목사는 가난과 질병과 범죄가 난무하는 고베에서 살면서 마을 사람들의 어려운 형편을 도와주기 위해 자신의 소유를 이웃들에게 나눠주었고 빈민들을 위해 식당을 열어 운영하기도 했다. 또 그는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펼치고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구호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그는 "내가 제일 하고 싶은 일은 주민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하며 그들의 생활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라며 "곧 다가올 겨울에는 이재민들과 함께 가건물에서 고통을 나누고 , 빈민촌의 고뇌를 나도 함께 맛보는 기 원한다. 또 그들의 삶의 현실에 대해 과학적으로 조사하여 그 사정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빈민 운동과 노동 운동 뿐 아니라, '예수의 친구회'와 같은 선교 단체를 설립해 일본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또 소비자 생활협동을 비롯하 의료 생협 등 모든 협동조합 운동을 일으켰고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시대에는 도쿄에서 '전국 반전 동맹'을 결성해 평화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한 목사이자 사회운동가였다.
또 그는 평생에 걸쳐 유아교육과 사회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어린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교육은 어린이들에게 오염되지 않은 영혼의 한 조각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빈민촌의 고아들을 늘 돌보았고 1924년에는 어린이 권리를 제창했다.
김 목사는 가가와 목사에 대해 "사회적 실천과 체험적 신앙에 기초한 기도, 이것이야말로 가가와 도요히코를 특징짓는 두 단어"라고 말했다.
끝으로 김 목사는 "가가와 목사는 체험적 신앙을 바탕으로 평생 독서와 집필과 사회 활동과 전도운동을 초지일관 전개했다. 교인은 많으나 그리스도인으로의 삶의 실천이 부족한 오늘날의 보수적 한국교회와, 사회적 비판은 많으나 기도와 치열한 자기관리가 부족한 진보적 한국교회에, 가가와 도요히코의 삶과 그가 걸었던 길은 시대와 나라를 초월해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또 다른 도전이라 생각하여 그를 소개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가가와 목사의 손자인 가가와 도꾸아끼씨가 발제자로 나서 '손자가 회상하는 목사로서의 나의 할아버지 그리고 일본 교회에 미친 영향'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가가와 도꾸아끼씨는 발제에서 "나의 할아버지가 펼쳤던 모든 운동은 '아픔에서의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며 "그는 이웃의 아픔에 대해 그들과 같이 아파하고 그들을 돕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었다"고 전했다.
또, 도꾸아끼씨는 "그는 '종합성'을 바탕으로 일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것이 옳은가,저것이 옳은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이념과 영역을 넘어서 손을 잡는 것을 원했다"며 "그는 다양한 영역에서 운동했지만 '영역을 넘어서 일해보자'고 했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양희송 실장(청어람 아카데미), 햐야시 게이스케 작가가 각각 '그리스도교 입문 서평','비그리스도인 작가가 본 가가와 도요히코'를 주제로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