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재 교수(한신대 명예) ⓒ베리타스 |
김경재 교수(한신대 명예)가 불교 잡지 <불교평론> 최근 호에 논문을 게재했다. “불교와 기독교의 이해협력에 보탬이 되길 기대하며” 썼다는 이 논문에서 김경재 교수가 두 종교간 대화의 매개로 삼은 신학자는 폴 틸리히(1886-1965)다.
20세기 위대한 변증신학자로 꼽히는 틸리히는 생애 말년에 일본에 방문한 후 그곳에서의 불교 체험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스도교와 세계종교들과의 만남>을 펴내기도 하는 등, 기독교와 타 종교간 대화에 관심이 깊었다.
이번 논문에서 김 교수는 틸리히의 신론(神論)에 입각해 기독교와 불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짚었다. 또 틸리히가 정리한 역사관의 두 유형에 따른 두 종교의 차이를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불교에 대한 틸리히의 직접 이해를 소개했다.
틸리히의 신론(神論)에 입각하여 두 종교의 공통점, 차이점 설명
틸리히의 신(神) 이해는 전통적 기독교의 그것과 달랐다. 전통적 기독교의 ‘초월적 인격신관’에 한계가 있다며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 범주를 벗어난다고 주장한 틸리히였다. 물론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에 있어서 철저하게 의인화된 신인동형동성적(anthropomorphic) 묘사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현실성을 생생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동기에서일 뿐, 성서는 하나님이 인간과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을 지닌 불가해한 존재임을 강조했다. 틸리히의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시다’라는 말로 집약되는데,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도 은유에 불과할 뿐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가장 직접적인 말은 ‘존재 자체’라고 강조했다.
김경재 교수는 틸리히의 이러한 신(神) 이해가 대승불교에서 궁극적 실재를 이해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물론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나,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이라 한다면 분명 과장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선불교 철학자 마사오 아베의 설명을 빌어, 대승불교에서 ‘궁극적 실재’를 가리키는 ‘공(空)’ 또는 ‘진여(眞如)’ 개념이 ‘끝없는 개방성’, ‘대상화 불능성’, ‘충만함과 비어있음의 대립을 넘어선 역설적 일치’를 강조한다고 설명하고, 이는 틸리히의 신 이해인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과 통한다고 주장했다. 궁극적 실재가 무한하며, 대상화가 불가능하며, 비움과 채움의 역설을 지닌다는 것은 기독교신학 특히 틸리히의 신학에서는 전적으로 동감하는 내용이라는 것.
그러나 차이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기독교에서 궁극적 실재(하나님)는 존재의 주체성을 잃지 않지만, 불교에서 궁극적 실재는 ‘연기(緣起)’ 그 자체이기 때문에 ‘공’과 ‘진여’로만 표현될 뿐 ‘존재 주체성’이란 허망한 망상이다.
두 종교의 뚜렷한 역사관 차이
틸리히의 ‘신론’에 입각해 두 종교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었다면, ‘역사관’에 입각해서는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틸리히는 역사관에 2가지 대조적인 유형이 있다고 보았다. 자연을 통해 역사를 해석하는 ‘비역사적 태도’와 역사 그 자체를 통해 역사를 해석하는 ‘역사적 태도’가 그것인데, 틸리히는 전자의 사례로서 중국의 도 사상, 인도의 브라만 종교철학, 헬라의 자연철학 등을 꼽고, 후자의 사례로서 조로아스터교, 유대 예언자들의 역사이해, 그리스도교 교회사에서 나타난 소종파들의 역사이해 등을 열거했다.
김경재 교수는 ‘불교’가 2가지 역사이해 중 전자에 속한다고 보았다. 비록 틸리히가 불교를 그 사례로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불교가 인도의 정신문화 토양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브라만 종교철학과 같은 과에 넣을 수 있다는 것. 이에 불교와 기독교는 역사이해에 있어 ‘대조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불교가 속한 ‘비역사적 역사해석’의 특징으로 틸리히는 ▲구원이란 시간과 역사로부터의 개인 구원이지 시간과 역사를 통한 공동체 구원이 아니라고 봄 ▲’자연’(혹은 초자연)이 실재(reality)를 해석하는 최고범주로 작동 ▲비역사적 역사해석에 상응하는 종교적 형태는 다신론이거나 범신론을 꼽았다. 또 기독교가 속한 ‘역사적 역사해석’의 특징으로는 ▲구원이란 역사 안에서,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악한 힘들로부터 공동체 구원 ▲공간보다 시간이 우위를 지님 ▲역사적 역사해석에 상응하는 종교적 형태는 철저한 유일신관이라고 봄으로, 두 종교가 대조적인 관계에 있음을 역설했다.
그러나 이처럼 불교를 ‘비역사적 역사해석’의 범주에 소속시키고 그 특징으로 이상의 것들을 열거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김 교수는 밝혔다.
그 이유로 불교적 실재관은 인연생기설(因緣生起說)에 입각한 실재관으로서 브라만 종교와 다르다고 말하며, “불교가 역사나 시간의 가치를 무시한다고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해탈에 도달한 불자가 ‘지금·여기’라는 중심점에서 사면팔방으로 시간과 공간을 확장 및 수렴하고, 그러한 중심들을 무수히 지닌 인드라망 안에서의 역동적인 진동으로서 파악한다고 보인다”고 밝혔다.
다만 틸리히의 ‘거친 요약’은 “역사가 이전에 없던 그 무엇이 출현하는 창조적 과정이요 목적지향적 성숙 과정이라고 보는 견해를 불교에서는 부정한다는 면에서 볼 때 유의미한 요약”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역사이해 중 무엇이 더 나은가? 김 교수는 “두 역사관의 우열이나 진위를 가리는 것은 말이 안 되며, 다만 두 유형에 차이가 있음을 서로 분명히 알고 배워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기독교가 인지할 점은, 시간은 전적으로 무시무종(無始無終)하며 만물은 인연생기법칙에 의해 생멸이 반복된다고 보는 불교에서 볼 때 기독교의 목적지향적인 역사 이해, 그리고 절대자의 역사경륜을 믿는 신앙은 거대담론적인 망집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틸리히가 말하는 불교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불교에 대한 틸리히의 직접 이해를 전했다. 틸리히는 기독교와 불교를 가장 대조적인 세계종교로 받아들였으며, 두 종교의 특색을 가장 포괄적으로 드러내는 말로 기독교의 신국(하나님나라)과 불교의 열반(깨달음의 경지)을 꼽고 두 개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열반에서 깨달음은 ‘동일성의 원리’가 지배적인 반면 신국에서 구원은 ‘참여의 원리’가 지배적으로 작동한다. 둘째, 열반은 ‘만물과 만인의 열반 안에서 성취’를 지향하는 반면 신국은 ‘만인과 만물이 신국 안에서 통일’을 지향한다. 셋째, 열반의 상징은 ‘존재론적 상징’인 반면 신국의 상징은 ‘사회적, 정치적, 인격적 상징’이다. 넷째, 불교의 자비는 고해에서 벗어난 보살이 아직도 무명고해(無明苦海)에 시달리고 있는 중생과의 동일화를 통해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앓음을 함께 하는 것이나, 기독교의 아가페 사랑은 용납할 수 없는 자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납하여 변화시키는 에너지다. 또한 이 에너지는 개인의 내면적 혁명만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혁명을 통한 외면적 해방도 동일하게 중요시한다.
논문을 마치며 김 교수는 “이상에서 불교와 기독교가 지닌 색깔을 틸리히의 견해에 따라 정리해 보았다”며 “유의할 점은, 틸리히도 강조한 바와 같이 한 쪽에 있는 특성이 다른 쪽에 전혀 없는 것인 양 단순화시키는 오류”라고 말했다. 또 “마사오 아베는 틸리히의 유형적 대비가 상당부분 오해에 기인한다며 비판하는데, 여기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은 다만 20세기 대표적 개신교 신학자인 틸리히의 불교 이해를 소개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