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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준]논문 <가난, 영성, 그리고 혼종성> 전문(1)

11월 6일 민중신학회 발표 논문 (향린교회)
가난, 영성, 그리고 혼종성:
토착화 신학 3세대의 이중적 극복 과제(2): 지구촌화, 탈식민주의 그리고 가난한 자”

― 박일준 (지식유목민/감리교신학대학)

* 본고는 발표용으로 작성된 글로서 출판을 위한 교정과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은 원고이므로, 인용이나 비평을 위해서는 저자(iljoon85@naver.com)에게 문의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1. 가난한 자의 주체.

우리 시대의 주체란 누구인가? 이전 세대에서 ‘시대의 주체’란 줄곧 ‘민중’이나 ‘민족’이었다. 그러한 주체 이해 속에는 주체와 자아 간의 명확한 구분이 전제 되어 있지 못했고, 주체란 자아의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측면으로 이해되어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는 전대의 느슨한 주체 이해가 보다 엄밀하고 치밀하게 구성되어져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고래로 “우리”라는 말의 경계와 정의를 구성하던 상황적 인자들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가장 근원적인 변화는 바로 ‘민족 개념’의 변화이다. ‘단일 민족’의 신화가 갖는 허구적 성격뿐만이 아니라, 그 단일 민족의 신화가 담지한 폭력성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민족(nation)이 순혈로 구성될 수 없다는 것은 생물학적 상식이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공감된 국민의 감성은 ‘민족적 통일성’의 이상을 단일 민족의 신화로 스스로 포장하며, 자랑스런 한국인과 자랑스런 한국의 브랜드를 찾고 만들어 내기 위해 거국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아왔다. 이러한 민족 신화의 가장 큰 수혜자는 아이러니하게도 현대라는 다국적 기업이 아닐까 싶다. 대한민국이 21세기 지구촌 자본주의 질서의 중심부로 편입되어, 지구촌 경제 구조의 상층부로 진입을 도모하면서, 우리 사회경제의 구조는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제 이주민 노동자 100만의 시대를 맞이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불거지는 불법체류자의 문제는 이제 비단 미국과 같은 서구 사회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한반도에서 엄연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되었다. (거의 의미상 논리가 안맞는 명칭이지만) ‘외국인 며느리들’이 우리 농촌을 지키는 거룩한 대모가 되어가고 있는 요즘, 우리의 민족 개념은 이제 이러한 추이 변화를 반영하여 변화해야 할 시점에 이르고 있다. 예수는 “누가 네 형제이냐?”고 물었다지만, 이제 우리는 “누가 우리 민족이냐?”를 진지하게 물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본고는 ‘민족’을 ‘가난한 자’로 주체적으로(subjectively) 규정한다. 왜냐하면 주체는 체재 질서 안에 포함되지 못하고, 체재 바깥으로부터 체재 내로 도발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즉 기존 체재가 ‘우리’의 경계 안에 포함하지 않는 자들이 역설적으로 ‘우리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토착화 신학과 민중 신학은 서로 노선이 달랐고, 추구하는 바가 달랐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큼은 공유했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곧 ‘상황이 주체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주체를 “민중”으로 보았던 민중 신학과 문화와 복음의 주체를 ‘민족’으로 보았던 토착화 신학은 그 주체 개념에서 ‘상황,’ 즉 민중이 처한 상황성 그리고 민족이 처한 상황성이 바로 주체를 낳는 모태가 된다는 점에서 만큼은 일치하였다. 상황은 늘 변하며, 그 변화하는 상황은 기존 상황에 이전 상황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상황적 요인들을 도입한다. 기존 체재는 ‘나’ 혹은 ‘우리’의 정체성의 경계를 권력적으로 공모하여 구축하지만, 그렇게 구축된 체재는 늘 변화하는 상황적 요인들에 의해 불안정하게 되고, 그 불안정을 야기하는 새로운 요인들을 체재 내로 흡수하여 기존 권력 체재의 안정성을 추구한다. 그러한 체재의 특성 상, 체재는 언제나 체재의 경계를 위반해 오는 새로운 요인들과 그리고 체재에 위협적인 내재적인 요인들 즉 기존 체재로부터 어떤 지위나 정체성을 부여받지 못하고 추방된 요인들과 자신의 경계를 협상(negotiation)해 나가면서, 체재의 안정을 도모한다. 상황성(contextuality)이란 그렇게 기존의 지식 체계로 규정되지 않는 것들의 도래를 의미한다. 민중 신학의 ‘민중’은 기존 자본주의 질서 하에서 체재 내로 규정되지 않았던 백성들을 역사의 주체로 삼으려는 의미있는 신학적 시도였다. 토착화 신학의 민족은 근대로부터 물려져 내려온 서구 제국주의 체재로부터 강제로 소환되어 퇴거명령을 받던 자생 문화(native culture)를 문화의 주체로 삼으려던 시도였다. 두 시도들에서 의미 있게 되돌아보아야 할 것은 민중 신학의 ‘민중’이나 토착화 신학의 ‘민족’이나 모두 당대의 기존 담론으로 규정되거나 정의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 규정될 수 없었고 정의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살아 활동하던 그 이름할 수 없는 것을 우리 시대, 범지구적 자본주의 제국 시대의 상황 속에서 이름한다면 그것은 “가난한 자”이다. 


 성서의 예수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포한다. 하나님 나라가 저희들 것이기 때문이라고. 여기서 ‘가난’의 논리는 매우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이 땅을 살아가는 대다수에게 가난이란 회피해야 할 혹은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지 결코 추구하거나 희구해야 할 그 어떤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진다는 선포는 이 세상을 등지고 저 세상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라는 현실도피적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여기서 ‘가난’이 무엇인지를 가리켜 주는 가난의 해석학이 요구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난의 해석학은 그 ‘가난’이 전혀 해석될 수 없는 것임을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해석은 의미의 다양하고 풍성한 지평을 열어주기 때문에, 가난이 함의할 수 있는 보다 넓은 의미 지평을 가져다 줄 뿐, 특정의 구체적인 그 무엇이 ‘가난’인지 아닌지를 판별해 주지는 않는다. 여기서 21세기 지구촌 자본주의 제국의 시대를 살아가는 ‘가난한 자’에 대한 이해는 곤궁에 처한다. 즉 ‘가난’을 말해야 하는데, 역설적으로 ‘가난’은 우리의 언어로 말끔하게 정의되지 않는다―aporia. 결국 이 시대 가난한 자들은 누구인가? 아니 이 시대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들이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자리는 어디인가? 가난은 구조의 문제인가 아니면 개인의 문제인가? 이 시대 신학은 가난한 자를 이야기 해야만 하는가? 등의 물음들은 ‘가난’에 대한 기초적인 정의가 이루어진 다음 대답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질문들인데, 우리는 처음부터 ‘가난’을 정의하기 어려운 난국과 더불어 시작한다. 


 어떤 것에 대한 정의(definition)가 갖는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논문의 내용들이 산만해지지 않고 일정한 의미 범위 안에서 소통력을 가질 수 있도록, 대략적인 가난에 대한 정의를 시도해 보자. 우선, 가난은 ‘없음,’ 가난한 자는 ‘없는 자’(one who is not)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없는 자’란 곧 ‘있는 자’와의 대조와 대비를 통해 그 의미를 획득한다. 이때 있는 자/없는 자의 구분은 제법 절묘하다. 있는 자(one who is)란 존재하는 자를 말하며, 존재란 그가 (갖고 있는 것이) 있음을 가리킨다. 역으로 없는 자(one who is not)란 곧 존재하지 않는 자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가난한 자란 곧 존재하지 않는 자를 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생생하게 삶으로 존재하지만, 그의 삶과 존재는 철저하게 ‘비존재’(non-being)로 간주되며, 그의 존재를 외면당하는 자를 말한다. 없는 자란 사람들이 갈망하고 간구하는 것을 소유하지 못한 자를 가리키는 상대적인 용어이지만, 이 상대적 결핍이 그 사람의 존재를 근원적으로 정의하는 절묘함이 바로 이 ‘없는 자로서 가난한 자’의 정의에 담겨있다. 그 상대적 결핍이 바로 그를 전혀 존재하지 않는 자로 간주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살아 존재하여도, 자신의 존재감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귀신같은 존재―그렇다. 가난한 자들은 21세기 지구촌 자본주의 체재 하에서 이 상황의 체재가 몰아내고 싶어하는 어떤 것으로서 귀신같은 존재이다. 바로 여기서 이 시대의 지배 체재와 연관하여 ‘가난한 자의 두 번째 정의가 형성된다. 상황의 지식은 바로 이 귀신을 ‘비존재’ 혹은 ‘무지의 산물’로 만들어 내몰아 내면서, 자신의 권력을 획득해 나아왔다. 지금 현재 우리의 모든 지식 체계(경제학, 사회학, 생물학, 물리학, 신학 등)는 모두 이 ‘귀신같은 존재,’ 즉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존재로 다루어서는 안되는 이 비/존재’를 ‘무존재’로 괄호치고 은폐하고, 각 분야가 다룰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미래에 대한 예측이나 전망을 구실로 실재와 세계를 규정하면서, 왜 이 학문분야들이 이 시대에 필요한 분야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를 통해 연구기금과 장학금을 모금하여 건물을 짓고 시설을 확충하면서, 시대에 군림한다. 따라서 없는 자로서 가난한 자의 정의는 이 시대 지배 체재 외부로 추방된 존재이다. 그것은 곧 자본주의 체재에 편입되어 일원이 되지 못하고, 풍성한 자본을 추구하는 사회의 그늘로 내 몰려 머리 둘 곳 없이 매일 매일 안식처를 찾아 떠돌아야 하는 노숙자의 삶으로 표상되는 그것이다.
 

2. 가난한 자의 표상들
 

가난한 자는 말하여질 수 있으되, 규정되지는 않는다. 현 상황의 지배 체재 바깥으로 추방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은 다양하다―(과거에는) 노동자, 민중, 창녀, 이주민 노동자, 불법 체류자, 다방 종업원,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 명예 퇴직자, 노숙자, 철거민, 노점상, 노인, 신용불량자 .... 그들의 수없이 다양한 이름들을 여기에 다 열거할 수 없으며, 그렇게 열거된 모두를 우리의 언어적 정의를 통해 정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하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자를 말하기 위하여 가난한 자를 정의하는 여러 다양한 방법들과 관점들 중 크게 세 가지를 고려해 볼 것이다. 먼저 힐라스(Paul Heelas)는 소비적 자본주의 안에서 영성과 가난을 말한다. 가난은 소비의 문화와 상극 혹은 반대로만 여겨지지만 힐라스는 놀랍게도 소비와 가난을 연결된 주제로 제시하고 있다. 둘째, 이정용은 가난한 자의 자리를 “사이”(in-between)에서 보고 있으며, 이중적 정체성의 사이에서 가난한 자의 삶을 그려주려고 노력한다. 셋째로 호미 바바는 지배 체재와 대항 체재의 이분법적 인식 구조는 전체의 권력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오해이며, 오히려 탈식민주의 시대의 가난한 자의 초상은 그 양 체재 사이에서 ‘혼종성’(hybridity)이라는 제삼의 힘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2-1. 소비하는 사회와 탈근대의 형성 그리고 가난한 자 - 폴 힐라스(Paul Heelas).

 힐라스(Paul Heelas)는 자신의 책, 『생명의 영성들』(Spiritualities of Life: New Age Romanticism and Consumptive Capitalism [MA: Blackwell Publishing, 2008])에서 뉴에이지 류의 생명의 영성들을 우리 시대 소비 자본주의와 주관적 웰빙(wellbeing) 문화와 연관하여 기술해 주고 있다.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변화를 설명하는 말들 중 “탈근대”(Post-Modern)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 속에는 적어도 근대 이후 권위(authority)의 전환기가 겪는 변화를 나타내는데, 어떤 이들은 이러한 변화를 “상업화, 대중야합주의 그리고 통합성의 상실”로 비난하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그 변화에 함의된 “반-엘리트주의, 고취(empowerment) 그리고 민주화”를 지적하며 환영한다. 이러한 변화가 가져오는 많은 것들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힐라스는 무엇보다도 “권위”(authority)가 외부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내부로 이동한 것을 중시한다. 그리고 “신”(God)은 더 이상 사람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각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 믿어지며, 그런 방식의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가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를 “생명의 영성들”(Spiritualities of Life)이라 부른다. 이 생명의 영성들이 추구하는 “표현주의적이면서 인본적인 가치들”(expressivistic-cum-humanistic values)은 이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체재 하에서 외면받는 어떤 것을 표상한다. 하지만 그렇게 추방당하고 외면당하는 것의 표상은 이 체재가 배제하는 것을 역으로 조명해주게 됨으로써, 자본주의는 그가 배척하는 이러한 표현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들의 필요성을 도리어 강화시켜 주고 있는 셈이라고 힐라스는 말한다. 이는 말하자면, 이중 구속(double bind)의 관계인데, 이 자리로 뉴 에이지 생명의 영성들(New Age spiritualities of Life)이 도래하여 자리 잡았다고 힐라스는 보고 있다. 이 생명의 영성들은 바로 이 시대 구조가 배척하고 경멸하지만, 이 시대 영혼들이 요구하는 것에 부흥하여 융성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과 연관하여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기독교적 실천과 믿음의 힘이 특별히 유럽 지역들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통 기독교의 몰락을 안타깝게 여기는 이들 중에는 뉴 에이지 생명의 영성 운동이 지구촌 자본주의의 탐욕과 맞물려 반기독교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한다. 실로, “내재하는 신(the god within)과 외재하는 하나님(the God without)은 의미와 권위의 절대적이고 다른 근원들로서 동시에 섬김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전통 제도에 기반하는 기독교가 이 시대 영적인 것을 갈망하는 흐름을 읽지 못했고, 그래서 자신만의 영성을 시대에 다시금 위압적으로 강요함으로써 이러한 몰락을 자초하였다는 비판도 역으로 가능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상품들을 통해 자신들의 꿈을 쟁취하고자 한다. 그 문화 속에서 삶(life)은 자본주의적 소비 문화를 위해 소진되고 탐닉된다. 사실 ‘차이’를 강조하고 부각시키는 문화는 이미 상업주의 문화 안에 널리 유행하고 있는 모토이기도 하다. “차이를 느끼라”고 하거나 “당신만의 차이를 알라”고 하는 광고 문구는 이제 우리에게 익숙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문화의 하층민 혹은 문화를 구성하는 기존 체재 바깥으로 추방된 사람들의 ‘차이’를 존중하고 그들을 위한 행동을 하라는 문구가 아니라, ‘당신의 고유한 진정성’을 상품 소비를 통해 드러내고 표현하라는 전형적인 상업주의의 모토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상품을 광고하는 현장에서만 통용되는 문구만은 아니다. 심지어 교육현장에서도 아이의 고유한 자질 계방를 위해 사용되는 모토이기도 하다. 각 개인의 잠재력이 고유한 방식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교육방법은 우리 시대 상당히 설득력있는 이론이다. 그렇게 탈근대 시대의 주체적 행복 문화(subjective wellbeing culture)는 시장 연구자들에게 상품을 어떻게 광고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방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의 전일성 회복을 위한 국선도 수련, 웰빙 스파, 병원의 영적 치료사 등 뉴에이지 류의 운동들은 상업화되고 자본화된 지구촌의 문화 환경 속에서 상당히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지구촌 자본주의의 시대에 적어도 우리의 정체성은 혹은 우리의 자존감은 소비의 양과 질에 심각하게 영향을 받고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재 안에서 소비 행위와 연합되어진 우리의 자아 정체성은 그 자체로 긍정적인 것도 그렇다고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도 아니라고 볼수 있다. 물론 “스스로를 소비하는 자아,” “소비자 경험들의 총합으로서의 자아,” “나르시스적으로 자신을 즐겁게만 하는 자아” 등으로 표현되는 우리 자본주의 시대의 자아상들은 소비에 매몰된 자아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라스는 창세기의 낙원 이야기 속에서 인류 최초의 자율적인 행동이 곧 보기에 먹음직한 음식을 “소비”하는 행위였음을 주지시키며, 비록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인간의 자율적 행동으로서 소비의 긍정적 측면을 조명하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소비문화의 기제가 되어 버린 듯한 뉴에이지 류의 운동 속에서 힐라스는 “표현주의적 인본주의의 선한 삶”(the good life of expressvistic humanism)을 본다. 표현주의적 이해의 핵심은 인간의 내면과 외면 사이의 이중성을 외적 표현에서 일치시켜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내면은 선하지만, 그의 표현 방식은 공격적이라는 식의 변명은 표현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전적으로 틀린 것이다.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떻게 존재하든지 간에 그가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의 본성 혹은 본질을 보다 더 잘 드러내준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표현주의적 인본주의란 인간의 핵심을 인간의 내면이 아니라, 인간의 표현이 이루어지는 표면에 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보자면, 표현되어지지 않는 것은 곧 그의 마음에 진정으로 담긴 것이 아니다. 이는 곧 ‘생명’ 혹은 ‘삶’의 진정성을 그의 표현들 속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표현을 위해 ‘보여지는 것’ 혹은 ‘외모’에 열성을 보이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소비지향적 문화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내/외의 일치를 찾으려는 표현주의적 인본주의는 단지 철학이나 인문학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서는 영성을 추구하는데, 바로 삶을 긍정하는 전일적 영성(holistic spirituality)이다. 이는 다른 말로 “내적 삶의 영성”(inner-life spirituality)인데, “성스러움의 시원적 근원, 말하자면 지금-여기에서 삶의 ‘경험-초월적’(meta-empirical) 심연들로부터 발산되어 나오는 것을 경험하기 위해 자신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영성을 말한다. 즉 ‘전일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의 다른 측면들을 “통합하고 조화하고 균형맞추”어 내적 삶의 영성이 그것들을 통해 흘러 나올 수 있도록 한다는 측면을 가리킨다. 이는 “몸과 동반되는 주체적 삶의 성화(sacralization)를 도모함으로써 자신의 마음과 몸과 영을 하나의 전체로 이끌어 내는” 것을 말하며, “삶의 기술을 통해 자기-실현을 찾는 것”을 말하며, 소비를 통해 삶을 소진하기 보다는 “자연적 영성이 고유한 삶을 채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우리 시대의 영성은 모든 측면에서 “인간의 행복”(human wellbeing)을 추구한다. 


 우리 시대 이러한 전일성 추구의 영성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적이다. 한편으로 “인격-중심적이고, 표현주의적이며, 인문주의적이고 그리고 보편주의적인 영성”에 대한 긍정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영성을 “자본주의의 추동을 받는 욕망의 충족” 혹은 “방종”(self-indulgence)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힐라스는, 뉴에이지 영성들의 예를 들면서, 전일성을 추구하는 영성은 소비자들의 욕망에 결코 완전히 소진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양극단적인 평가 사이에서 힐라스는 전일주의적 생명의 영성은 “주체적 행복 문화”(subjective wellbeing culture)에 속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그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주체적 측면 혹은 주관적 측면이, 소비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경우, “소비자 문화의 방종적 측면”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인정한다. 


 여기서 ‘소비자’(consumer)를 어떤 주체로 간주하느냐에 따라 우리 시대 전일주의적 영성을 평가하는 입장이 엇갈린다. 즉, 소비자를 “수동적이고, 분산적이며, 포화되어있고, 다소 순응적이며, 자본주의의 구성과 전략에 취한 희생자”로 보는 입장과 “소비 활동의 자유롭고 해방적인 역할과 자율적인 자기-표현의 역할”로 보는 입장의 차이가 우리 시대의 주체적 행복추구 문화의 영성에 대한 입장 차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비를 자본주의 안에서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행위로 보는 이들은 소비 문화에 부정적이며, 적극적이고 해방적인 역할을 주목하는 이들은 소비문화에 긍정적 입장을 견지한다. 힐라스는 여기서 우리 현대의 지구촌 자본주의 상황 속에서 ‘소비’의 중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칼 맑스가 오래전에 인식했듯이, 사실 소비는 곧 “생산”이다. 물론 소비하고 소진하는 행위는 귀결적으로 생산을 촉진하기도 하지만, “적극적이거나 긍정적이거나 창조적인 (소위) 소비자는 일하는 중이다,” 말하자면 직무를 수행하거나 표현하거나 생산하거나 제작하거나 세공하거나 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소비와 자기-실현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어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확고한 구분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것은 소비하는 주체의 내면에서야 가능할 것이다. 소비의 대상을 보고 탐닉해 들어가는 마음과 내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자아의 잠재성을 외부적으로 실현해 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소비를 취하는 마음은 외부적으로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비와 자기-실현을 경제 통계치에 담겨진 수치를 통해 구분해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 내적 실현의 가장 근접한 예가 ‘예술 활동’일 것이다. 예술 행위를 통해 부가가치를 올리려는 마음과 예술 행위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외적으로 표현하고 실현하려는 행위는 선뜻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분명 예술 행위를 위한 소비 행위가 있다. 전시실이 필요하고, 공연장이 필요하고, 무대 장치가 필요하고, 조명이 필요하고, 표현을 위한 ‘쇼’ 즉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해 보여지도록 조작된 쇼가 필요하다. 하지만 진실한 예술 행위는 그 내면의 잠재성을 표현하기 위해 세계의 영적인 면을 접촉한다. 즉 예술의 외적인 소비 행위는 바로 이 영적인 접촉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예술을 위한 소비 행위가 예술의 목적으로 인해 정당화 될 수 있다면, 우리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한 방식으로 소비 행위를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비 행위 자체를 내면의 표현과 등가 시킬 수는 없다. 다만 소비하는 행위만을 놓고, 그 행위가 소비지향적이라고 낭비적이고 방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교육 과정은 ‘소비’를 유발함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소비는 바로 “생산적 자아” 혹은 “자아의 생산성”을 유발하는 것으로서 “자아-수련”(self-cultivation)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이는 모든 소비 행위를 정당하고 올바른 것으로 범주화하려는 단순한 시도가 아니라, 맹목적으로 소비 = 사치와 낭비와 방종으로 도식화하려는 이원론적 사고 방식은 21세기 지구촌 자본주의의 소비화 시대에 무조건적으로 적절한 것은 아님을 말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속적 영성들의 출현”을, 즉 “이 세상주의적인 유형의 전일주의”를 동반하는 영성, 그러나 제도 종교의 영성과는 자뭇 다른 형태의 영성의 출현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러한 영성의 기반에는 “주관적 행복(추구)의 문화”(culture of subjective wellbeing)가 놓여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소비 문화 자체에 대한 긍정과는 다소 궤를 달리한다. 즉 영성을 향한 갈망은 사실 기존 문화의 병폐("ill-being")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이 영성은 현실 사회와 문화가 “불-편”(dis-ease)하다고 해서, 지금 여기의 사회와 문화를 전적으로 거부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왜곡된 삶의 질서가 느껴짐으로 인해 비뚤어진 균형을 맞출 기회를 찾게 된다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 물질주의적 관점으로는 중시될 수 없는 삶의 영적인 차원이 드러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로 지금 여기의 삶을 하나의 성스럽고 유기적인 전체로 느껴가는 변혁(transformation)을 추구하게 된다. 실제로 “미국의 가정 주부들은 정체성, 목적, 창조성, 자기 실현, 심지어는 자신들이 누리지 못하는 성적 즐거움마저도 누릴 수 있다―물건 구매를 통해”라고 증언하는 프리단(Betty Friedan)의 조사를 인용하면서 힐라스는 소비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을 조명한다. 이런 맥락에서 ‘바로 지금 여기의 삶’ 속에 담지된 성스러움을 찾고, 자본주의 체재 하에서 소비 행위 자체를 원죄로 간주하지 않는 생명의 영성 운동 류는 소위 “세속주의”(secularism)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힐라스가 긍정하는 소비의 행위는 ‘물질주의’나 ‘세속주의’가 말하는 것보다 더한 어떤 것을 도입한다. 그것은 바로 일상의 한 복판에서 현현하는 성스러움의 자리이다. 소비의 행위가 긍정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소비를 통해 그 성스러움의 현현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지 결코 소비 자체에 대한 찬양이 아닌 것이다. 


 소비 문화에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이들의 입장이 직면하는 비판은 흔히 “엘리트주의”(elitism)라는 비판이다. 왜냐하면 이 시대 소비를 창조적으로 누릴 수 있는 이들은 지구촌 자본주의 시대에 경제적 기득권자일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와는 별도로, 또한 국가가 부유해질수록 민주적 원리와 포괄주의적 원리에 입각한 인문주의적 윤리의 중요성이 점차 중요해진다고 한다. 말하자면, 소비의 창조적 측면과 결합한 전일주의적 영성이란 곧 부유한 나라들의 국민들이나 언급할 수 있는 류의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들에 직면하여 전일주의적 영성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제공하고 있는가?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주체성의 신성화”(the sacralization of subjectivity)이다. 다시 말해, “성스러움의 내재”(the sacred as immanent)이다. 이는 영성(spirituality)은 곧 “삶-자체”와 동일하다는 통찰을 반영한다. 즉 삶의 영적인 측면은 삶의 깊이들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지, 결코 삶 너머의 초월적 지평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곧 바로 ‘여기-지금’에 삶이 놓여있고, 영성은 바로 그 삶에 기반한다는 통찰이다. 이는 전통적 유신론의 영성과 전혀 맥을 달리한다. 후자는 지금 이 세계와 구별된 초월적 세계가 이 세계를 “위하여”(for) 존재함을 주장한다면, 전일주의적 영성은 바로 지금 이 세계가 영적인 세계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영’에 대한 이해 변화가 전통적 유신론에 기반한 기독교의 몰락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네그라프(Wouter Hanegraaff)의 말을 인용하면서, 힐라스는 뉴에이지 류의 종교적 영성이 증가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정확히 종교가 제공해 왔던 것,” 바로 우리 “일상의 삶 가운데서 사람들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해주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바로―지금―여기’의 영성은 지금-여기를 맹목적으로 수긍하고 순응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로 지금 여기에서 각 사람의 고유한 삶의 질을 “변혁해”(transforming) 나가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혁은 “하나님의 길”이 아닌 “나의 길”임을 인식한다. 이는 내 삶의 “진정성”(authenticity)을 회복하는 윤리를 말한다. 즉 바로 지금 여기의 영성을 강조하는 생명의 영성(spiritiuality of life)은 “표현주의”(expressivism)와 “인본주의 윤리”(ethic of humanity)를 혼융하는 전략을 구사하는데, 말하자면 내 삶의 진정성 혹은 내 삶의 진정한 자아로 경험되어지는 것은 머리로 아는데 그쳐서는 안되며, 오히려 삶의 모습으로 표현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내 삶의 진정성이란 내 자신의 이기적인 즐거움의 추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유념하는 것이다. 내 삶의 행복이란 즉 나의 진정한 삶을 계발해 나가는 길은 곧 각 사람이 자신들의 영성을 경험하는 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성이란 곧 삶을 변혁시켜 나가는 힘을 의미한다. 삶의 변혁이란 내 삶을 원자적으로 고립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고통과 절망이 내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듯, 내 삶의 행복과 해방이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철저하게 체득하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내 삶의 변혁은 내 주변인들의 변혁을 수반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주변인들의 고통과 좌절이 상존하는 한, 내 삶의 진정한 행복과 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통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자들 즉 다른 사람들은 “영적 전체의 현현들”(manifestations of the spiritual whole)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혁의 영성이 이전 세대 반문화의 저항적 영성과 궤를 달리하는 것은 그러한 변혁의 영성적 삶이 언제나 “주관적-삶”(subjective-life)과 관계있음을 주목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전일주의적 변혁의 영성은 세상을 변혁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거나, 지배 문화에 저항하는 대안적 문화를 형성하려던 집단과 공동체 중심의 운동으로부터 개인의 내적 변화에 주목하는 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는 각 개인을 집단이나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부’로 혹은 구성원으로 바라보기 이전에 각 개인을 “특이성”(singularity)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각 개인의 고유한 진정성 혹은 진정한 자아를 주목하는 것은 곧 각 개인의 고유한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외적인 해방의 (사회)구조적 조건들에 운동의 역량을 결집하던 방식이 아니라, 각 개인이 자기-책임감을 발휘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자유의 여지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변혁’(transformation)의 초점이 이동하는 것이다. 


 이를 “자아로의 전회”(turn into oneself)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이러한 자아로의 전회의 이면에는 전체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가, 때로 나찌 독일의 경우처럼, 집단적 폭력성의 광기로 분출되었던 전체주의의 역사를 전제한다. 아울러 해방 운동이 개인의 변혁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데에는 예를 들어 영국에서 60년대 대항 문화 운동이 사회 변혁을 외치면서 기존 문화와 대항 문화 간의 “이원론적”(dualistic) 대립 형태로 나아갔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자신의 대항적 문화 운동을 ‘해답’으로 설정해 놓고, 기존의 모든 문화적 관행들을 잘못된 구습에 대한 “집착”(clinging)으로 간주하는 것은 비판 의식이 도리어 자기중심적 제국주의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자아로의 전회는 결코 내면의 자아에 머물자(“stay within”는 것이 아니라, 외부를 넘어서자(“beyond the outside”)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로부터 부여되는 외적 조건들에 짖눌린 자아를 본래의 진정성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억압의 조건들을 넘어 초월해야 하는데, 전통적인 가르침이 세상을 넘어 저 세상으로 초월해 나가는데 초점을 두었다면, 생명의 영성은 바로 진정한 초월은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내면으로 파들어가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러한 역설의 역동성은 곧 생명의 영성은 “사회화(socialization)를 통해” “외부를 안으로 끌어들이고”(outside in), 표현을 통해 “안의 것을 외부로 표출하는”(inside out) 것에 있으며, 이는 곧 내재화를 통해 “내부로부터” 표현할 것을 주장하는 인본주의 윤리성의 핵심이다. 따라서 생명의 영성이 주장하는 내면으로의 전회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인간 이해가 담지한 개인의 사적인 내면(privacy)과 공공성(publicness)의 이분법적 이해를 넘어서야 한다. 이는 내면에 충실하는 것은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근원을 동일한 내면으로부터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웃과 동료들과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의 본래 자리로 복귀하기 위함이다. 이는 곧 외면적 모습의 치장을 통해 내면의 공백을 화장(make-up)하려는 소비주의의 허상을 넘어서서, 또한 구체적 실천의 방법을 결여한 공허한 대의(ideal)를 외침으로서 빈곤한 내적 성숙을 감추려는 사회 운동 류의 모순을 넘어서서, 일상 삶의 구체적인 자리에서 가장 진솔한 내면의 모습으로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다시금 성찰하기 위함이다. 진정한 자아는 외부의 조건들이 주는 강박감에 쫓겨 내면으로 도피하는 류가 아니다. 진정한 자아는 가장 깊은 내면에서 모든 생명과 공유하는 생명의 근원적 힘을 발견하고, 그 힘이 이 지구촌 땅 위를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공유되고 있음을 성찰한다. 따라서 내적 성찰의 생명의 영성은 자본주의의 죄악들을 눈감고 넘어가기 보다는 오히려 그에 대항하는 문화를 창출하고자 노력한다. 이 전일주의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회비도 내야하고 기부금도 내야하기 때문에 ‘돈’은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prerequisite)이지만, 미국 어느 카드 회사의 광고 문구처럼, 세상에는 “돈으로 살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다”(There are something which money can buy). 즉 그러한 운동에 참여함으로 깨달아지는 “생명의 영”(spirtuality of life)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일상적 삶의 “보다 높은 것들”(the 'higher' things)을 드러내고 그에 따라 살도록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가 갖는 진정한 의미는 곧 “다른 이들을 위한” 의미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전일주의적 영성(holistic spirituality)가 이 시대에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도전은 곧 우리 지구촌 자본주의 시대의 ‘가난’의 문제이다. 2006년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상위의 2%가 전체 지구촌 부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고, 나머지 세계 인구의 절반은 전체 부의 겨우 1%를 가지고 나누고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극단적이고 과격한 급진주의 형태의 종교가 그 가난한 절반의 고통과 고뇌를 해석하고 경감시키는 일을 감당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형태의 종교가 이 극단적 상황 속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적 형태의 종교가 표방하고 있는 가치들은 곧 보다 부유하고 보다 교육수준이 높고 보다 착취적인 엘리트들의 가치와 연합되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진보적 종교의 영성들이 가난한 이들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실패하고 있는 한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진보적 영성들이 가난한 영혼들에게 설득력을 잃고 있는 자리에서 내적 삶의 성숙을 도모하는 전일주의적 영성은 특별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힐라스는 주장한다. 지구촌의 각박해지는 민중들의 삶에 호소력을 지닌 배타주의적이고 과격한 성향의 소위 보수적 영성들이 지구촌 문명들 간의 대결 구도를 조장해 나아갈 때, 삶의 근원적 영성을 통해 신론이나 기독론 혹은 구원론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서로 동일한 한 인간’이라는 근원적 자리에서 대화를 도모할 여지를 전일주의적 영성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서구적 영성의 길도 그리고 동양적 영성의 길도 아니라는 점에서 “제삼의 길”(a third way)이라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특정의 배타적인 종교성에 집착하지 않고, 인간의 주체적인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생각과 뜻과 실천을 모을수 있는 동력을 전일주의적 영성은 담지하고 있는 것이다. 배타주의적 성스러움의 힘이 포괄주의적 성스러움의 힘을 압도해 나아갈 때 지구촌의 국가들은 생명력을 갖고 살아가기 어렵다는 것은 많은 상상력을 요하지 않는다. 이때 전일주의적 내면의 영성은 “우리는 모두 똑같지만, 그러나 다르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우리가 함께 모여 차이를 차별의 조건으로 만들어가는 지구촌 자본주의의 악마적 조건들을 변혁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가난’은 21세기 자본주의 체재 하 상업주의 사회 속에서 공통의 주제로 대화를 엮어갈 수 있을 것이다.

2-2. “사이”(in-between)로서 가난한 자―이정용

문화적 인종적 다원주의 시대의 신학적 패러다임으로서 이정용은 중심부의 신학이 아닌 주변부의 신학(a theology of marginality)을 주창한다. 이는 신학 담론의 핵심 혹은 중심을 지향하여 나아가는 중심주의적 접근 방법을 지양하고, 시대의 변방 혹은 주변부를 신학 담론의 핵심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이다. 우리 시대 신학이 붙들고 나아가야 할 것은 이 시대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계층이 아니라, 중심에서 밀려나 가외 혹은 부차적인 조건으로 밀려난 주변부 계층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이정용이 말하는 주변성은 성과 계급과 경제 그리고 혹은 종교에 의해서 주변화되어 버린 사람들의 조건을 말한다. 이 주변성은, 계급이나 성이나 문화나 인종적 차이에 상관없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조건들의 차이를 넘어 공통적으로 경험되는 것이기에 인간의 “공통 기반”(a common ground)이 될 수 있다고 이정용은 역설한다. 이 공통의 기반은 우리 각자가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적 구조에서 비롯되며, 그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공통의 기반이 바로 ‘주변성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삶의 이야기적 구조가 구성하는 ‘나’의 구조는 “다원적”(pluralistic)이다. 내가 처한 삶의 상황은 결코 단일하고 규격화된 구조가 아니며, 내 삶의 이야기는 나의 다중다단한 상황, 즉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아빠로서, 제자로서, 선생으로서, 운전하는 자로서, 남자로서 갖는 삶이 상황들의 중층성이 빚어내는 어긋남과 불협화음들을 통해 형성되지만, 그 다양한 삶의 이야기들이 내 삶의 이야기 속에서 ‘나’를 관계로 엮어지기에 또한 “관계적”(relational)이기도 하다. 특별히 이정용은 자신의 책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갖는 이중적 정체성을 다원주의적이고 관계적인 ‘나’의 정체성 구조로 제시한다. 이 이중적 정체성은 한국계 미국인만 갖는 이중성은 아니지만, 그 이중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삶의 무게와 고통의 이야기가 그와는 다른 이중적 정체성을 짊어진 이들에게 ‘같지만 다른 이야기’로 공감되어진다. 바로 이 공감은 그들이 미국 사회에서 격는 주변적 신분의 이야기이며 이는 그들의 “고난, 거절, 차별 그리고 억압”의 이야기들이라는 공통의 삶의 구조로부터 비롯된다. 이중적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의 고통은 우리의 인종 이해 혹은 인간 이해가 혹은 중심부를 차지한 이들의 인간 이해가 단일한 정체성으로 엮어진 정형화된 인간 이해를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단일하고 정형화된 인간 이해가 차별적 구조의 근간이 되는 이유는 그들의 범례화된 인간 이해 규격에 들어맞지 않는 범주의 인간들을 주변화시켜, 차별하고 억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별적 인간 이해 하에서 주류(majority)와 비주류(minority)는 인구 수나 인구 비율의 문제가 아니다. 정형화된 인간 이해의 범주에 맞는 이들이, 그 귀속 집단에서 인구의 몇 퍼센트를 차지하든지와 상관없이, 바로 주류를 형성한다. 또한 아무리 많은 숫자의 인구라 할지라도, 그 모범화된 범주의 인간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비주류 곧 종속된 집단이 된다. 이러한 사례의 가장 극단적인 경우를 우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있었던 인종차별주의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숫적으로 소수인 유럽계 사람들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아프리카 계를 지배하며, 주류로 군림하였다. 이러한 주류/비주류의 인종주의 이분법이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의 중심/주변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버릇이 스테레오타입, 즉 고정관념을 통해 중심을 주변보다 중요한 것으로 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정용은 이 고정 관념의 전복을 그의 책 Margianality에서 시도하고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중심을 고정시켜 놓고, 그 중심에 자신을 동일시시키면서, 그 중심부에 귀속되지 못하는 다른 이들을 차별하려는 인식적 성향이 내재해 있다고 말하면서, 이정용은 각 제종교의 창시자들은 바로 이 중심성의 우상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하였다고 보았다. 이정용은 그동안 무시되고 외면 받았던 주변부와 주변의 삶과 영혼들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주변성’을 보다 더 강조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강조를 통해 중심으로 치우쳐 있는 균형을 회복시키고자 함이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중심과 주변은 서로를 통해 창출되고 존재한다. 사실 중심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다. 특정의 중심만을 중심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자기중심적 시각으로 세계를 분별하려는 모든 유기체의 생물학적 본능인지도 모른다. 각자가 각자의 자리를 “중심으로” 세계를 구성해 나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사실 중심은 하나가 아니다. 따라서 다중심성(“multiple centers”)을 통해 세상을 구성한다면, 모든 자리는 곧 중심이고 주변이다. 자기중심으로 볼 때, 각자의 자리는 중심이지만, 타자의 눈에는 ‘주변’이다. 문제는 이러한 중심/주변 구별의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터만이 중심이라고 고집하고 강요하는 문화 제국주의의 이력이 여전히 지구촌 자본주의의 시대에 강력하게 남아 있어서, ‘차이’(difference)를 차별과 특권의 조건으로 삼으려는 전략이 사람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성적, 인종적, 경제적, 정치적, 교육적, 직업적, 연령적 차이들이 자신의 고유한 조건들을 특권화 시키고 군림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독립되어 해방되지 못하고, 기존 체재 안에서 야합하고 결탁하는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변성의 경험’은 나-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내가 주변부된 입장에서 상대방의 차이를 이해하는 경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특권의 기제로부터 “소외받는”(alienated) 경험이 되거나, 그들을 억압하는 지배자의 경험이 된다. 그래서 “WASP” 즉 앵글로 색슨계 백인으로서 개신교인(white Anglo-Saxon Protestant)은 근대 제국주의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특권과 권력을 21세기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에서 영속화하기 위해 기를 쓰는 ‘중심부의 사람’으로, 그 범주에 들지 못한 이들은 식민지 백성의 유산을 물려받아 억눌리고 억압받는 자의 저주받은 삶을 짊어진 주변부의 사람이 된다. 그리고 세계는 그 둘로 갈라진다. 


 다인종 다문화 사회 속에서 이상의 주변화 과정이 이루어지는 단계를 로버트 파크(Robert E. Park)는 “경쟁, 갈등, 적응 그리고 동화”의 4단계로 도식화한 바 있다. 이는 미국 문화를 “거대한 도가니”(the big melting pot)로 보면서, 다인종 다문화가 결국 하나로 동화되어 거대한 혼합 문화로 나아갈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정용은 파크의 모델에서 ‘주변화’ 혹은 주변성이 전체 동화 과정들 속에서 “단지 하나의 임시적 조건과 하나의 ‘사이’(in-between) 단계”로 간주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즉 주변성이 출현하는 것은 전체 동화 과정이 아직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크의 모델은 보고 있다. 바로 이것이 파크 모델의 결함이다. 우리는 미국 문화 속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나 혹은 미국 원주민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비주류 혹은 소수자들로 간주되는 인종이나 문화가 전적으로 동화되어 소멸되거나 주류 문화의 일익으로 편성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한다. 오히려 비주류의 문화는 거대한 주류 문화의 압박에서 스스로 사라지거나 혹은 저항하거나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되며, 보다 더 주목할 것은 그들의 문화적 저항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미국 원주민들의 문화가 쇠퇴하긴 했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며, 그들에 대한 억압과 박해의 기억들이 잊혀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나 라틴계 미국인들의 경우 점차 그 인구 숫자를 더해가면서, 이제는 앵글로-색슨 중심의 미국 주류 문화를 넘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화는 여전히 억압과 박해와 핍박의 기억들을 잊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파크의 경우처럼 단순히 완전한 동화의 최종 단계를 그려내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크의 모델은 인종적 문화적 주변화(marginalization) 과정을 조망해 볼 수 있는 모델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기여가 있다. 중요한 점은 바로 ‘거대한 도가니 이론’의 실패가 주변화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이다. 거대한 도가니 모델은 곧 유럽인들, 보다 구체적으로, 앵글로 색슨 계열의 유럽이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모델과 이론이었다. 따라서 그에 기반한 동화 이론은 결국 다른 문화와 인종들이 동화 과정을 통해 사라질 것을 예고한 셈이다. 


 동화 이론이 예측하는 첫 번째 단계는 ‘경쟁’이지만, 이러한 경쟁 단계는 그 전에 “만남”(encounter)의 단계를 전제한다. 이 만남의 단계는 단지 중성적이고 객관적인 만남이 아니라, 기존 문화의 주변부로부터 출현하는 이에게는 중심 집단의 주류 문화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주변 집단의 소수 문화를 거절하라는 압박의 경험으로 일관된다. 이러한 만남의 단계를 지나면서, 조성되는 경쟁의 단계란 곧 “연약하고 가난한 자를 주변화시키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대중 매체들은 이 경쟁 단계를 통해 성공한 소수 문화의 사람들을 부각시키지만, 그렇게 성공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소수의 사례들을 선전함으로써 이 경쟁의 체계가 담지한 억압의 기제를 은폐하고, 성공하지 못한 자들의 삶을 ‘실패’로 규정하며 책임을 그들 자신에게 전가하려는 기존 기득권 중심 체계의 전략을 답습하고 있을 따름이다. 더 나아가 기존 문화가 ‘차별주의’의 기제를 담지하고 있다면, 적응이란 바로 차별의 기제가 얼마나 치밀하고 철저한지를 깨닫는 단계에 다름 아니다. 주변부 문화의 사람들이 중심부 문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인종차별의 기제들은 그들을 더욱 더 소외시킬 따름이다. 바로 이러한 소외의 경험은 유색인종의 이주민 2세대들의 삶 속에 절절히 배어 있다. 따라서 적응이란 이 차별의 기제에 철저히 적응하고 순응하며, 자신들의 상처와 아픔에 재갈을 물리고 침묵하며 살아가는 삶을 강요하는 것 이외에 다름 아닌 것이다. 파크 모델은 따라서 주변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험을 담아내지 못한다. 


 여기서 이정용은 다인종 다문화 속에서 주변부를 살아가는 사람의 경험을 “사이”(in-between) 경험이라 제시한다. 이는 자신이 인종적으로 물려받은 소수민 문화와 자신이 살아가는 땅의 주류 문화 사이에서 양 쪽에 귀속되어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험이다. 미국인의 국적을 갖고 있기에 미국인이지만, 인종적으로 주류 인종이 아니기 때문에 거절당해야 하는, 수용과 거절의 이중적 경험은 한국민의 정체성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 부모의 문화와 인종을 물려 받았기에 한국민의 일부이지만, 미국에서 살았던 경험과 문화 탓에 그들은 온전한 한국인으로 수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인으로 수용되면서 거절당한다. 따라서 두 세계 “사이”(in-between)를 살아가는 경험은 그 어느 쪽에도 전적으로 귀속되지 못하는(neither-nor) 경험으로서, 사이를 살아가는 자는 결국 “비존재”(a non-being)으로 간주된다. 이 “실존적 비존재성”(existential nothingness)의 경험은 그 주체에게 “자기-소외”를 경험케 하며, 그렇게 소외된 자아는 두 세계 사이에서 갈가리 찢겨져 “분열된 자아”(divided self)를 경험케 하고, 이는 곧 “문화적 정신분열증 환자”(cultural schizophrenic)가 되게 한다. 


 그 어디에도 전적으로 귀속되지 못하고 사이 세계에서 어정쩡하게 머물러야 하는 주변인의 삶은 우리는 중심/주변의 이분법적 도식 속에서 해법을 구하려 할 경우,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이정용은 중심/주변의 어느 한쪽을 긍정하거나 부인하는 전략 대신 중심‘과’ 주변 ‘사이’ 자체를 성찰한다. 그 주변인은 중심과 주변 ‘사이’에서 주변성(marginality)이란 곧 그 ‘사이’를 구성하는 “경계 자체”이다. 그 ‘사이’는 그 자체로 어떤 실체나 존재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언제나 두 세계 간의 관계가 설정될 때에만 “덤으로”(in excess) 출현하는 그 어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각과 관점에서 언제나 비존재로 누락되는 그 어떤 것이다. 이정용은 바로 이 ‘사이의 덤'을 주목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사이’를 통해 두 세계의 그 어떤 ‘관계’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이에 놓여진 주변성은 하나의 “넥서스”(nexus) 혹은 관계망이며, 스스로는 존재치 않으나 타자와의 관계맺음 속에서 존재하는 그 넥서스에 대한 “상징”이며, 그것은 독자적인 존재를 갖고 있지 않기에 언제나 그의 존재는 관계 맺는 주체들의 조건들에 의존적이고 개방적이다. 바로 이 사이의 관점으로 중심/주변의 세계를 보자면, 사이의 존재는 그 모든 곳에 다 귀속된 존재이다. 즉 그 사이의 주체는 중심과 주변 모두를 구성하는 근원적 실재로서 그 모든 곳에 “중첩”(in-both)된 존재이다. 이 중첩성은 ‘사이됨’의 부정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중첩은 모두에 귀속된 존재감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자칭 중심의 사람들이나 자칭 주변부의 사람들이 사이에 낀 ‘나’의 주체를 어떻게 정의하던지 간에 이 중첩된 존재로서 주체는 자신을 스스로 ‘사이에서 중첩된 존재’로 적극적으로 규정해 나아갈 수 있다. 사이에서 중첩된 존재로서 주변인의 정체성은 중심부에 동화되거나 저항하는 대항 세력으로서 주변부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서, 사이 존재 자체의 주체성을 드러낸다. 중심부에 대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관계로서 규정되는 주변부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중심부에 종속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사이에 중첩된 존재는 이렇게 종속된 존재로서의 주변부적 존재에 대한 이해를 전복하여 적극적으로 사유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중첩된’(in-both) 존재로서의 사이 이해는 곧 중심/주변의 상대성을 통찰하면서, 두 세계 모두를 긍정하며 품으려는 시도이다. 이 사이에 중첩된 존재의 눈으로 다양한 문화와 인종들을 바라본다면 모든 사람은 곧 사이에 중첩된 존재로서 “주변인”(a marginal person)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주변인은 전일적(“in-beyond” 그리고 “holistic”)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곧 ‘사이’를 구성하는 중심/주변의 경계 조차도 넘어서서 그 모든 존재의 상대성들을 품고 조망하는 자리이다. 이는 곧 중심/주변의 상대성이 엮어내는 그 모든 차이들을 조화로 품는 것을 말한다. 이를 기술하는 전통적 어휘는 “초월”이지만, 그러나 이 초월은 그 모든 차이들을 뛰어 넘어, 차이없는 저 세상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세상의 모든 차이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것을 갈등이나 경쟁으로 풀기 보다는 조화로 풀어낼 수 있는, 그래서 그 모든 차이가 차별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방식으로 그는 “해방된 사람”(a liberated person)이 된다. 그 해방된 사람은 곧 사이(“total negation”)와 중첩(“total inclusion”)의 역설을 넘어서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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