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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수]인문학과 신학 - 힘과 선

인문학과 신학 – 힘과 선

글 / 양명수 교수(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발표 / 2009. 11. 19 이화여대 기독교학부 콜로키움

1. 
BC 5-6세기의 인문주의는 종교의 비신화화의 결과다. 사람들은 신을 믿을 때 그 힘을 보고 믿지만, 플라톤에게 신의 신다움은 그 덕에 있었다. 그리하여 힘과 선의 관계가 역전된다. 정의도 그 덕목에 포함되는데, 옮음과 아름다움을 포함한 최고의 덕을 플라톤은 선 즉 ‘좋음’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에게는 좋음의 이념, 그것이 신이었다. 정의롭지 않은 신에 대한 비판은 플라톤이 그리스 신화에 가한 공격의 핵심이었다. 신이 있다면 반드시 정의로운 분이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신들은 아무리 소원을 들어줄 힘이 있어도 더 이상 숭배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으며, 교육적으로 매우 해롭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것은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에서 벗어나, 종교 역시 인간의 자유와 선함과 의로운 세상을 위한 지지자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와 같은 신 이야기의 변화를 통해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중심으로 인문주의를 펼칠 수 있었다. 그는 제우스와 아테네를 비롯한 많은 신들에게 제사지내는 것의 의미를 격하하고, 결국 인간 속의 신성한 능력인 이성과 지성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기를 권면했다.

힘이 종교의 핵심에 있다는 것은 <성과 속>을 쓴 엘리아데를 비롯한 많은 종교학자들이 밝혀낸 바다. 말하자면, 힘 숭배는 인간의 골수에 새겨져 있는 종교성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수 십 만년 수 백 만년의 긴 세월을 들지 않더라도, 이 땅에 태어나 사는 짧은 기간 동안에도, 힘이 필요하고 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최고의 해결사라고 하는 점을 사람은 충분히 경험한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도리는 경험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칸트는 악의 성향이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경험을 계산에 넣는 마음씀씀이를 가리킨다. 그것을 그는 근본악 또는 뿌리 깊은 악이라고 했다. 그런 마음씨가 오래된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밝히지는 못했지만, 도덕 판단에 경험의 요소가 들어가는 것을 그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불순함이라고 보았다. 그가 <실천이성비판>에서 말한 것은, 인간의 도덕성은 순수한 실천이성에서만 찾을 수 있고, 경험에서 나온 처세술과는 정반대라는 점이다.

그것은 퇴계도 마찬가지다. 퇴계는 인간 본래의 선한 성품(本然之性)은 하늘에서 품수된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이라는 것과 같다. 그런 성품의 발현에서 도덕적 선이 생긴다고 보았는데, 결국 경험적인 것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고봉과의 논쟁에서, 칠정을 악에 기우는 감정이라고 본 것은, 우리의 일상적 감정이라는 것이 경험의 축적에서 생긴 것이요, 뭐가 이롭고 불리한지 경험하여 몸에 익은대로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로 얼마나 깊고 놀라운 통찰력인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진화론의 지식은 없었지만, 인간의 경험이 이득 위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성향을 만들어 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에게 하늘에서 받은 선한 본성 말고 또 다른 본성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있다고 보았는데, 그는 그것을 주희를 따라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기질지성은 사람이 태어난 이후에 생겨서 본성처럼 자리 잡은 것이라고 보았는데, 결국 이 땅에 태어나 살면서 생긴 성향이라는 뜻이다. 인간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욕심을 부리고 자기 몫을 확실하게 챙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험이 축적되고, 그것이 하나의 깨달음이 되어서 근본적인 성품을 형성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는 도덕이 나올 수 없다고 퇴계는 보았다. 우리는 인문주의자들의 통찰이 결국 인간의 경험의 법칙과는 정반대 측면에서 인간답게 살 도리를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을 정의하는 말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이다. 이것은 신앙의 중심 개념이 힘에서 선으로 옮겨갔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힘이다’는 말은 없다. 물론 ‘힘’이라는 낱말을 하나님을 표현하는 서술어로 쓰기는 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이다’, 또는 ‘하나님은 힘이다’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랑의 경우에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도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하나님을 정의하는 말로 쓴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원시 종교나 신화시대의 신을 넘어 힘보다는 선을 더 중심 개념으로 삼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랑이야말로 선 곧 좋음에 생명력을 더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대표하는 단어는 힘보다는 사랑이요, 전능하신 하나님보다는 좋으신 하나님이다. ‘좋음’ 또는 ‘선’은 내게 물질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을 넘어, 도덕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선이라는 낱말에는 뭔가 내게 도움이 된다는 의미도 있지만, 정의로운 덕목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인문주의자들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힘을 우선적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독교가 보는 구원의 길이 인문주의가 제시한 인간 구원의 길과 일치하는 면이 있음을 암시한다.

기독교는 힘의 종교를 비신화화했지만, 인문주의자들이 볼 때는 여전히 신화적이다. 신을 선의 이념으로 보지 않고 인격체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전능한 신은 중요한 신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윤리적 궁핍과 물질적 궁핍을 해결해 주는 데 필요하다. 그런 문제를 도외시하는 인문주의는 엘리트주의가 될 수 있다.

3.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의 비신화화는 끊임없이 진행되는 것 같다. 그것은 종교의 핵심을 찾기 위한 작업이었으며, 언제나 종교에 매몰된 인간을 구하는 측면으로 이루어졌다. 구약성서는 바빌로니아 신화의 이원론을 비신화화면서 면서 종교 속에서 인간의 주체성과 책임을 강조하려고 했다. 그것이 창세기 아담 신화이고, 계약 사상이다. 예언자 전통은 미신화되는 종교의 제물을 마음의 제물로 바꾸고, 사랑과 정의를 강조했다. 인문주의자들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종교를 윤리로 바꾸는 한 측면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서의 예수는 성전 중심의 종교를 비신화화했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임을 천명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가톨릭의 미신화된 신앙을 비신화화했다.

그런데, 이런 비신화화에는 반드시 다시 신화적 요소를 찾는 역작용이 따라붙었다. 아담 신화에는 바빌로니아 신화의 이원론을 암시하는 뱀이 들어있고, 예언자 전통은 제사장 전통의 견제를 받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시 제도적 종교 안에서 이해되고,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영광의 그리스도로 바뀌었다. 종교개혁이 일으킨 비신화화는 복음주의를 내세우며 교회주의의 우상을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후 개신교는 다시 교회주의로 안착했다. 이런 경향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은 인간이 진리의 칼날을 견디지 못하고 언제나 미신적 요소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종교의 비신화화는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신화화가 삶과 신앙의 신비를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삶은 말로 다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앙은 도덕성으로 환원될 수는 없을 것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삶의 고통과 고난의 신비 그리고 그런 고난의 신비와 연관된 신앙의 신비는 종교의 신화적 요소를 언제나 필요로 한다. 신화라는 것이 어차피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을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신화와 비신화화는 언제나 공존함으로 그 풍성함을 유지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플라톤주의자 플루타르크가 델피 신전으로 돌아간 것도 그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미토스는 로고스로 나와야 하지만, 언제나 로고스는 미토스의 의미를 다 담지 못한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은 인문학을 비신화화한다. 그것은 바울이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은, 은총으로 윤리에서 해방되는 것을 가리킨다. 아퀴나스에게서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목적이지만 목표는 아니다.

고등종교가 고대 종교를 비신화하면서 전하려고 한 것은 깨우침이요, 마음의 전환이요, 영혼의 자유로움이었다. 그러나 그런 비신화화는 교육될지언정 사람들 사이에서 완전히 육화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고대 종교의 신화적 요소는 언제나 남아서 큰 위력을 나타낸다. 인간의 고난의 문제, 삶의 염려와 관련된 문제는 윤리적 요청보다 더 강하게 본능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점령하고, 종교에서 신화적 요소가 사라지지 않도록 붙든다. 윤리적 요청으로서의 신이 아니라, 삶의 요청으로서의 신이다. 하나님은 먹고 사는 문제에 시달리는 민중의 한과 고난을 알아주고, 자식 염려와 건강의 기원을 들어주어야 한다. 신은 초월적이어서 높은 도덕성으로 영혼의 자유를 이끄실 뿐 아니라, 인간의 삶에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의 형편을 알아주고 도와주는 존재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플라톤의 인문주의와 기독교 신학이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물질의 궁핍을 채워주시고, 윤리의 궁핍을 용서하는 하나님. 그것은 이념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문학에서 보면 신화적 요소다.

그런 측면을 표현한 것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이다. 세상이 존재하도록 하는 데는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이 있어야 어떤 일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사랑이 힘보다 먼저라는 것이 기독교의 신념이다. 하나님의 힘은 사랑의 힘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능(뭐든지 할 수 있는 힘)이시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한다. 사랑이 세상을 만들고 사랑이 세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주희의 성리학에서도 세상을 낳고 움직이는 원리를 인 곧 사랑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 인은 사람을 위로하거나 사람의 형편을 일일이 살피는 사랑은 아니다. 사랑은 좋음과도 다르다. 플라톤의 선의 이념에는 인격성이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인문주의가 이룩하려는 종교의 비신화화를 품고 있으면서 그것을 넘어 관계의 신비를 안고 있는 개념이다. 사랑은 관계를 전제로 한 개념이다. 좋으신 하나님이 일방으로 내게 필요한 것을 주는 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사랑이신 하나님은 나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측면이 더 크다.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쌍방의 관계를 가리킨다. 일방으로 가르치고 교육하는 말씀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듣고 그들의 사정과 형편을 살피며 그 영향을 받아 행하는 말씀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플라톤의 선의 이념은 인생의 목적이요 인간이 도달할 도덕적 목표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인생의 목적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사랑의 하나님은 힘 위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원시종교를 벗어나 선의 이념을 품고 있으면서 동시에 사랑에서 나오는 위로의 힘으로 인간의 물질적 궁핍과 윤리적 궁핍을 채워주는 분이다. 신학의 개념 언어를 넘는 성서의 은유적 언어의 효과이기도 하다. 기독교의 언어철학도 거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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