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중신학의 문제점
-민중신학 비판 그리고 공헌-
김영한 박사(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초대원장)
목차 Ⅰ. 민중신학의 방법론 Ⅱ. 민중신학의 공헌
1. 사회적 기본권의 의의
민중신학은 그 출발에 있어서 개념적이고 학문적인 서구신학에 대한 반동에서 나왔다. “민중신학은 책상에서가 아니라 고난의 역사 속에서 태어났다”(안병무). 1972년 유신헌법이 통과되고 그 이후에 긴급조치 발표, 언론통제, 교수 재임용제를 통한 반유신 교수 해임, 새마을 운동 등이 시작하던 때 1973년에 있었던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은 민중신학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 일어난 민중신학은 특히 탈 서구화를 신학적 방법으로 제시하여 한국에서 민중이라는 특이한 계층을 주제화하고 사회경제사적 방법이라는 마르크스적 이분법을 적용함으로써 한국적 신학의 사고를 펴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 역시 그 신학이 지니는 서구 사상사적 전통(여호아킴 피오리스와 재세례파운동 등)에서 벗어날 수 없다.
Ⅰ. 민중신학의 방법론
1. 민중의 한(恨)에서 출발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억압상황에서 형성되었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체험, 특히 한(恨)의 체험을 신학적 성찰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한이란 한국의 고난역사에서 유래한 사회심리학적 개념으로서 외국말로 번역이 불가능하다. 민중의 한이란 구약에서 나오는 개인이나 백성의 고난을 표현하는 애가(哀歌)와 다르다고 본다. 애가란 단순히 고난을 털어놓기만 하기 때문에 한의 노래가 아니다. 한의 노래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고난받는 심정을 기술하고 있다. 안병무에 의하면 애가는 고난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고난의 문제를 풀 수 있으나 한의 노래는 풀 수 없는 고난을 말하고 있다. 한의 경우,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고, 손이 있으나 도울 수 없고, 고통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가 없다. 한의 구체적인 실례는 ‘쌍놈’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은 항상 부패한 왕과 탐관오리로부터 억압당하였고, 착취당하였다. 압제의 역사가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착취와 고난은 숙명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질병처럼 불만족과 모순은 내면적으로 자라고 있다. 고통은 가슴 속 깊이 숨어 있다. 그리하여 쌍놈들은 한으로 가득 차 있다. 민중신학은 여인들을 한의 상징으로 본다. 여인들은 유교적 가부장적 체제 속에서 굴종과 천대를 받아왔다. 여인들은 가장 비인간적으로 대우받았으나 말없이 이 처우에 순응했고, 가정의 대들보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므로 귀신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대부분 여인들이다. 이들은 복수하고자 한다. 서남동은 피력한다. “민중신학의 주제는 예수라기보다는 민중이라는 것이다.”
2. 정치문화적 사회경제사적 접근
민중신학은 사회구조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진 자와 못가진 자라는 이분법적 사회관에 기초한다. 민중신학이 사용하는 민중 개념은 두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한 맺힌 피억압자요, 둘째는 역사의 주체이다. 민중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민중사관의 방법을 “전통적인 혹은 서구신학의 방법에서 벗어 나려는 몸부림”으로 이해한다. 이들은 서구 전통적인 신학의 방법을 형이상학적 접근으로 보고 “정치문화적 사회경제사적 접근을 시도한다.” 이들은 서구의 전통적 신학이란 “지배층의 특권”이며, “그들의 자기 방어와 민중지배의 무기”였다고 본다.
민중의 한을 푸는 방식은 성경적인 의미에서 아가페적인 방식이 아니고, 고난과 고통을 가한 자와의 인격적 대화를 통해서 상대방이 자기 과오를 인정하고 뉘우치고, 자기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이 한풀이는 민중들이 잃었던 자기 주체성을 의식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적으로 특권을 누리고 영화를 누리는 지배계층에 대한 저항으로 분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민중신학은 역사적 전환기와 진통기에 있어서 사회의 주변에 있는 대중들의 심리를 하나의 사회변혁의 도구로서 응집시키는 사회적 역동력을 지니고 있다.
3. 한국신학으로 자부(自負)
민중신학은 민중의 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서구신학과는 다른 한국신학이기를 자부한다. 민중신학은 민중이란 이러한 한으로 가득찬 사람으로 보고 있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한을 민중운동의 폭발적 진원으로 보고 이 한을 풀고자 한다. 그래서 이들은 “민중 이야기를 하나의 반신학(counter-theology)으로” 정립하고자 한다. 이들은 서구 전통신학을 “규범적 신학으로 정통과 이단을 가르고 교조와 교리를 규정하는 신학”으로 보면서, 민중신학을 “민중의 집단적 신앙의 경험과 한과 기쁨과 사랑과 소망을 서술하는 서술적 신학”이라고 규정한다. 이들은 민중신학을 “신학이 여태까지 철학과 형이상학 혹은 서구적 인식론을 도입하던 일로부터의 커다란 전환”이라고 본다. 이들은 민중신학을 “지배 이데올로기와 지식의 허위의식을 고발하고 민중의 편에 서서 민중의 아픔과 꿈을 증언하는” “한국의 일종의 정치신학”으로 정립하고자 한다.
4. 사건의 신학 ; 하나님 말씀의 신학과 결별
안병무는 마가복음 1장 14절-“요한이 옥에 갇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로 와서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파하였다”-을 마가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편집부분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마가가 갈릴리를 단지 지리학적 처소로만 아니라 예수 출현의 정치적 무대로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세례요한이 갈릴리의 왕 헤롯 안티파스(Herot Antipas)에게 체포되는 바로 그때 예수가 복음사역을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갈릴리는 예수 복음사역의 정치적 무대를 제공한다고 해석한다. 이처럼 민중신학은 갈릴리를 열심당원의 처소로서 예수 복음선포와 행적의 처소로서 기술하고, 예루살렘을 다윗 왕조의 권좌처소로서 현상유지(status quo)에 집착하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거부하는 독재정권의 처소로서 계급투쟁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민중신학은 세계와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교신학(missio dei theology)에 정향된다. 하나님의 선교신학에 으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전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민중시학은 변증법적 신학(dialectic theology)에 의하여 대표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theology of the Word of God)과 결별한다. 서남동과 안병무는 민중신학을 “사건의 신학”(theology of events)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건의 신학으로서 민중신학은 “민중의 고난과 부르짖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민중을 만나고, 현재적 그리스도를 체험한다.”
5. 하나님 개념의 변형
안병무에 의하면 “예수의 고난 밖에서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된다. 예수 사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해야 한다.” 그리하여 민중신학은 민중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서남동은 “하느님은 항상 가난한 자, 눌린 자의 하나님이다. 곧 하느님은 가난한 자, 눌린 자를 해방하시는 분”으로 본다. 서남동은 1980년 3월 “민중신학을 말한다”라는 대담(對談)에서 역사의 과정을 “사회경제사적으로 전개되는 하나님의 인간해방 과정”으로 본다. 서남동은 신은 민중 속에 내재하므로 민중의 소리가 곧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범신론적 입장”을 제시했다. “하느님은 역사를 통해 일하는 것이고, 이것을 극단적으로 확대하면 역사의 진행 자체가 하느님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하여 민중의 소리가 곧 하나님의 소리이며, 억눌린 자의 얼굴에서 예수의 모습을 보고, 창녀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새 생명에서 하나님의 존재하는 모습을 보고, 장일담이 1970년대에 나타난 예수라는 식으로 하나님을 범신론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민중신학은 “내가 예수를 재현한다”고 말한다. 각자가 내가 신이라고 본다. 해방자나 구속자나 대속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 신이 내재적으로 나의 고난당하고 억울함을 당한 존재의 양태로 존재한다고 본다.
6. 예수 개념의 변형
민중신학은 세례요한과 함께 예수를 “혁명가”로 해석한다. 세례자 요한은 당시 정권에 의하여 민중의 선동가로 보여졌기 때문에 투옥되었다고 본다. 예수가 민중 저항의 지역인 갈릴리를 활동무대로 한 것도 예수의 운명이 세례요한과 유사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예수가 앞으로 유대교와 로마 지배계급과의 갈등을 빚어 정치적 소란 혐의로 처형받게 될 것을 시사해준다고 본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이스라엘의 계급없는 사회를 시사(示唆)하는 것으로서 당시 민중들에게는 생생했다고 본다. 갈릴리의 복음 선포에서 예수는 오클로스(ochlos)인 민중을 만났다. 이 만남은 사건(event)이다. “예수가 주체이고 민중이 객체가 아니다.” “민중의 관점에서는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고 오직 우리만 있다.” (Ahn Byung Mu, Minjung Movement & Minjung Theology, 강연초록, 7) 공생애의 대부분을 갈릴리에서 민중들과 같이 보낸 예수는 결국에는 착취의 중심도시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지배계층과 대결해서 체포되고 처형된다고 본다.
성경에 의하면 민중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아니며, 민중의 고난 속에서 예수의 고난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예수를 구속자와 구주로 만남으로써 비로소 예수가 구속한 이웃인 민중을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민중신학은 예수와 민중을 동일시 해버림으로써 예수의 십자가를 집단으로서의 민중의 고난과 혼동하거나 민중의 고난 속에 해소시켜버리고 있다. 민중의 고난과 예수의 고난은 구별되어야 한다. 예수의 고난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스스로 선택한 대속의 고난이다. 이에 대하여 민중의 고난은 억울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경우에는 스스로의 무지와 불법에 의하여 자초된 고난이다. 그런데 민중신학은 민중의 고난을 마치 절대무죄한 자의 의로운 고난인양 지나치게 미화시키고 있다.
안병무는 예수를 민중과 동일시한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와 고난을 민중의 처벌과 고난과 연결시킨다. 예수가 고독했고, 도울 자 없이 끌려간 것처럼, 민중은 입이 있으나 말할 수 없었고, 발은 있으나 도망할 수 없었다. “우리는 고난받는 민중 속에서 고난받는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는 민중의 죄를 짊어지도록 민중에 의해 선택되었다.” (Ahn Byung Mu, Minjung Movement & Minjung Theology, 강연초록, 8)
서남동에 의하면 예수는 모세와 달리 민중의 지도자나 영웅으로 자처하지 않고 민중 속으로 내려와 자기 자신을 민중과 동일시 했기 때문에 예수가 민중이요 민중이 곧 메시아라는 신인동일사상을 내세웠다. (김영한, 김명혁, 이형기, 차영배 외, “한국 민중신학의 진단”, 「개혁사상」, 67)
7.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의미의 변형
민중신학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민중을 수탈하는 예루살렘 지배체제에 결연히 정면으로 도전한 정치적 사건으로 해석한다. (서남둥, “두 이야기의 합류”(1979), 「민중신학」, 54쪽)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란 반체제인사로서 지배계층에 의해 처형당한 정치적 죽음으로 간주된다. 그리하여 서남동은 출애굽사건과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갖는 기독교진리의 핵심인 계시적이고 구속사적 의미를 제거하고 사회경제사적 의미로 왜곡하고 있다. 바른 성경 주석에 의하면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지배계층과 대결하기 위하여 올라간 것이 아니라 유대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최종적으로 전파하고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한 종교적 대속적인 동기에 기인하고 있다. 그리하여 민중신학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민중과 혼동하고 있으며, 예수의 십자가 대속의 사건을 정치적 사건으로 왜곡하고 있다. 안병무에 의하면 “바로 민중의 고난 속에서 현재적 그리스도를 경험한다.” (Ahn Byung Mu, Minjung Movement & Minjung Theology, 강연초록, 9)
민중신학은 예수의 부활 사건도 정치적이고 사회경제사적인 사건으로 왜곡한다. 예수 부활사건은 죽은 자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 사건이 아니라 민중의 한이 저항의 힘으로 분출된 결집된 사건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을 때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예수를 버리나 소수의 민중들은 그들이 보고 체험한 것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예수 사건은 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120명에 불과하던 추종자들이 3천명으로 늘어났다. “예수-민중”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가 지배계층이었다고 공격하기 시작한다. 갈릴리의 민중들은 예루살렘에서 궐기하기를 시작했다, 이것이 예수의 부활이었다. 여기가 민중의 전환점이다. “민중은 더 이상 수동적이 아니라, 그들의 운명을 그들 손에 가지고 있다.” (Ahn Byung Mu, Minjung Movement & Minjung Theology, 강연초록, 9)
민중신학에서 예수 부활은 죽은 자가 다시 산 기적적인 사건이 아니라 “민중의 일어남”이었다고 본다. (Ahn Byung Mu, Minjung Movement & Minjung Theology, 강연초록, 10) 민중신학은 예수의 부활을 민중의 부활 속에 해소시켜버리고 있다. “마가는 민중부활을 예수 사건의 결과로서 일어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Ahn Byung Mu, Minjung Movement & Minjung Theology, 강연초록, 13) 민중신학은 예수 부활의 객관적 사건성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 부활은 만남을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다고 피력한다: “예수는 혼자 내기 개인적으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민중과 더불어 민중 속에서 부활했다.” (Ahn Byung Mu, Minjung Movement & Minjung Theology, 강연초록, 14) 그리하여 민중신학은 예수 부활의 인격적 사건을 민중사건 속에 해소시켜 버리고 있다.
8. 성령 개념의 변형
민중신학은 민중사건에 참여하고 해석하는 것을 “성령론적 역사적 해석”(pneumatological historical interpretation)이라고 부른다. (Ahn Byung Mu, Minjung Movement & Minjung Theology, 강연초록, 10) 서남동은 “성려의 제 3시대”라는 글에서 요아킴의 역사신학을 받아들이면서 구약은 성부시대, 신약의 성자시대, 그리고 1260년 이후에는 성령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본다. 서남동은 성령의 시대가 바로 앞으로 다가올 시대이며 이 시대가 바로 민중해방의 시대라고 본다. 그래서 설교나 세례, 성만찬이나 성경 메시지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는 시대라고 말한다. 이 시대는 민중이 해방을 누리는 시대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이후시대(post-christian era)라고 말한다. 기독교 이후시대라는 것은 바로 민중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령은 민중의 정신이며, 민중의 기운으로 해석되고 있다. 성령론적 해석이란 “내가 예수를 재현하는 것이고, 지금 예수 사건이 다시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 (서남동, “두 이야기의 합류”, 「민중신학」, 79)이라고 한다. 서남동은 “내가 지금 독재체제에 항거해야할 것이냐 여부를 놓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가를 결단하는 것이 바로 성령론적 결단” (서남동, “민중신학을 말한다”, 「민중신학의 탐구」, 한길사, 1983, 166)이라고 말한다.
민중신학자 서광선의 제자인 정현경은 성령과 귀신을 혼동하고 있다. 특히 1991년 캔바라에서 열린 WCC 제7차 총회에서 정현경은 한을 안고 죽어간 영혼들의 이름이 적힌 창호지에 불을 붙여 재로 날리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착취당하고 버림받은 애굽인 하갈의 영혼이여 오소서. 광주, 천안문, 리투아니아에서 탱크에 떠밀려 죽은 자들의 영혼이여 오소서.” 정현경은 무당 살풀이를 통해 성령을 불러내는 모독을 범했다. 정현경의 강연에 그 컨텍스트를 알지 못하는 총회 참가자 대다수가 기립박수를 보냈다는 데 경악을 금치 못한다.
9. 교회 개념의 변형
민중교회는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전태일의 죽음은 의식화된 학생들과 노동자들을 거리로 나가게 했다. 1971년에는 1,656건의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다. 의식화된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갈릴리교회가 시작되고, 민중들이 받고 있는 고난과 연대하는 운동이 발전하였다. (김영한, “한국교회와 민중신학”, 「개혁사상」, 한국기독교사상연구소, 1989, 19) 민중신학은 갈릴리교회와 예루살렘교회, 민중교회와 제도교회로 양분한다.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1987, 한국신학연구소, 164쪽) 민중교회는 노동자와 사회적 계층과의 유대를 강조하고 그들의 고난에 참여하고 1970년대의 유신독재정권에 대항하였다. 이들은 해방신학같이 노동자, 학생 등 의식화된 민중들을 사회부조리 변혁의 주체로 내세운다. 민중교회는 그동안 민주화운동과 노조운동에 있어서 수많은 귀한 생명들이 분신자살하는 등 극단한 투쟁방식을 취하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민중교회는 전태일 분신자살, 박종철의 고문치사 등을 민중사건으로 보고, 이러한 민중사건은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화산의 역할을 한다고 보고 있다.
민중신학은 그러면서 민중교회를 민중해방과 투쟁의 역사와 합류(合流)시키고 있다. 한국역사든지 일반 세계역사이든지 민중투쟁과 민중해방의 역사가 중요하다. 교회란 이러한 민중해방 역사가 일어나는 곳으로 본다. (김영한, 김명혁, 이형기, 차영배 외, “한국 민중신학의 진단”, 「개혁사상」, 71)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라는 거대한 일반 역사 속의 하나님의 선교의 사건 속에 민중운동과 합류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민중교회는 제도로서의 그리스도의 교회와는 차라리 구분하려고 한다. 민중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의식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고, 용서함을 받고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사는 중생한 신자의 경험이 없다. 또한 민중 공동체라는 민중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출애굽의 공동체(에클레시아)라는 기독교적 정체성이 없다.
10. 죄인 개념의 변형 : 민중과 죄인을 동일시
안병무는 복음서에 나타난 “오클로스”가 종교적 계층이 아니라 사회경제사적 계층이라는 것을 신약성경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통해서 주장한다. 그는 죄인을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죄인이란 “천한 직업, 가난함 그리고 병자 등 그 사회에서 소외되는 결과”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종교적인 죄와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것은 같은 경우의 양면이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서남동, “두 이야기의 합류”(1979), 「민중신학」, 94쪽)
죄란 한나미이나 이웃에 대하여 잘못을 범한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사적으로 착취를 당한 자에게 뒤집어 씌운 라벨(label) 같은 것으로 파악한다. 내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죄를 당했다고 보며, 사회경제사적으로 정치적 지배자가 피지배자인 약자에게 붙이는 딱지(범법자, 유신헌법 훼손자 등)가 “죄”라고 보고 있다. 사회정치적 구조의 모순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죄인에 대한 정죄가 없고, 죄인은 당당하며 회개할 필요조차 없다.
11. 구속사와 일반사의 혼동
“요한이 옥에 갇힌 후”(막1:14)의 바른 주석적인 이해는 안병무가 말하는 바 같이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 오시는 메시아를 증거하는 세례요한의 사역이 끝나는 때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제 예수는 세례요한의 증거를 받은 메시아로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메시아적 사역을 시작하는 것을 알리는 구절이다. 그런데 안병무는 구속사적 복음사역을 간과하고 신약성경의 모든 예수의 사역을 정치적인 사회학적 해방의 사역으로 혼동하고 있다.
서남동은 출애굽과 십자가 사건을 사회경제사의 차원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는 출애굽의 사건을 “억압적인 지배체제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고 반란 탈출한 노예해방의 사회경제사적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세를 하비루(hapiru)를 이집트의 압제에서 해방시킨 민족의 해방자로 본다. 안병무는 하비루란 민중으로서 이스라엘을 가리키지 않고 “백성의 계급”(a class of people)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하비루는 이집트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전(全)지역에서 살았다. 가나안 지역에 살았던 하비루도 붕건 통치자들에 의하여 노예화되었고 착취당했다. 이집트에서 살았던 하비루와 가나안의 하비루가 연대해서 옛 이스라엘의 부족 동맹(the federation of tribes in ancient Israel, amphictionity)을 세웠다. 이 부족동맹은 야훼 유일신 사상(a mono-Jawehism)을 세웠는데 이것은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정치적 측면을 지시한다고 해석한다. (Ahn Byung Mu, Minjung Movement & Minjung Theology, 강연초록, 4) 그리고 2백년 이상된 사사시대를 “원 이스라엘”로 보고, 이 계급 없는 사회를 민중공동체의 모형이라고 본다. 이 민중공동체는 다윗 봉건체제에 의하여 파괴되고 통일국가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 때부터가 민중에게는 고난의 시대의 시작이라고 본다. 왕국의 멸망 후 지배계급은 포로로 잡혀가고 백성들만 그대로 남아서 정복자로부터 땅을 분배받았으나 그들의 생활여건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이 백성들은 천대받는 자(am-ha arez)이었다. 민중신학은 이들을 민중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안병무의 구약 이스라엘 역사의 해석은 구약의 언약사에 대한 사회경제사적인 왜곡이다. 미국의 구약학자 존 브라이트는 “하비루”란 당시 중동지역의 하층계급의 백성을 가리키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Bene Yissrael)이라고 해석한다. 민중신학은 출애굽의 하비루와 가나안의 하비루가 연대하여 부족동맹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은 모세5경이 일관되게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가나안 백성들과의 맹약과 잡혼과 문화적 종교적 동화를 엄중히 거절하고 있는 내용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스라엘 민족의 통일성이란 부족연맹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시내산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 십계명에서 비롯된다. 민중신학은 야훼 제의와 바알 제의의 대립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하비루 종교의 대립으로 사회경제사적 이데올로기로 왜곡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신의 자기 계시와 인간 구원이 출애굽의 사건, 십자가형의 사건, 3.1운동, 8.15해방 등 민중해방이 역사적 사건에서 경험된다고 본다. (서남동, “두 이야기의 합류”, 「민중신학」, 1979, 50)
12. 내재화된 하나님 나라와 천년왕국
민중신학은 마가복음에서 드러나는 예수 복음선포의 중심 메시지인 종교적이고 영적이며 우주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사회경제사적인 정치적인 민중의 나라의 도래로 변모시키고 있다. 서남동은 천년왕국의 도래를 1980년대 초의 정치적 억압상황과 관련하여 오늘날 상황 속에서 민중혁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자유, 평등, 통일, 참여, 친교의 공동체로 해석하였다. 그는 여호야킴 피오리스(J. Fioris)의 천년왕국 사상을 수용하면서 “신은 세계사 발전의 내재적 힘이며, 신은 자기를 전개시켜서, 역사적 과정을 다름 아닌 인간화 과정, 성육신 과정으로 이끌어간다”(서남동, “두 이야기의 합류”, 「민중신학」, 1979, 59)고 말했다. 오늘날 “성령의 제3시대”가 왔다고 역설하면서 그것은 한정된 폭력을 통해서 민중의 한을 풀어주는 “민중의 교회”라고 역설했다. (서남동, “민중신학을 말한다”, 「민중신학」, 43-44쪽)
민중신학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수가 민중의 아픔과 일치화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민중의 아픔과 한(恨) 가운데 그리스도는 재림한다고 본다. 민중신학은 그리스도가 파루시아(parusia, 재림) 이후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재림하는 것으로 본다. 민중신학은 천년왕국이 땅에서 물질적으로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민중신학은 천년왕국이라는 종말이 1980년대 새 시대에 실현되는 것으로서 유신헌법을 폐기하고 새 헌법을 만드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민중신학은 종말과 재림을 사회경제사적으로 이데올로기화하였다. 민중신학은 성경의 묵시록적 종말론을 정치적 내재적 사회경제사적 종말론으로 왜곡하였다.
13. 신학 아닌 사회경제사적인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론
1980년대의 민중신학은 “변혁을 추동하는 운동의 신학”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한국교회 민중이 가진 신앙을 대변하기에는 민중의 신앙고백과는 너무나도 달리, 민중과는 거리가 먼 소수의 신학자들 중심으로 사회경제사적인 이데올로기론으로 발전해나갔다.
안병무는 그의 저서 [민중신학 이야기](1987)에서 전통신학을 모두 지배체제와 결탁된 허위의식의 신학이라고 규정한다.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1987, 한국신학연구소) 그는 이원론적 사회관을 주입한다. 현존하는 사회구조는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거나 이에 동조하거나 방임하는 지배계층과 수탈당하는 민중계층으로 이분화되어 있다. 그리하여 갈릴리교회와 예루살렘교회, 민중교회와 제도교회로 양분하였다. 안병무는 복음을 비인격화한다. 그는 예수 인격이 중요하지 않고 정치적 해방사건이 중요하다고 본다. 성령도 인격이 아니라 사건이라고 본다.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1987, 한국신학연구소, 25쪽, 217쪽) 안병무는 갈릴리를 민중들이 굶주림과 질병과 고립 속에서 지배계층에 대하여 투쟁했던 소외지역으로, 예루살렘을 권력자의 권좌를 누렸던 지배자들의 지역으로 이분법화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이분법을 알지 못한다. 소외지역인 갈릴리는 예수 복음사역의 중심지가 되고, 종교권력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은 예수 부활 이후에 초대교회 선교의 중심지가 된다.
복음주의 신학자 김명혁은 그의 논문 “민중신학의 신관과 그 사회경제사적 특성”에서 다음 같이 비판하였다: “민중신학은 신학의 근본자료와 규범인 성경 텍스트보다 자의로 선별한 몇몇 역사적 사건들의 소위 사회, 경제, 정치적 삶의 콘텍스트를 더 중요시하며, 신학의 근본서술대상인 성경의 하나님 대신 억눌린 민중의 신음소리(한)에 재재하는 인간 신(장일담이나 김지하나 창녀의 아기로 현현한)을 말하며, 신학이 취급하는 근본문제인 죄 대신에 한을, 회개화 치유와 구원 대신 증오와 한풀이와 인간성의 실현을 내세우고 있다.” (김명혁, “신학운동 아닌 사회운동”, 교회연합신보, 1982년 7월 4일자, 「한국교회 쟁점 진단」, 규장, 1998, 310) 때문에 그는 “민중신학은 신학이라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경제사적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했다. (김명혁, “민중신학의 신관과 그 사회경제사적 특성”, 「현대교회의 동향」, 성광문화사, 1987년, 280)
민중신학은 1980년대 광주민주화 사건과 더불어 일어난 신군부정권 하에 짓밟힌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이론을 제시한 점에 있어서 공헌을 했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기독교 신학을 탈서구화하고 탈전통화하고자 하고 사회경제사적 이데올로기를 성경해석에 도입함으로써 복음의 구원사건을 하나의 정치적 사건으로 변모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축소주의에 빠져버렸다. 민중신학은 탈서구화 한다고 하면서도 서구의 마르크스의 이원론적 도식에 근거한 현존체제에 대한 급진적인 혁명을 요청하면서 “오콜로스-토마스 뮌쩌-요오야킴 피오리스-동학-전태일 분신”이라 하는 동서의 저항역사를 범례화하면서 정당화한다.
민중신학은 사회정의의 실현을 지배계층에 대한 억눌린 한이 폭발한 민중의 봉기로 본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이기보다는 민중 사회학이 되고 있다. 한신대의 신약학 교수였던 복음주의자 전경연은 “민중신학 평가”란 논문에서 민중신학을 신학으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하며, “민중신학은 독선적이며, 공격적이며, 편파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민중신학의 성경해석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민중신학의 민담(民譚) 해석은 “황당무계한 궤변”이며 “외람된, 건방진 해석”이라고 비난했으며, 민중신학의 묵시문학 해석은 “너무 큰 파괴적 작업”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심지어 “민중더러 역사의 주체가 되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의 군대를 창설하는 것밖에 남는 것이 있겠는가?’라고 질타했다.
14. 정의, 평화, 구원, 연합과 일치 개념의 세속화
민중신학에서는 구원이란 피해를 당한 죄인들이 해병, 발산, 해방을 의미하는 한풀이를 통하여 인간성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하여 “회개를 통한 심령의 치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라는 성경적 구원개념이 사회경제사적으로 왜곡되고 있다. 여기에 NCCK에서 그동안 보여줬던 일부 모습들은 인권, 평화 그 자체가 기독교의 목적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 위에 나타난 사랑만이 진정한 복음”이라는 확고한 신앙 고백 위에 서 있는 이들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대립적이기 보다는 예수 복음의 선포의 장이요, 갈릴리는 예루살렘보다 더 복음활동의 근거지이다. 여기서 이분법적 대립이 아니라 하나의 구속사의 복음 사역 안에서 하나의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
15. 기독교 복음의 변형
한국보수교회와 신학이 올바른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을 정립하지 못한 시기에 민중신학은 기독교신앙과 교회가 가진 사회적 책임성과 짓눌린 자와의 연대성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사회정의의 확립이라는 차원에서 한국신학사에 있어서 하나의 공헌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신학은 신학의 주제를 민중해방에 둠으로써 성경적 복음의 내용을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로 변형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서남동은 그의 착상에서 하나님을 가난한 자와 눌린 자의 종교로 왜곡하고 있다. 그는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민중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고 있다. 안병무도 그의 착상에서 죄인은 지배계층에 의하여 수탈 당하고 소외 당했기 때문에 외로운 자라는 역설을 주장한다. 서남동은 예수의 피만을 선포하는 종교를 “주술종교”라고 비판하고 그러한 종교와 죄의 대속은 민중의 아편이지 민중의 구원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그리하여 민중신학에서는 기독교신학의 핵심적인 죄 개념이 사회경제사적인 소외개념으로 왜곡되고 있다. 민중신학은 복음의 중심 메시지인 “박애” 개념을 “민중의 한”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민중신학은 사고의 근본 테두리를 민중의 한과 한풀이로 설정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성경은 민중의 한까지도 포함한 세상과 인류의 죄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고난과,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신학이 억압당하는 민중들의 인권을 옹호하고 저들의 권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민중신학의 근본적 동기에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여태까지 보수신학이 간과해온 취약점을 민중신학이 주제화환 점은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중신학이 제시하는 이원적 도식으로 형성된 “억압받는 집단적 민중개념”과 신학화된 해방의 주체로서의 “얼굴 없는 민중 개념”은 사회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서남동은 사회주의를 선호했고 안병무는 “물이 공유된 사회”인 사회주의적 이상향, 즉 “천년왕국적 메시아니즘”을 추종하였다. 이처럼 민중신학은 신의 초월성과 인격성을 무시하고 신을 사회경제사적 민중해방의 역사적 사건 안에 내재하는 민중세력과 역사전개의 세력으로 간주하였다.
Ⅱ. 민중신학의 공헌
민중신학이 주장하는 신학의 특성이란 신학의 현실연계성과 실천성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보수신학은 교회와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역사적인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한 방향제시를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중신학은 신학의 현실연계성과 실천성을 주제화하였다. 민중신학은 하나의 신학적 체계이기 보다는 하나의 정치신학적 운동이었다. 민중신학은 1970년대 당시의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시절에 당시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 보수신학의 현실연계성 부재를 비판하면서 신학의 실천성과 현실변혁을 강조하였다. 민중신학은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전개된 민중신학의 공헌은 다음의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민중신학은 한국역사 속에서 외세의 억압과 정권의 억압으로 축적되어 온 민중의 한을 주제화하고 이것을 해방을 위한 민중운동의 원동력으로 역동화시켰다. 민중신학의 공헌은 항상 굴종을 강요받아 왔던 민중에 대한 지지와 긍정이었다. 독일의 정치신학자 몰트만은 민중신학을 “문화적으로 토착화된 신학이 아니라”, “한국에서 받는 백성의 상황화 신학”이라고 규정한다. 독일 튀빙엔의 소망신학자 몰트만은 민중신학을 “아시아에서 최초의 정치신학”이라고 특징지운다.
둘째, 민중신학은 신학적으로 한국의 보수신학이 “사회적으로 무관심하고 영혼구원 일변도의 입장을 반성하고 기독교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자극제의 역할”을 하였다. 민중신학은 기독교 신앙이 갖는 중요한 측면의 하나인 사회적 구원을 드러내는 데 공헌하였다. 보수신학이 지배하는 한국교회에서 민중신학은 1930년대 이래로 점차 등한시 하게 된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책임과 사회 윤리, 인권과 정의를 강조함으로써 보수신학으로 하여금 사회적 구원을 등한시한 데 대한 자기반성을 하도록 각성하였다. 민중신학은 한국의 보수신학이 현실부재와 실천부재성에 있어서 서구신학처럼 강단신학 경향을 지닌다고 비판한다. 민중신학은 한국 보수신학이 “서구 제국주의적 성경이 배어 있으며”, “교리적이고 율법적이었으며 실천이 없는 신학”이며,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면서도 실제로는 독재권력에 시녀 역할을 했던 신학”이라고 비판하였다. 민중신학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의 “잠재적 교회”(latent Kirche)를 드러내는 데 공헌하였다. “지극히 작은 자는 교회가 어디에 속하는가를 말한다. 숨어 계시는 그리스도는 백성의 가난한 자와 이들 속에서 자기에 속한 자를 기대한다.”
셋째, 민중신학은 정치신학자 몰트만 등에 의하여 독일어와 영문으로 번역됨으로써 한국신학의 하나의 흐름을 해외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민중신학은 남미의 해방신학과 더불어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제 3세계의 신학으로서 국제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70년대 한국의 억압적인 정치사회적 상황과 억눌린 민중들의 현실을 국제적으로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다. 몰트만은 다음같이 말한다: “민중신학은 제일세계와 서구의 기준에 따른 한국의 현대화에 대한 비판적 질문과 더불어 아시아의 해방신학으로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신학은 이미 1930년대부터 형성되는 한국신학의 거대한 흐름의 지류일 뿐이다. 한국신학의 흐름으로는 예장 교단 중심의 정통적 보수신학, 기장 교단 중심의 진보적 신정통주의 신학, 감리교단의 자유주의 신학이 거대한 주류를 이루었다. 한국신학에서는 이러한 신학적 거대한 흐름들이 서로 만나고 합류하면서 복음주의 신학, 문화신학, 민중신학, 오순절신학, 상담신학 등이 복합적으로 연결되면서 형성되고 있다.
넷째, 민중신학은 사랑의 단(斷)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해방신학의 정당한 폭력(just violence)의 주장과 구별된다. 민중신학은 사회적 불의에 대항하나 이것을 사랑의 단(斷) 행위로 승화시킨다. 안병무는 다음같이 피력한다: “이런 방식으로는 ‘이른 이로’ 그리고 ‘검은 검으로’라는 악마적 굴레가 결단코 그치지 않고, 증오의 복수의 사실이 순환적으로 연속될 것이다.” 민중신학은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은 열쇠를 예수의 십자가에서 찾는다. “검으로나 폭력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통하여 예수는 불의에 대항하여 싸웠다. 불의는 예수를 죽였다. 그러나 예수는 특히 그의 죽음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불의를 삼켰다. 그는 악마의 고리(the diabolic circle)를 깨뜨렸다.” (An Byung Mu, To the “Theology of the People”, in South Korea, 9) 여기서 민중신학은 사회경제사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성경적 관점에 접근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그의 죽음은 사랑의 마침이다. 예수는 고문당하고 멸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사람들을 향해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 그를 죽이시는 것처럼 오로지 하나님께로 향했다. 이 행동원리는 악마의 고리를 깨뜨리는 신비스러운 열쇠를 내포하고 있다.” (An Byung Mu, To the “Theology of the People”, in South Korea, 9) 여기서 민중신학은 지배자의 불의한 폭력에 대항하는 피억압자의 자기방어적인 정당한 폭력(just violence)을 정당화하는 해방신학의 사고틀에서 벗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