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현주 목사의 구약산책]아브람의 잘못

너희가 나를 알게 되리라(4)

▲이현주 목사 ⓒ베리타스 DB

“아브람은 모든 재물을 거두어 가지고 아내와 함께 이집트에서 나와 네겝으로 올라갔다. 롯도 함께 올라갔다. 아브람은 가축과 은과 금을 많이 가진 큰 부자가 되었다. 아브람은 네겝에서 베델 쪽으로 옮겨가다가 전에 천막을 쳤던 베델과 아이 사이에 이르렀다. 그곳은 지난날 아브람이 제단을 쌓고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던 곳이었다. 아브람을 따라다니는 롯도 양떼와 소떼를 비롯하여 천막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다. 그 지방은 그들이 함께 살 만한 곳이 못 되었다. 그들이 지닌 재산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잦았다. 그때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그 땅에 살고 있던 때였다.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너와 나는 한 골육이 아니냐? 네 목자들과 내 목자들이 서로 다투어서야 되겠느냐? 네 앞에 얼마든지 땅이 있으니 따로 나가서 살림을 차려라. 네가 왼쪽을 차지하면 나는 오른쪽을 가지겠고 네가 오른쪽을 원하면 나는 왼쪽을 택하겠다.’

롯이 멀리 요르단 분지를 다 둘러보니 소알에 이르기까지 마치 야훼의 동산같이, 이집트의 땅같이 물이 넉넉하였다. 그것은 야훼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의 모습이었다. 롯은 요르단 분지를 다 차지하기로 하고 그리로 옮겨갔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서로 헤어졌다.”(창세 13, 1-11)

숙부와 조카 사이에 ‘지닌 재산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었단다. 세상에! 재산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는 얘기다. 무슨 얘긴지 짐작이 가지 않는 바도 아니다. 요즘 우리 살아가는 모양을 봐도 대충 그러하지 않은가? 재물이 부족해서 저질러지는 악보다 남아돌아서 저질러지는 악이 훨씬 더 비정하고 충격적이다.

아브람과 롯이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이집트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옮겨 다니면서 외로운 나그네길에 서로 의지와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네겝에서 베델로 가다가 아이에 이르러 거기에 자리를 잡자 문제가 생겼다. 두 집안 모두 재물이 많아서 사이좋게 이웃하여 살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재물이 많은데 왜 이웃해서 살기 어려울까? 머리로는 쉽게 납득되지 않지만 현실로는 금방 알 수 있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의 농촌과 오늘의 농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얘기하지 않아도 피부로 알 수 있지 않은가? 가난한 농촌과 도둑촌이라는 고약한 이름으로 통하는 서울 아무아무촌, 어디가 더 이웃끼리 정답게 살아가는가? 재물이 너무 많은 것은 틀림없는 재난의 싹이다.

아브람과 롯에게 재물이 많았다는 말은 가축이 많았다는 말이다. 두 집안에 가축이 많아서 사이좋게 살 수 없었던 것은 그 가축을 먹이는 데 필요한 풀과 물을 확보하기 위하여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목자들끼리 싸움이 잦다 보니 주인도 언제까지나 몰라라 할 수 없는 일이고, 이러다가는 조카하고 숙부 사이가 원수로 되겠구나. 아브람이 그래도 나이를 더 먹은 사람답게 ‘해결책’을 찾아 고민한다. 이윽고 조카를 불러 자기의 복안을 말한다. 대단히 관대하고 자기 희생적인 듯이 보이는 의견이다.

“너와 나는 한 골육이 아니냐? 네 목자들과 내 목자들이 서로 다투어서야 되겠느냐? 네 앞에 얼마든지 땅이 있으니 따로 나가서 살림을 차려라.”

우리가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은 ‘재물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그것은 어디까지나 성경을 기록한 자의 의견이다!) 한 곳에 붙어 살기 때문이다. 그러니 분가해서 멀리 떨어져 살자. 그러면 다툴 일이 없지 않겠느냐? 좋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갈라질 것이냐가 문제다.

여기 이 대목에서 아브람의 사람됨이 빛을 낸다. 많은 사람이 그 모습에 찬탄한다.

“네가 왼쪽을 차지하면 나는 오른쪽을 가지겠고 네가 오른쪽을 원하면 나는 왼쪽을 택하겠다!”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해결의 열쇠를 조카인 롯에게 몽땅 맡겨버린 것이다. 롯은 어떻게 했던가? 아니, 어떻게 했어야 했던가?

“숙부님이 먼저 차지하십시오. 제가 나머지를 가지겠습니다.”

이렇게 대꾸했더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게 전개되었겠지만, 그렇게 말할 정도의 심성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재산 문제로 숙부와 불편한 사이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롯의 선택은 과연 롯다웠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이루어진 아브람의 선택 역시 과연 아브람다웠다. 그래서 롯은 기름져 보이는 요르단 분지를 차지하겠노라 말했고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그냥 머물렀다.

그런데 결과는 어찌 되었던가? 롯은 소돔과 고모라라는 ‘불구덩이’로 들어갔다가 겨우 몸뚱이만 살아 남게 되었다. 이 비참한 결말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고 어떻게 잘못된 것인가?

롯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더 좋아 보이는 쪽의 땅을 나이 든 숙부에게 양보하지 않고 제가 차지하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롯이 거기서 패가망신한 것은 마땅한 귀결이요, 업보다. 좋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기 조카의 사람됨을 모를 리 없는 아브람이,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지 않았을 터에 그런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기회를 마련해 준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아브람은 조카 롯이 요르단 분지를 택하리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몰랐거나 알았거나 그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브람의 관대하고 자기 희생적인 듯이 보이는 ‘선택’(네가 왼쪽이면 나는 오른쪽이요 네가 오른쪽이면 나는 왼쪽이라는!)이, 롯의 이기욕에 눈먼 ‘선택’을 강요라고까지는 뭣해도 아무튼 요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브람의 선택이 없었다면 롯의 선택도 없었을 것이요, 그랬더라면 불바다가 된 도성에서 알몸으로 도망치는 비참한 운명도 피할 수 있었으리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잘못은 롯의 선택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아브람의 선택에서부터 이미 저질러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무엇이 아브람의 잘못인가? 우선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조카와 어째서 불편한 사이가 됐는지 그 까닭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점을 성서기자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매우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지닌 재산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풀과 물은 한정되어 있는데 그것들로 지탱시켜야 할 인간의 ‘소유물’인 재물(가축)이 너무 많은 것, 그것이 탈이었다는 얘기다. 길은 좁은데 자동차가 너무 많아 오히려 짜증이 나고 불편스럽다는 얘기와 비슷하다.

한 통계에 따르면 현재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미국 사람만큼 소비를 하며 살려면 그 필요한 물자의 공급과 쓰레기 처분을 위해서 지구 크기와 같은 행성이 다섯 개 정도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와서 인간의 부풀어 버린 소비욕을 채워주기 위하여 하느님이 태양계의 질서를 무너뜨리며 지구만큼한 별을 다섯 개쯤 더 만들어 주실 수는 없지 않겠는가? 풍요로운 생활을 즐기는 이른바 선진국들이 지금 지닌 ‘소유물’을 조금도 축내지 않고 지상의 평화를 꾀한다는 것은 저 옛날 자기 조카를 불바다 속으로 밀어넣었던 아브람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브람의 잘못은 불편한 현실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 있다. 그리고 그가 밝은 눈으로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한 것은 조카인 롯이 노골적으로 보여준 이기욕과 똑 같은 욕심을 그 자신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롯이 그랬던 것과 똑같이 자신의 재물을 조금도 축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롯을 멀리 쫓아버림으로써 자기의 ‘재물’을 고스란히 지키려고 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네가 왼쪽이면 나는 오른쪽이요 네가 오른쪽이면 나는 왼쪽이라는 말 한마디로 자신의 재물을 그대로 유지함은 물론이요, 골치 아픈 조카 문제를 깨끗이 해결했다. 게다가 덤으로 과연 의인이라는 칭송까지 얻게 됐으니, 이런 것을 일컬어 일석삼조라고 하는 것일까? 아브람이 이 모든 결과를 미리 계산하고 그렇게 했다면 너무 사악했고, 몰랐다고 한다면 너무 어리석었다.

어째서 가축의 수를 줄이려는 생각을 못 했을까? 조카와 함께 정착한 그 땅의 물과 풀로 넉넉히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만 가축을 길렀다면 싸우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지 않았겠는가?

모를 일이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사람 한 목숨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재물이 어째서 그렇게 많아야 하는 걸까?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지를 몰라서다.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려고 세상에 왔노라 하셨다.

며칠 전 어느 목사가 수십 억이라는 엄청난 돈을 학교 발전을 위해서 헌금하기로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참으로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어떻게 성직자가 수십 억이라는 돈을 내놓을 수 있는 걸까? 내놓든 바치든 아무튼 그렇게 하려면 먼저 지니고 있어야 할 텐데, 어떻게 한 성직자가 그만한 돈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어디 그분 돈이겠느냐고, 그분이 몸담고 있는 교회 돈이겠지. 이렇게 생각해 보지만 그러면 어째서 소문일 망정 아무개 목사가 얼마를 내놓았다는 말이 돌아다니는 걸까? 한사코 본인이 나서서 그런 헛소문을 막았어야지! 그리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못한 것에 대해서 참회를 했어야지. 그런데 미안하게도 그런 소문은 들리지 않는다.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 났다면 치료방법은 간단하다. 우선 금식을 하고 난 다음 그뒤로 음식을 조금씩 먹으면 된다. 시방은 개인이고 교회고 너무 먹어서 나는 탈이 못 먹어서 나는 탈보다 훨씬 더 크고 심각하다.

과연 아브람은 우리의 훌륭한 스승이다. 내가 이렇게 했더니 이렇게 되더라. 그러니 후손들은 나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라고 간절히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글·이현주 목사(1944년 충북 충주 출생, 1977년 감리교 신학대 졸업 1995년 강원 철원 반석교회 시무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당선으로 등단, 2006년 드림실험교회 참여해 현재까지 사역, 저서로는 '사람의 길 예수의 길', '대학 중용 읽기', '이아무개 목사의 금강경 읽기'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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