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주 교수(감신대, 한국교회사)가 6일 제 7회 만우 송창근 박사 기념강연회에서 '경계선에서 양쪽을 아우르며 ; 한국교회사에서의 만우 송창근의 위치'란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이지수 기자 |
감신대 이덕주 교수(한국교회사)가 만우 송창근(宋昌根, 1898~195?)이 한국교회사에서 갖는 위치를 추적했다. 이번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논란이 되기도 했던 송창근의 평생 목회와 신학의 주제는 ‘민족’과 ‘교회’였다고 주장했다. 발표는 6일 경건과신학연구소(소장 주재용) 주최로 서울성남교회에서 열린 ‘제 7회 만우 송창근 박사 기념강연회’에서 이뤄졌다.
송창근에 대한 평가는 이미 민경배, 유동식, 주재용 등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 다각도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다시금 ‘한국교회사에서 만우 송창근의 위치’란 주제로 연구를 시도한 데 대해 이덕주 교수는, 이번 연구에서는 이전 연구와 달리 ▲한국교회의 시대별 민족적 과제를 만우의 생애 및 신학과 연결하고 ▲만우의 (생애보다는) 신앙과 신학에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
이덕주 교수는 한국 개신교회 120년 역사를 ‘세대론’에 입각하여 3기로 나눴다. 1기는 한말 복음수용기(19세기말~1910년), 2기는 일제시대 교회수난기(1910~1945년), 3기는 해방 후 교회부흥기(1945년~현재)로서, 이 중 송창근의 신학여정에 해당하는 기간은 1시 끝~3기 도입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또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고의 가치로 삼았던 제 2기, 즉 일제시대에 송창근의 삶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됐다고 밝혔다.
1919~1921년은 송창근의 민족의식이 고조된 기간이었다.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인 1919년 9월, 송창근은 강우규 열사가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 폭탄을 투척한 사건의 혐의자로 체포됐는데, 수감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민족운동과 관련되어 옥고를 치른 첫 번째 경험이었다. 이어 1920년 1월에는 ‘경성독립비밀단창가 배포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이 교수는 이 사건이 “만우의 민족의식을 꺾기는커녕 더욱 심화시킨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두 차례의 독립운동 관련 사건으로 송창근은 교계뿐 아니라 민족운동계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으며, 활발한 강연활동과 문필활동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1936년 평양에서의 목회를 마치고 부산으로 떠난 송창근은 ‘성빈학사(聖貧學舍)’를 설립하여 사회적 소외계층을 위한 복지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이 터지고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 세력이 검속될 때 송창근도 체포되면서 ‘성빈학사’ 사역은 중단되었고, 송창근은 1년 여 옥고를 치른 뒤 1938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또 1940년 1월 김천 황금정교회를 담임하는 것으로 목회에 복귀했으나 그 해 8월 수양동우회사건 2심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아 다시 1년간 투옥되는 등, “송창근은 민족을 위한 고초의 삶을 한 평생 살았다”고 이 교수는 밝혔다.
다만 1942년 이후 ‘친일어용기구’로 전락한 장로교회 조직 안에서 ‘국민총력 경북노회연맹 이사장’과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경북교구 부교구장’, 그리고 마지막엔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총무국장’ 등의 직함을 가지고 교회를 지킨 것은 “’대쪽 같았던’ 생애에 아쉬운 대목이다”고 평했다.
송창근은 1950년 3월 조선신학교 학우회가 주최한 귀국 환영회석상에서 “우리 학생들이 모두 소(牛)가 되어 한국의 교회와 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쳐 충성하라고 말해주게”라며 한국 교회와 민족에 대한 애정을 밝혔다. 이후 ‘돌아올 수 없는’ 북행길을 떠난 송창근에게 있어 이날 전한 메시지는 ‘유언’과 같은 것이었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이 교수는 송창근이 한국교회사에서 가지는 의의에 대해 “송창근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자유와 해방’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10대 소년의 나이로 고향을 떠나 만주로, 서울로, 그리고 일본과 미국으로 가 신학 공부를 하였고,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목회현장에서도 민족문제와 사회문제에 참여했다. 결국 그는 온 몸으로 한국교회사의 제 2세대를 산 사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