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청에서 나오는 대(對) 사회 또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보이스(발언)에 전세계 가톨릭교회의 사제들이나 신도들이 이의(異意)를 달 수 없도록 하고 있고, 이로써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위상은 고양되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그동안 한국 개신교에 속하는 교단들과 단체와 조직체들이 한국 정부나 국회나 기업체에 대한 보이스를 진정서로써 또는 가두시위로써 발하였는데, 그것들이 어떤 개 교단 전체의 보이스인지 아닌지 알 수 없고, 더구나 그 보이스들이 한국 개신교 전체의 보이스일 수가 없으며, 또한 그 보이스들의 효과도 측정할 수 없다. 시민단체들의 보이스와 별로 다를 바 없고 다만 일반 시민들의 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이다.
미디어법 문제로 개신교 어느 단체원들(대부분은 목사들)이 그 개정안을 반대하는 시위로서 종로 5가 길거리 바닥에 누워 있는 장면이 TV로 방영되었다. 아마도 이들은 사전에 문서나 말로써 그 법안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었으나 별로 효과가 없어서 최대의 효과를 노리고 그러한 행동을 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아마도 이제는 지쳐서 힘이 빠져 거리에 눕게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그래도 아주 시신이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행동이 불신자들과 타종교인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가 우리의 관심거리이다. 그들의 행동의 모양새가 그들이 속한 교단이나 또는 한국 개신교의 권위와 위상을 드높였을까 아니면 추락시켰을까?
왜 이러한 질문을 일삼을 수 있을까? 근간 어느 한국 여론조사 기관의 발표가 일간지 신문에 실렸는데 그것을 본 한국 개신교 목사나 신도들은 약간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각종 직업에 대한 일반 국민의 선호도(또는 신뢰도)에서 개신교 목사 직업이 23위라는 것이고, 게다가 가톨릭교회 신부와 불교의 승려 직업이 개신교 목사직보다 신뢰도가 훨씬 크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이 여론조사 결과가 목사 직업의 비하(卑下)냐 아니면 개신교 교회의 권위와 위상의 평가냐의 문제이다. 또는 목사직의 비하가 아니면 개신교 목사들의 품위 추락을 말하는 것이 된다.
가톨릭이든 개신교이든 교회의 권위와 위상은 그리스도교회의 본성(또는 정체성)과 그 고유의 사역 또는 기능으로 보존된다. 그 본성은 거룩(神聖)이고 그 사역은 개인의 구원과 그 구원운동의 사회적 확장이다(곧 선교). 그러므로 어떠한 사회적 교회운동도 선교의 효과가 없으면 그것은 한갓 일반 시민 또는 세상의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에 그리고 가장 치열했던 교회 안의 논쟁은 4~5세기 200년에 걸친 북아프리카(카르타고 중심) 교회에서 일어난 소위 도나티스트(Donatist) 논쟁이었다. 도나티스트들은 교회의 순수한 거룩한 본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로마제국의 박해 아래서 배교한 목사들을 제명시켰고, 만일 그들이 뉘우치고 돌아오려면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는 엄격한 조건을 내세웠다. 그러나 반대편의 그 당시의 가톨릭교회에서는 배교자들이 재세례 없이 복귀하게 하였다.
도나티스트들은 신부나 목사들의 배교행위나 범죄와 부도덕이 교회의 신성성(神聖性)을 더럽힌다고 생각하였고 반면에 관용파는 그렇지 않다는 지론이며, 전자는 시편 141:5의 말씀대로 “죄인이 붓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안수할 수 없다”고 믿고 배교한 성직자는 세례와 성찬식의 효과를 말살하므로 그들의 성직 수행을 거부하였고, 관용파는 성례는 누가 집행하든지 성례 자체가 스스로 효과를 내므로 배교자와 도덕적 결함이 있는 성직자라도 성례를 집행해도 좋다고 주장하였다. 도나티스트들은 교회의 본성과 그 사역의 신성성을 지키기 위하여 국가로부터 무참한 박해를 받고 많은 신도가 순교하였다. 관용파는 교계의 평화와 일치를 부르짖었고 엄격파는 교회의 신성성을 호소하였다.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교황)의 강력한 교권으로 교회의 일치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이단들을 엄벌하였고, 교회의 본성(신성성)과 권위는 어떤 것으로써도 침해되지 않으며, 성례들은 스스로 효과를 내는 것이므로 집행자의 품위와 자질과는 상관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엄격파의 성례전 신학이론을 수용한 듯이 성례의식은 받는 사람들의 믿음 여하에 따라 효과를 낸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교회론과 성례론을 살피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오늘 한국의 교회 목사들과 신자들이 교회의 본성 또는 정체성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보존되는 것이며, 또 목사들이나 신자들의 신앙 행위나 사회적 행위가 교회의 본성과 권위와 본래적 사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한국의 정파들이 언제나 ‘국민’을 업고 나오듯이 목사들과 신도들이 사회참여 운동을 할 때 ‘교회’를 업고 나올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행위가 잘못되어 교회의 위상을 추락시키고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저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를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가지들이 병들거나 열매 맺지 못하면 꺾어버리실 것이고 예수님 자신의 존재가 병들거나 무익하게 될 분이 아니라고 여기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2000년의 긴 교회역사에서 목회자들이나 신도들의 부패와 부실(不實) 행위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교회는 인간의 역사가 끝나기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이나 신도들이 잘못하면 교회의 선교에 지장이 생길 것이고, 또 목사들의 품위가 떨어져도 그러할 것이다.
(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