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 교수(한신대, 구약학) |
‘오, 하나님 저 놈의 원수가 빨리 망하게 하소서. 저 놈의 새끼들은 아비 없는 고아가 되고, 저 놈의 여편네는 과부라도 되어 길거리를 싸돌아다니며 빌어먹는 신세가 되게 하소서. 강도라도 들어서 저 원수의 재산을 약탈하게 좀 해주옵소서.’
“시편 109편 8절에서 13절에 나오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기도를 읽지 않으며, 이 기도를 노랫말로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까? 기도에 나타난 고통을 당해보지 않아서입니다. 그 애끓는 통곡을 겪지 않아서입니다.”
박경철 교수(한신대, 구약학)가 ‘시편 새롭게 읽기’를 통해 민중의 고난과 함께 하는 삶의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독교사상> 12월 호에 게재한 논문 <오늘 여기서 읽는 시편의 ‘삶의 자리’>에서다.
박 교수는 한국교회 성도들이 시편을 ‘취향에 따라’ 발췌해 읽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남의 현실에 눈 감아버리는 ‘비뚤어진’ 신앙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교회 성도들이 즐겨 읽는 시편은 ‘시편 23편’과 같이 자신의 안위를 지켜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노래한 시편이 대부분이지만, “150개가 들어 있는 시편에는 감사의 노래뿐 아니라 고난 받는 자의 탄식이 깃든 노래도 있으며, 개인의 노래뿐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부르는 노래도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같은 시편읽기 행태에 비추어 한국교회의 ‘세속화’ 현상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부자들이 세를 누리는 교회에서 가난한 자의 편이 되시는 야웨를 노래하는 시편을 교독할 수 있겠으며, 세상의 권력을 나눠 가진 자들이 세를 누리는 교회에서 불의한 권력을 심판하시는 야웨를 노래하는 시편을 부를 수 있겠는가?”라며 “(남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눈 감고) 예수를 못 박아 죽임으로써 구원을 얻는 감사를 노래하는 예배는, 달리 보면 ‘살인자들의 잔치’와 다름 없다”고 비판했다.
시편을 ‘통째로’ 읽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시편이라는 책 자체가 ‘완결성’을 지닌 책이기에 그렇다. 또 각 장(章)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있기 때문에 한 장만 읽어서는 피상적인 이해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편 23편을 예로 들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내가 여호와의 전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는 내용의 시편 23편은 한국 성도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편 중 하나로서, 감사를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23편을 개별 시로 읽는 것과 그 앞뒤의 시들과 연결하여 연작시로 읽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박 교수는 설명하길, “연이은 24편은 ‘누가 여호와의 집에 머물 수 있는가?’(3절)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사회 윤리적 실천(4절)이 그 전제가 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며 “23편을 독립적으로 읽지 않고 현 시편의 최종형태 구성의 측면에서 24편과 함께 읽게 되면, 사회 윤리적 실천행위가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임을 보여준다는 새로운 신학적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고 말했다.
또 이에 “매 주일 성전으로 들어가 23편을 노래한다고 해서 교인이 아니다. 24편을 상고하며 내가 오늘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하는 실천적 신앙의 지도 필요성이 ‘새로운 시편 읽기’에 있다”고 말했다.
시편을 일독할 때 성도들이 발견하게 되는 묵상 주제는 ‘감사’만이 아니다. 시편 35편-37편의 내용은 ‘힘 없는 자가 고통에 처해 있을 때 원수들은 기도자의 고통을 오히려 조롱하나, 기도자들은 저들이 끝내는 수치를 당하고 넘어질 것을 알며, 그러니 악인이 잘 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 같으나 오직 야웨의 법도를 신뢰하며 지키면 그가 구원하신다’는 것이고, 38편-39편은 ‘오직 야웨만을 기다리며 고통 중에 야웨를 찾는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40편-41편의 감사 찬양은 그러한 배경을 뒤로 하고 있다.
끝으로 박 교수는 ‘시편 새롭게 읽기’를 통해 현실 참여적인 신앙으로 전환되기를 당부했다. 그는 “바로 이렇게 읽는 시편에 ‘오늘의 삶의 자리’가 있고, 그곳에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고난의 자리에서 위로의 촛불을 켜고 탄식과 분노의 자리에서 두 주먹 불끈 쥐고 촛불을 켠다”며 “이처럼 ‘탄식’과 ‘감사’는 둘이 아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