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재 교수(한신대 명예) |
루스벨트 대통령 영부인의 말이라고 전해지는 명언 가운데 “과거는 역사, 현재는 선물, 미래는 모험이다”는 말이 있다. 정치가의 영부인이 철학자나 종교적 성인의 혜안이 갖는 인생성찰을 능가할 수 없겠으나, 매우 현실적이고 실재적인 지혜로운 조언으로서 들어도 좋다고 생각되었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세차원으로 구별하고서 과거에 집착 말고, 현재를 기쁨의 기회로 받고, 특히 미래를 창조적 모험의 정신으로 대면하라는 조언이다. 다분히 미국적 기질이 느껴지는 좌우명이다.
그런데, 삶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과거란 역사기록물 창고에 보관해두는 규장각의 <이조실록>같은 것이 아니다. 현재 또한 은총의 선물임엔 틀림없지만, 선물내용은 달콤한 쵸콜릿만 들어있는 것 아니다. 대학시절에 필독 교양서적이었던 E.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핵심 문장처럼,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역사는 현대 속에 살아있다. 미래 속에서도 계속 살아간다. 과거 역사는 현재와 미래의 몸을 만드는 밥이요, 생명나무가 자라는데 필요한 유기물질의 정신적 토양이다.
새해를 희망과 기도하는 맘으로 맞이하면서도, 지난 해(2009) 우리를 슬프게하고 부끄럽게 하는 3가지 사건을 지나간 과거의 사건으로 덮어버릴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는 지난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로서 가장 부끄럽게 여겨야 할 3가지 사건을 이렇게 본다. 첫째는, 용산참사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사람이 죽었는데 그 시신을 1년동안 장례식을 치루지 못하고 아직도 병원 냉동실에 넣어 놓고 있다는 현실이다. 둘째는, 국민의 70% 가 반대하는 ‘4대강 사업’을 강행하려는 장로대통령의 독선적 고집을 지지하는 MB 대통령 일등공신 교계지도자들의 동조 및 침묵태도이다. 셋째는 2013년 부산에서 개최될 예정인 제10차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를 반대하는 극우적 한국보수교계 지도자들의 시대착오적인 광신적 교인선동이다.
‘용산참사’의 희생자는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사회문제가 터져 발생한 사건이다. 철거건물에 세들어 영업하던 ‘희생자’ 혹은 정부 표현대로라면 ‘불법자’들의 반사회적 폭력사건이 아니다. 명령대로 움직여야했던 전투경찰에 복무하는 대한민국 젊은 아들들의 과잉진압의 책임만도 아니다. 문제는 정치논리, 개발논리, 안보논리, 차가운 실정법 논리로만 사태를 해결하려는 경직된 마음에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정직하게 물어보자. 불에 타 죽은 그들과 감옥에가 있는 그들의 가족들이 대한민국을 뒤집어 버리려던 테러집단이요, 반국가단체인가? 그들의 생존권 주장과 생존권 방어전략이 경찰청장과 판검사 잣대로보면 불법행동이었다고 치더라도, 그들은 국가와 정부의 막강한 힘에 맞서기에는 너무나 약하고 미약한 서민이요 가난한 사람들이요 대한민국 국민이다.
죽은 그 사람들을 1년 이상 순천향병원 시체안치소에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한없이 슬프고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다. 그런 일은, 사람사는 동네나 인간다운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현실은 우리 모두를 하늘에 고발하는 고발장이 된다. 그 현실 자체는 행정부, 사법부, 개발기업체, 세입자, 방관하는 대다수 시민들, 그동안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버둥쳐오던 모든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들의 공동패배일 뿐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철저하게 ‘공동패배’하고 역설적으로 ‘공동승리’하는 극적 사고전환으로 하루 속히 해결해야 한다. 대통령의 권위를 정말 멋있게 한번 사용하기를 바란다. 대통령이 직접 용산 참사현장엘 가서, 국민생명을 죽음에 이르도록 과잉진압한 정치도의적 책임을 사과하고, 유가족들의 멍든 상처를 위로하고, 가능한 모든 후속조처를 지시해야 한다. 측근자들은 통치권의 손상이요, 개발사업의 나쁜 선례라고 반대할지라도 대통령은 더 크게 보고 더 깊게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힘있는 자의 참된 용기의 정치요 바른정치의 정치력인 것이다.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슬프게 하는 둘째 사건을 나는 ‘4대강사업’에 대한 대통령의 지나친 집착, 거수기로 전락한 한나라당의 정치력 부재, 그리고 권력의 가신집단으로 전락한 한국기독교 보수지도자들의 무책임한 부추기는 행태가 빚어내는 비극이라고 본다. ‘4대강 사업’같은 국책적 토건사업에 일가견이 있고 확실한 가치관을 가지고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다는 이 대통령의 개인적 신념을 인정한다. 그러나, 국민을 위한다는 신념이 대통령이 지닌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반드시 옳은 판단이라는 독단독선을 일단 내려놓으시라고 강청한다.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수많은 대학교수직과 전문가들의 견해와 국민들의 소리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결코 MB정권이 미워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자기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각오하고 고언과 비판을 용기내어 행동하는 국민대다수의 소리를 듣고, 대통령의 개인적 신념(?)을 접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라는 평범한 진실을 직시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마지막 또 한가지,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을 정말 부끄럽고 슬프게하는 2009년도 사건은 놀랍게도 제10차 WCC 부산대회를 반대한다는 기가 막히는 극단적인 신학적 우파교계지도자들의 시대착오적인 망발이다. 반대이유인즉, WCC 신학적 노선이 지구문명의 종교다원현상에 대하여 포용적 입장을 취하거나 일부 진보적 신학자들이 종교다원론을 주장한다는 것을 가장 큰 반대명분으로 내걸고 있다. 냉전체계가 무너지기 전에는, 동일한 보수교단 지도자들이 내건 반대명분은 정치사회적으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국가에서 존재하는 교회지도자들이 참여하는 WCC는 자동적으로 '용공단체‘이기 때문에 교회연합운동(에큐메니칼 운동)에 반대한다고 열을 올렸다.
예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도다....... 맹인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려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23:13,24). WCC에 가입한 세계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만 해도 어림잡아 3-4억은 될 것이다. 개신교 교단만이 아니라 동방정교회도 참여하고 성공회도 참여하고, 특별위원회에는 로마 카톨릭교회도 옵서버를 파송하는 그야말로 세계적 그리스도교회의 연합운동체이다.
그러나, WCC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일, 성경이 믿음생화의 기준이 된다는 경전에 대한 고백과 신뢰, 신앙은 삶으로서 증언되어야 한다는 사회윤리의식, 하나님나라는 내세 천국에서만이 아니라 현재 역사적 삶 속에서도 구현되어야 한다는 신념 등 몇가지 포괄적인 신앙적 공동고백을 하는 것이지, 세부적인 교리적 교조주의 기독교를 가입조적으로 내거는 신학적-교리적 교회일치 운동체가 아니다.
사실이 그럴진데, WCC 부산개최를 반대하는 일부 보수교계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행태가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경고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되지 않도록 ‘자기성찰’을 먼저 할 일이다. 순진한 양떼들을 침소봉대하는 교리적 선동언어를 구사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애를 미움과 적대관계로 유도하는 두려운 죄를 짓지 마시라. 특히 부산지역 보수교계 지도자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한다. WCC 에 가입된 3-4억 세계 그리스도교 형제들이 그대들을 주목하고 있다. 보수신앙을 공고하게 지켜가는 것은 신앙의 자유일이니 내가 관여할 바 아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독교신앙만이 복음적 구원을 가져다 줄 교회단체요, WCC 에 관계된 그리스도형제들은 그 숫자가 3억이든 4억이든 구원가망이 없다는 독단과 독선적 바리새인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함께 축하해주고 참여하면서 연대하지 못하겠거던, 조용히 침묵하고 관망할 일이다. 부산지역의 땅과 하늘이, 그리고 회의가 개최될 모든 건물이 신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것이요, 사회적으로 말하면 공공성의 성격인 것이지, 보수적 기독교지도자들의 독점적 사유물이아니라는 상식도 기억해주길 바란다.
여하튼, 새해는 호랑이 해라는데 호랑이의 큰 포효소리와 함께, 우리를 슬프게 하고 부끄럽게 하는 3가지 지난해의 일들이 말끔이 해결되어 한결 밝고 건강한 사회와 교계가 되길 부족한 일개 신학자로서 간절히 기도한다.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