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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목사의 구약 산책]아브람의 실수

    ▲이현주 목사 ⓒ베리타스 DB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직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마침 사래에게는 하갈이라는 이집트인 몸종이 있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야훼께서 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시니 내 몸종을 받아주십시오. 그 몸에서라도 아들을 얻어 대를 이었으면 합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이집트인 몸종 하갈을 남편 아브람의 소실로 들여보냈다. 이것은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지 십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아브람이 하갈과 한자리에 들었더니 하갈의 몸에 태기가 있게 되었다. 하갈은 그것을 알고 안주인을 업신여기게 되었다. 그러자 사래가 아브람에게 호소하였다. ‘내가 이렇게 멸시를 받는 것은 당신 탓입니다. 나는 내 몸종을 당신 품에 안겨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몸에 태기가 있는 것을 알고는 나를 업신여깁니다. 야훼께서 나와 당신 사이의 시비를 가려주시기 바랍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몸종인데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고? 당신 좋을 대로 하시오.’ 사래가 하갈을 박대하자 하갈은 주인 곁을 피하여 도망치는데, 야훼의 천사가 빈 들에 있는 샘터에서 하갈을 만났다. 그 샘터는 수르로 가는 길가에 있었다. 그 천사가 ‘사래의 종 하갈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고 물었다. ‘나의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치는 길입니다.’ 하갈이 이렇게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는 주인 곁으로 돌아가 고생을 참고 견디라면서 이렇게 일러주는 것이었다. ‘내가 네 자손을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불어나게 하리라.’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주셨다. 네 아들은 들나귀 같은 사람이라., 닥치는대로 치고 받아 모든 골육의 형제와 등지고 살리라.’” (창세 16, 1-12)

‘믿음의 조상(祖上)’이라는 별칭으로 통하기도 하는 아브라함의 실패담을 읽는 심정은 착잡하다. 그러나 결국 그의 실수 또는 실패는 나름대로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안겨준다. 공자 말씀마따나 남의 허물을 거울 삼아 자신을 바로잡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니까. 성경이 성공한 자들의 자랑스런 이야기 못지않게 무너지고 깨어진 자들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리라. 아브라함은 그 위대한 믿음의 행적으로 우리를 고무하는 바 크지만 한편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것과 똑 같은 잘못을 저지름으로써 오히려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기도 한다.

“자네의 잘못에 대하여 지나치게 상심 말게. 나도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어.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버리지 않으셨네. 오히려 내가 저지른 잘못을 당신께서 수습해 주셨지. 자네의 과거를 보지 말고 하느님을 바라보게.”

아브람은 나이 여든다섯이 되도록 아들을 두지 못했다.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내가 아는 어느 농부는 아들 하나를 낳기 위해서(?) 위로 딸을 여덟이나 낳았다. 팔전구기냐고 하면서 웃으니까 아무튼 죽기살기로(!) 낳았단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가 담벼락에 나붙어 펄럭거리는 20세기 말에 ‘아들’ 하나 얻으려고 이토록 수고를 하는 판인데 까마득한 저 옛날, 지금보다 훨씬 더 지독한 가부장제도 아래에서 여든다섯 살이 되도록 아들은 그만두고 딸도 하나 두지 못했다는 것은, 그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으리라. 그 초조한 마음과 절망스런 심정을 우리는 상상하기도 어렵겠다.

여자는 시집을 가서 남자한테 아이를 ‘낳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아들을 낳아줌으로써 후사를 잇게 하는 것이 여자의 첫째 가는 임무였다.

“하갈은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주었다.”(창세 16, 15) 하갈이 아브람과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다가 아니라,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주었다고 성경은 기록했다. 그것이 상식이었으니까.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게 아니라 낳아주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임이라는 게 얼마든지 남자 탓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책임은 언제나 여자 혼자서 져야 했다. 아들을 낳아주지 못한 여자는 죄인 아닌 죄인으로 한평생 천대와 멸시 속에서 살든지 아니면 쫓겨나는 비운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니 아브람이 여든다섯이나 되기까지 생산 못 하는 아내 사래를 데리고 산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대단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훌륭한 처사였다. 그러나 훌륭한 처사는 처사고 그렇게 훌륭한 사람도 실수를 하려니까 얼마나 쉽게 하는지. 아내의 한마디 말에 넘어가고 만다.

늙어서 생산의 가능성이 사라져가는 마당에 아직 아이가 없다! 이 난감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래는 뭔가 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자기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몸종 하갈을 남편에게 씨받이로 주는 것이었다. 그 생각을 처음 했을 때 사래는 왜 진작에 그런 수단을 써볼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나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내의 제의에 남편 아브람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라도 해서 ‘아들’을 낳아주려는 아내의 마음 씀이 고마웠을 것이다. 그래서 곧장 하갈을 품에 안았다. 곧 태기가 있게 되었고 한 여자의 몸 속에서 ‘들나귀 같은 사람, 닥치는대로 치고 받아 모든 골육의 형제와 등지고 살’ 비운의 생명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스마엘! 그가 태어난 것은 아브람의 실수로 빚어진 결과였다. 그래서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추방되었고 태어난 뒤에 다시 내쫓겼다. 그리고 당연한 귀결로서 아브람의 적자(嫡子)임을 주장하는 이사악과 수천 년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 길고 지루하게 갈등과 다툼을 계속하는 주인공이 된다.

무엇이 아브람의 ‘잘못’이었다는 얘긴가? 잘못은 다른 게 아니다.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을 스스로 꾀하고 실천에 옮긴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여쭈어보지 않았다는 얘기다. 롯과 분가할 적에도 그랬거니와 일언반구 하느님과 상의한 흔적이 없다. 바로 이것이 아브람의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과연 ‘믿음의 조상’이라는 별칭에 어울릴 만큼 훌륭한 모범이 될 행위는 모두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하란을 떠나 미지(未知)의 땅으로 향할 때에도 그러했고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칠 때에도 그러했다. 먼저 하느님의 명령이 있었고 그뒤에 아브라함의 복종(행동)이 따랐다. 이것이 바른 순서다. 이 순서를 어기거나 무시하는 데서 모든 인간의 비극이 비롯된다.

하느님의 법엔 엄격한 질서가 있다. 질서 자체가 그분의 법이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온다. 여름 뒤에 봄이 오는 법은 없다. 씨앗이 땅에 묻히면 뿌리가 먼저 나오고 뒤에 싹이 나온다. 뿌리보다 먼저 싹이 나오는 법은 세상 천지에 없다. 이 ‘순서’가 지켜져야 한다. 아브라함이 이 순서에 따라 움직였을 때 그 행위는 축복을 낳았고 이 순서를 어기거나 또는 무시했을 때(하느님의 뜻보다 자기의 판단이나 아내의 생각을 앞세웠을 때) 그의 행동은 저주를 낳았다. 저번에는 자기 조카 롯을 파멸의 불바다 속에 들어가게 하더니 이번에는 모든 혈육과 등지고 살면서 닥치는대로 치고 받는 성난 들나귀 이스마엘을 태어나게 했다. 순간의 방심이었다고 해두자. 아무튼 그는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는 거룩한 ‘순서’를 잊었거나 어기고 말았다.

“물(物)에는 뿌리와 가지가 있으며 일(事)에는 나중과 시작이 있다. 어느 것이 먼저요, 어디가 나중인지를 알면 도(道)에 가깝다고 하겠다.”(「大學」) 공자님 말씀이다. 모든 일에 ‘순서’가 있는데 그 순서를 잘 좇아서 하면 도(道)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얘기다.

사람이 먼저인가? 돈이 먼저인가? 종로 거리를 막고 물어봐도 돈이 먼저라고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로는 무엇인들 못하랴? 문제는 과연 인간들이 그 ‘말’대로 살아가느냐에 있다. 더욱이 이 환장할 만큼 썩어빠진 자본주의 무한경쟁 시대에! 현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바는 참으로 놀랄 만큼 많은 인간이 사람보다 돈을 ‘뿌리(本)’로, ‘먼저(始)’로 생각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형제를 고발하고 친구를 배신하는 일이 모두 저 ‘거룩한 순서’를 어기거나 무시한 결과이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바로 그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 자기 생각(뜻, 계획 따위)을 하느님의 생각 앞에 두었다. 안 될 일이지. 그건 바로 사탄의 행실 아니던가?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려주셨다.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리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하고 꾸짖으셨다.”(마태 16, 21-23)

스승의 십자가행(行)을 가로막은 베드로. 우리는 그의 선심(善心)을 의심할 수 없다. 그는 진심으로 스승을 사랑하고 아끼고 모셨기에 감히 스승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착한 동기(動機)였다 해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보다 앞에 내세운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가차없이 치워버릴 일이다. 아니, 착한 동기일수록 더욱 그러해야 한다.

사람들한테서 배운 전통과 방식에 따라 하느님을 사랑했을 때 사울이 한 일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박해하는 것이었다(사도 9, 4).

아브람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거든 교회를 위한답시고 나라와 민족을 섬긴답시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한답시고 우쭐거리면서 나서지 말라! 그런 일일수록 마지못해서 하라! 예수님도 십자가를 마지못해 지셨다.


글·이현주 목사(1944년 충북 충주 출생, 1977년 감리교 신학대 졸업 1995년 강원 철원 반석교회 시무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당선으로 등단, 2006년 드림실험교회 참여해 현재까지 사역, 저서로는 '사람의 길 예수의 길', '대학 중용 읽기', '이아무개 목사의 금강경 읽기'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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