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목회현장에서 본 목사후보생교육 개선방안

목사 기르기

홍순원 목사/ 천호동 교회)

2009년 11월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추계학술 대회의 ‘기장 목사후보생 교육정책 및 교과개발을 위한 심포지엄’ 中

1.미래 교회를 위해서

  목사들이 모이면 종종 요즘 신학생들에 대한 불만들을 털어놓습니다. 목사후보생들의 학문 능력에서부터 품성에 이르기까지 불만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이런 목사 후보생들이 목사가 될 교회의 미래를 걱정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성 목사들의 불평에 맞장구를 칠 수만은 없습니다. 먼저 신학생들의 자질을 논하는 지금의 목사들과 교회를 생각해봅니다. 개신교가 전래된 이래 지금처럼 목사들과 개신교회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신학생 때에는 안 그랬는데’ 하는 기성 목사들이 지금의 개독교 수준의 기독교를 만든 것을 생각하면 목사후보생들에 대해서 투덜댈 때가 아닙니다. 먼저 기성 목사들의 철저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좋지 않은 습성이 있습니다. 가꾸지는 않고 언제든 익은 열매만 따려고 합니다. 사람을 기르는 일은 나무심기와도 같습니다. 나무는 하루아침에 자라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오랜 과정이 있습니다. 과실이라면 일 년 내내 정성껏 가꾸어야 가을에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신학생들은 자라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아직은 여러 면에서 설 익어있습니다. 그런데 현장의 목사들은 당장에 교회에서 잘 기능할 수 있는 완성품을 찾습니다.

  기르는 일은 하지 않고 익은 열매만 찾는 기성 목사와 교회의 풍토가 신학생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엉뚱한 길로 이끌어 가기도 합니다. 목사들이 자기 교회 신학생들과 얼마나 자주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며 성직의 길로 인도하는 지요? 신학생들 사이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나는 딱 두 번 담임목사님 만나보았다. 교회 처음 가서 인사할 때, 그리고 다른 교회로 옮기려고 인사할 때.’ 신학생들은 교회에서 목사의 일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예배에 온전히 참여해서 예전을 경험하고, 설교를 듣고 싶어 합니다. 신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여러 교회현장의 일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는 신학생에게 신학생의 독특한 것을 요구하고 원하지 않습니다. 많은 신학생들이 교회에서 목사가 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찬양을 인도하고, 방송장비를 설치하고 화면을 쏘는 일 등을 해야 합니다. 목사들이 신학생을 뽑을 때도 그의 성직자로서의 자질을 보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교회 잡일을 할 수 있는 기능을 요구합니다.

  신학생은 신학교에서도 문젯거리일 것입니다. 갈수록 신학생들의 실력이 낮아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신학교의 불평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신학생들의 실력이 다른 곳에 훨씬 못 미친다는 평가를 듣곤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기르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나무 탓만 하는 것은 아닌지 싶습니다. 우리 신학교에서 신학생은 더 이상 각별한 존재가 아닙니다. 등록금을 내고 다니는 일반 학생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신학생들의 자질 문제만큼이나 신학생들은 교수들과 학교의 자질을 불평합니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6년이나 신학의 과정을 밟고, 거기다가 이년이나 수련 과정을 거쳤는데도, 별로 배운 것이 없습니다. 커리큘럼에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학부 때나 대학원 때나 과목만 다를 뿐 그 내용이 그 내용입니다. 신입생 때부터 수련과정을 밟을 때까지 체계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습니다.

  신학생들에게 불평만을 터뜨리는 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와 신학교가 함께 한 사람 한 사람의 신학생을 그 학문 면에서나 인품 면에서 건실한 목사가 되도록 길러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노력들이 제도로 뒷받침되어야합니다. 교회의 미래를 염려하며 대안을 찾으려는 몸부림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대안 중에 제일은 바른 목사를 길러내는 일입니다. 결국 미래의 목사에게 교회가 달렸기 때문입니다.

2. 신학바탕에서 기르기

  요즘 우리 교단을 둘러보면 우리가 한 교단인가 싶을 만큼 분열을 보이고 있습니다. 단지 정치적인 면이 아닙니다. 과연 같은 기장 교회인지가 의심이 들 만큼 교회마다 성격이 다르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장, 그리고 한신의 신학적인 정체성이 문제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장 통합이니, 합동이니, 고신 측은 그들 나름대로 일반적인 특색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같은 기장이라는 어떤 공통적인 것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를 반영하듯 오늘날 목사후보생들을 보면 염려스런 점이 있습니다. 과연 기장과 한신의 신학생 맞는가 하는 걱정이 듭니다. 물론 이것은 일정 부분 교회 현장에서 생긴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많은 현장의 기장 교회는 기장 신학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장에 도움이 되는 신학과 신학생을 원합니다. 그러다 보다 많은 교회에서 다른 신학 성향을 갖고, 다른 신학교를 나온 신학생을 찾습니다. 이는 단지 교단이 보수화되고, 우경화되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근본에서 기장과 한신이 필요한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 기장과 한신의 신학에 붙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진보적’이란 말과 ‘학문의 자유’라는 말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신이 분명한 신학적인 정체성 또는 바탕을 분명히 하고 학생들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서 한신을 졸업하고 기장에서 목회를 하면 성향은 다 달라도-그가 성령파든, 보수파든, 민중파든-어떤 공통점을 든든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장이라는 한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기장과 한신이 가져야할 신학 바탕, 곧 신학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제가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굳이 한신 신학에 대해 정의를 내리지 않아도 학교에 신학적인 정체성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학풍위에서 민중 신학이 한 편에 날카롭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학교 안에는 개혁교회의 맥을 잇는 신정통주의 바탕이 굳건히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신학은 에큐메니칼 했습니다. 때문에 기장 인이고 한신 인이면 어떤 공통성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새로이 기장과 한신의 신학이 자기 토대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럴 때 우리의 신학은 ‘한국-개혁교회-에큐메니칼’신학입니다.

  ‘한국-개혁교회-에큐메니칼’신학은 우선 자주적이고 주체적 신학입니다. 한국이란 수식어가 그것입니다. 1953년 제 38회 총회 ‘호헌사’에서 우리는 ‘복음의 자유와 신앙양심의 자유, 자립자조 정신의 함양, 세계 교회 정신’을 천명했습니다. 선교사들의 제국주의 선교에서 벗어나 이 땅에서 우리의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신앙과 신학을 촉구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얼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스위스 종교개혁 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유산 위에 서 있습니다. 칼빈의 신학체계를 교조화한 칼빈주의가 아니라 살아있는 종교개혁의 유산을 상속받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학은 전 세계의 교회와 어울리며 대화하고 협력하는 에큐메니칼 신학입니다. 한신의 신학은 ‘한국’-‘개혁교회’-‘에큐메니칼’이라고 하는 분명하고 견고한 정체성 위에서 자유롭고 열린 태도로 다양한 신학운동들-민중신학, 여성신학, 생태신학, 종교다원주의 신학, 오순절 신학까지도-을 주체적으로 수렴하는 신학이라야 합니다.

  이런 신학적인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 신학교의 교과목도 안배를 해야 합니다. 우리 신학은 지금도 주체적이고 에큐메니칼합니다. 그런데 개혁교회의 특성이 약화되어 있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개혁교회 신앙과 신학을 충분히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분명한 신학적인 토양 위에서 신학생을 기를 때, 이들은 각자 다른 색깔의 성향을 갖더라도 기장이라는 정체성을 잘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기장이 보수화되고, 우경화되는 현상도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체계와 초점을 가지고 기르기

  학부에서부터 수련과정까지 다 마치면 적어도 8년이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이 8년의 교육과정에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종종 신대원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면, 이들이 학부에서 무엇을 배우기는 배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초신학이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때로 학생들도 불평합니다. 학부에서 배운 과목이나 대학원에서 배우는 과목이 포장만 다를 뿐 내용이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게다가 수련과정에 가면 또 같은 것을 되풀이하거나 불필요한 것들로 짜여 있다고 합니다.

  신학생들의 성실성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목사들은 신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일부 교회 현장에서 신학교 공부는 목회에는 아무 쓸데가 없다고 여기는 탓일까요? 아니면 신학생들이 교회 일에 바빠서 학교 공부에 집중할 수 없는 걸까요? 아니면 신학을 하기에는 그 인품이나 성실성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신학생들이 학교의 공부를 성실히 할 수 있는 면학분위기도 생겨나야 하고, 또 신학을 공부하기에 맞는 사람들을 목사후보생으로 택하는 노력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학생들 탓만 할 수 없습니다. 신학교도 학생들이 과정을 다 마치면 성직자(목사)로서 충분한 학문적 능력과 인품, 그리고 영성을 갖추도록 커리큘럼을 갖추고, 세심한 노력도 기울여야 합니다. 학부, 대학원, 수련과정이 각각 다른 강조점과 특성을 가지고 커리큘럼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신학교의 교육과정이 체계적이면서도 분명한 초점을 가지고 아름다운 목사를 길러낼 수 있을까요?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서 이런 교육체계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대학원까지 6년의 교육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각각 초점을 주고, 교과목을 그에 맞게 배치하는 것입니다. ‘의식화-영성화-교역화’의 체계를 갖추었으면 합니다.

  제 1단계는 학부 1-2학년 단계로, 이 단계의 초점은 ‘의식화’입니다. 이 단계는 세계에 눈을 뜨게 하는 과정입니다. 막 신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은 아직 의식이 세계를 향해 열려있지 않습니다. 대체로 교회에 열심히 있는 학생들이 신학교에 오는 것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들은 교회주의에 갇혀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포해야할 내용은 하나님 나라이고, 그것을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이라고 하는 이 의식화의 차원이 빠지면 그 모든 신학은 관념이 되고, 교회주의의 도구가 되고, 타계적이 되고 맙니다. 이 의식화 단계에서는 필수적인 인문교양, 사회과학, 개론적인 기독교, 제2 외국어를 집중적으로 배웁니다.

  제 2단계는 학부 3-4학년 단계로, 이 단계의 초점은 ‘영성화’입니다. 세상을 해방하는 힘은 우리의 신앙에서 나옵니다. 세상에 눈을 떴으면 그 다음 단계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활짝 눈을 떠야 합니다. 제 1 단계에서 세계를 공부했다면, 이제는 우리의 영성의 샘인 말씀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의 삶이 필요합니다. 이 기간에는 성서언어와 전통적인 신학의 분류에 따라 성서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을 집중적으로 배웁니다.

  제 3단계는 대학원의 단계로, 이 단계의 초점은 ‘교역화’입니다.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선교하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를 세우고, 훈련하고, 파송해야 합니다. 때문에 이 시기는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실천신학을 중점적으로 배웁니다. 그러나 이 과정의 실천신학은 단지 이론으로서의 실천신학이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실제로 가능할 수 있는 뜻에서, 그리고 실천적인 안목으로 이론 신학들을 통합하고 응용하는 뜻에서 실천신학입니다.

  문제는 갈수록 교회 현장에서 신학생들에게 더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것들을 요구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학교가 자세한 실기나 실제를 줄 수는 없습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더 실기적인 면들은 목사후보생들이 섬기는 지 교회와 노회, 그리고 수련과정에서  표준적인 내용들을 마련해서 지도하고 키워주어야 할 것입니다.

4.경건 안에서 기르기

  우리 때도 들었던 말입니다. 경건이 부족하다는 푸념입니다.  한신이 종합화가 되고 나서는 이 경건이 더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신학과가 일반 학과와 같이 살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많은 목사들이 한신 신학생들은 경건이 부족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예 한신 신학생을 교회에 받아들이지 않고 타 신학교 학생을 받아들이곤 합니다. 다른 신학교 학생이 학문은 떨어져도 경건하고 영성이 더 많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요구하는 경건과 영성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경건을 단지 술 담배를 하지 않는 율법적이고 금욕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경건하고 영성적인 삶을 뜨거운 성령 체험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경건은 하나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전 존재가 전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향해 있는 것이 경건입니다. 늘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뜻을 자기 안에서 이루어 가는 삶이 경건입니다. 이런 경건을 위해서는 깊은 기도와 말씀 묵상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학생들이 이 점에서 약한 것은 사실입니다. 어떻게 경건 안에서 목사후보생들을 기를 수 있을까요?

  불교나 가톨릭과 비교할 때 개신교는 영성수련이 훨씬 덜 되어 있습니다. 불교나 가톨릭은 공동 수련 생활을 통해서 성직자를 양성하는데, 개신교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신학교는 함께 사는 일상의 수련 속에서 영성훈련을 시키기 보다는 부흥집회 같은 것을 통해서 종교체험을 강화시키려고 합니다. 저는 우리 기장 목사후보생들을 공동체 훈련의 장속에서 교육하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신학교를 너무 일반대학의 모델에 맞추려고 합니다. 또 신학공부를 개인의 자유문제로 여깁니다. 그러나 신학교육은 신학에 맞는 특수한 모델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학공부는 개인의 훈련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훈련문제로 생각해야합니다. 우리 신학교는 수도원 모델을 도입해야 합니다. 칼빈은 성소를 따로 갖고, 세상으로부터 단절한 금욕집단으로서의 수도원은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을 높이 평가하고, 수도생활을 세상의 한 가운데서 만인이 해가기를 원했습니다. 특히 칼빈은 고대 교회의 수도원은 성직자 양성을 위해 생긴 것으로, 여기서 질 높은 성직자들이 배출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와 함께 독일 나치 치하에서 고백교회가 핑겔발데에 세운 목사후보생 수련과정과 형제의 집의 공동체 생활은 이 세상에서 강력한 영적인 힘을 가진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길러낸 좋은 보기입니다. 어떻게든 우리는 목사후보생들이 수도원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함께 생활하며 자유롭게 공부할 뿐 아니라(학문), 공동생활 수련(경건)을 신학교 기간에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공동생활의 장에서 목사를 기를 때 중요한 요소들은 예전과 기도와 성서입니다. 지금처럼 형식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적어도 신학생들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예전적인 예배를 매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배의 영성이 깊이 자리 잡히게 됩니다. 신학교의 예전적인 예배는 교회들의 예배를 개혁하고 교회 일치를 이루는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예배와 아울러 매일 기도를 신학교 다니는 동안 훈련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강사를 모시고 집회하는 식의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떼제 공동체와 같은 기도 형식으로 이른 아침에, 한낮에, 저녁에 날마다 함께 기도드렸으면 합니다. 성서읽기도 공동체 생활의 장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루일과 시작 전에, 그리고 저녁기도를 드리기 전에 신학생들은 일제히 성서를 소리 내어 읽습니다. 그것도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읽습니다.

  공동체 생활의 장에서 예배와 매일기도, 그리고 원전 성서읽기 수련 가운데서 생활하면 목사후보생들은 학문과 함께 깊은 경건과 영성을 얻게 될 것입니다.

5. 책임지고 기르기

  목사후보생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교회나 노회가 그 책임을 다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목사를 배출하는 일은 한 개인의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일입니다. 교회가 책임을 가지고 목사후보생을 선발해서 신학교에 보내 공부시키고, 교회봉사를 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잘 마치도록 경제를 지원하고 삶을 지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이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목사후보생들을 관찰해보면 눈에 드러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섬길 교회를 정할 때 노회나 교회가 안내해 주지 않습니다. 신학생들끼리 알음알음으로 교회를 옮겨 다닙니다. 학교도 노회도, 총회도, 그 어느 곳도, 신학생들을 체계 있게 교회로 연결 지어 주지 않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이에 따라 신학생들 사이에 경제 양극화도 벌어집니다. 용케 줄이 닿아서 큰 교회에 간 목사후보생들은 교회에서 장학금도 받고 교통비도 후하게 받아서 어려움 없이 학교에 다닙니다. 그러나 어떤 목사후보생들은 거의 지원이 없는 교회를 봉사하며 어렵게 공부해야 합니다. 교회 일에 매여 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어려워서 그 고통은 배가 됩니다.

  교회와 노회는 목사후보생들을 지도할 큰 책임이 있지만 형식적일 때가 많습니다. 담임목사는 바쁜 탓인지 장차 목사가 될 신학생들에게 많은 시간을 내서 대화하거나 지도하지 않습니다. 노회는 노회 전에 한 차례 면접을 치르고 장학금을 주는 것이 고작입니다. 신학교가 목사후보생들의 학문을 책임지는 반면, 교회와 노회는 목사후보생들의 경제와 봉사생활과 목사가 되는데 필요한 실제적인 사항들을 책임져야 합니다.

  몇 가지를 교회와 노회에 제안하고 싶습니다. 먼저 노회 차원에서 신학생을 선발하는 것입니다. 분명 개 교회를 살펴보면 어린이 때나 청소년 때부터 성직의 길을 가려고 준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꼭 목사후보생을 신학교 학부 3 학년 때부터 선발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노회는 산하의 교회들과 긴밀히 협조해서 미리 목사후보생을 선발하여, 노회가 그들을 신학교에 보내고 관리하는 구조를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노회가 선발한 목사 후보생들은 노회가 봉사할 교회를 정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가 봉사할 신학생을 배정 맡으면, 그 교회의 담임목사는 신학생들에게 시간을 많이 내서 지도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배운 이론 신학을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줍니다. 방학 때를 이용해서 같이 심방도 하고 교회의 회의나 운영을 참관하게 합니다. 정기적으로 목사후보생들과 대화하며 학교생활과 경건생활을 지도하고, 목회에 대한 꿈과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해 가게 합니다.

  이런 체계 있는 지도와 함께 실제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목사후보생들의 학비는 교회가 책임져야 합니다. 다행이 노회마다 목사후보생들에게 학비의 일부를 보조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목사를 길러내는 일은 목사가 될 사람 개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교회의 책임입니다. 수유리에 신학대학원 건물을 짓기 위해 몇 년간 교회들이 재정의 1%를 헌금했습니다. 이제는 건물이 아니라 목사후보생의 교육을 위해서 교회마다 1%헌금을 제도적으로 한다면 신학생들이 경제 걱정 없이 학문과 경건에 정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목사후보생들의 수준은 저절로 높아집니다.

6. 인격을 기르기

  솔직히 말하면 요즘은 목사가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교인들과, 특별히 장로들과 전쟁을 지르느라 지쳐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집사 장로가 되었으면 그 인품이 아름답게 자라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세상 사람들보다도 못합니다. 형편없는 인격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의 직분을 맡습니다. 저 사람이 집사가 맞고 장로가 맞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제 눈에는 너무도 많은 교인들과 제직들이 정신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보입니다. 이런 교인들과 제직들, 특별히 장로들을 상대로 목회해야하는 목사는 너무나 큰 상처를 받습니다.

  저에게 목사의 제일 큰 자질을 물으면, 저는 주저 없이 인격, 곧 사람 됨됨이라고 말합니다. 교인들의 인격만큼이나 교인들은 목사의 인격 때문에 상처를 받고 실망합니다. 실제로 교회의 분쟁과 문제들의 핵심에는 목사의 인격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인들은 목사에게서 예수님의 인격을 보기를 원합니다. 목사의 인격을 통해서 교인들의 거칠고 병든 인격이 조금씩 치유됩니다. 그런데 목사 자체가 인격의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자질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재물이나 명예를 탐합니다. 독단합니다.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정신 병리적인 성격을 얼마든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평화와 기쁨은 목사의 인격에 달려있습니다. 한국의 개신교가 이렇게 된 것은 목사들의 인격의 자질이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신학생들 가운데는 저 인간성으로는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하고 염려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생들도 똑같은 젊은이이고 학생입니다.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비교해보았을 때 다른 젊은이보다는 두드러진 인간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의 깊게 관찰하면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별로 다르지 않은 인격을 가지고 신학교를 나와서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게 될 때, 교인들은 자기들과 다른 바 없는 인격을 가진 목사와 복음이 아닌 것-비본질적인 것, 곧 인간적인 요소들-때문에 갈등하고 대결합니다. 신학교에서는 신학생들의 학문과 경건에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 학문과 경건을 기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목사의 인격을 기르는 일에는 큰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 않습니다. 남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직업은 그 무엇보다 인격적인 건강성이 요구됩니다. 때문에 교과과정을 통해서 건강한 인품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차례 전문심리치료 모임에 간 경험이 있습니다. 이 심리치료모임은 너무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문 심리치료사의 도움을 통해 저의 무의식의 상처와 억압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열등감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나를 치료하게 되었습니다.

  신학교 교과목 중에 목회상담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저는 적어도 목사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전문적인 심리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학교에서는 필수과정으로 신학생들이 집중적인 심리치료 과정을 이수하게 해야 합니다. 노회는 심리치료과정 이수여부를 물어야 합니다. 아울러 신학생들은 신학의 전 과정을 통해서 좋은 상담자(mentor)를 통하여 인격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이 역할은 일차로 신학교 선생님이 맡아야 합니다. 신학생의 자질만큼 신학교 선생님들에 대한 인격적 자질이 신학교육의 가장 큰 문제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신학교 선생님은 일반 교수와는 달랐으면 합니다. 신학교 선생님들도 목사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출가를 한 사람들입니다. 신학생들에게는 선생님들이 성직자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심리치료를 하는 필수 과정들을 거치고, 신학교 선생님들을 멘토로 건강한 인격지도를 받으면 지금보다는 건강한 목사들이 나올 것입니다.

7. 성직자로 기르기

  저는 신학교가 ‘전문교역자’를 양성한다고 하는 말에 상당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문교역자’란 말 때문입니다. 마치 교회를 위한 전문인이란 말로 들립니다. 교회라는 종교집단을 굴려가는 전문 기능인이 목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마다 목사를 청빙할 때 성직자를 구하지 않습니다. 공채를 합니다. 공채의 조건들을 보면 자기 교회를 잘 유지하고 성장시킬 CEO 목사를 원합니다. 교회 성장의 기술을 가진 목사를 원하고, 그런 기능을 신학교가 가르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다 보니 신학교도 어느 틈에 진리와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사제교육보다는 교회를 잘 경영하는 기능인 양성소가 되어가는 느낌입니다.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교역’의 개념이 발달했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가꾸고, 성장시키고, 선교하는 것은 목사 개인의 일이 아니고, 교회 전체 일입니다. 모든 교인의 일입니다. 모든 교인이 교회 일의 전문가가 되어 교회의 운영과 선교에 참여해야 합니다. 목사는 교역의 아주 중요한 부분, 특수한 부분을 맡습니다. 그래서 만인이 다 사제이지만, 목사는 ‘안수 받은 특수 교역자’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그 역할은 말씀선포와 성례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교회라고 하는 종교집단을 확장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말씀 선포와 성례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교회 CEO를 원하고 양성하는 세속화되는 교회와 신학교를 통해 목사후보생들은 갈수록 교회의 전문 경영인 수업을 받는 실정입니다. 그 결과 교회에서 복음과 하나님 나라가 죽게 되었습니다.

  교회도 신학교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와 신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성직자를 기르는 교회와 신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그동안 잊었던 성직자의 기능을 새롭게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성직자는 출가자입니다. 신학교육은 출가자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집과 배와 그물을 버리고 출가했습니다. 불교나 가톨릭의 성직자는 이 출가가 분명해서 성직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이 출가의 성격이 약합니다. 그래서 세속에 미련이 많고, 세속과 너무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개신교 목사도 독신 수도생활을 할 수 있는 풍토가 어서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신학생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출가자라는 점을 인식하고, 거기에 맞추어서 신학교 체제도 마련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성직자는 수행자이며 구도자여야 합니다. 신학교육은 단순히 신학이란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서구신학교육의 비극은 신학을 대학이란 학제 안에서 여러 학문 중의 하나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승려의 양성을 생각해 봅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불교학을 가지고 승려를 기르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과정을 통하여 기릅니다. 이 수행 안에 학문도 있어야 합니다. 바야흐로 신학은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실천으로 이끄는 실천체계인 수행의 한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성직자는 신학을 공부해서 신학자가 되거나 교회의 경영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성직자는 언제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여야 합니다. 이제 신학교육은 과감히 일반대학의 학제를 뛰어넘어서 구도자를 길러내는 독특한 신학교육의 장을 마련해야 합니다.

  셋째로 그리스도교 성직자는 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기능화되고 세속화된 신학교육은 교회를 이끄는 ‘전문 교역자’를 양성하는 것이 그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개신교는 점점 예수 없는 예수교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모든 신학과 설교와 교회의 삶의 목적은 교회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목사라는 직분도, 교회의 임무도, 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것임을 잊었기에, 오늘날 신학교도, 교회도,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본래 기능을 잃고 말았습니다.

  ‘한국-개혁교회-에큐메니칼 신학’을 바탕으로 가진 우리 기장과 한신의 목사 기르기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에 따른 커리큘럼과 교육체계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의 신학교육은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성직자를 길러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세워야 합니다. 교회 경영인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성직자를 길러야 합니다.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AI의 가장 큰 위험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죄"

옥스퍼드대 수학자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존 레녹스(John Lennox) 박사가 최근 기독교 변증가 션 맥도웰(Sean McDowell)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신간「God, AI, and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여성들, 막달라 마리아 제자도 계승해야"

이병학 전 한신대 교수가 「한국여성신학」 2025 여름호(제101호)에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서방교회와는 다르게 동방교회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극단적 수구 진영에 대한 엄격한 심판 있어야"

창간 68년을 맞은 「기독교사상」(이하 기상)이 지난달 지령 800호를 맞은 가운데 다양한 특집글이 실렸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1945년 해방 후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김경재 교수는 '사이-너머'의 신학자였다"

장공기념사업회가 최근 고 숨밭 김경재 선생을 기리며 '장공과 숨밭'이란 제목으로 2025 콜로키움을 갖고 유튜브를 통해 녹화된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경직된 반공 담론, 이분법적 인식 통해 기득권 유지 기여"

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연합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공 관련 담론을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