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고 말했던가. 한국교회도 이런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타고, 진화·발전해 왔다고 말할 수 있겠다. 80년대 군사독재 시절. 정권과 타협하는 교회들과 그렇지 않은 교회들 사이엔 명암이 엇갈렸다. ‘정교분리의 원칙’을 주장하며 정권에 침묵했던 주류 기성교회들은 정권으로부터 음으로, 양으로 지원을 받으며 교세를 크게 성장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주류 기성교회와는 달리 정권에 반기를 들고, 투쟁했던 교회들은 하나같이 핍박을 받았다.
▲ 교인들을 형제, 자매로 호칭하는 새길교회는 현재 강남청소년수련관에서 예배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베리타스 DB |
이 시기 특히 평신도 지성인들은 평신도가 주체가 된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교회가 ‘새길교회’였다. 기성교회의 정권 타협적이며 권위주의적이고, 비도덕적인 모습들을 반성하며 성찰 끝에 세워진 ‘새길교회’는 교회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이 교회는 처음부터 소속이 없고, 직분이 없고, 예배당도 따로 없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당시 하늘 높이 교회탑을 쌓기에 바쁜 한국교회에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며 말씀을 나눌 수만 있다면 예배당이라는 새로운 예배 문화를 선보이기도 했다.
직분이 없어 나이가 많건 적건 호칭을 장로나 집사로 부르지 않고, 형제, 자매로 불렀다. 처음에는 쑥스럽고, 어색했지만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는 자연스럽기만 하다. 교회 운영은 공동의회에서 선출된 30인 이내의 운영위원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맡고 있으며 이곳에서 선출된 운영위원장은 그 임기가 1년에 불과하다. 담임 목사가 없다보니 대개 신학위원들이 설교를 돌아가면서 맡지만, 때로는 외부 인사를 초청하거나 다른 평신도들을 강단에 세우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 교회는 소속이 없다. 즉, 어느 교단에도 소속되지 않아 교권에 매몰될 염려가 없다.
새길교회의 창립 멤버들 중 사회학을 한 한완상 박사, 종교학을 한 길희성 박사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 그리고 이웃 종교와의 관계라는 두 줄기 큰 흐름을 만들어왔다. 독일 히틀러 시대 기성교회에 대한 반발로 탄생된 본훼퍼의 고백교회를 모범으로 삼았기에 이들은 가능한 한 세속화를 시도했다. 그래서 교회와 사회의 관계, 이웃 종교와의 관계 속에서 담론들을 형성해 왔다. 인권, 민주, 종교간 대화. 나아가 종교 포용주의 등등 말이다.
새길교회는 무엇보다 평신도 지성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신앙의 양심을 일깨우는 일에 집중했다. 그래서 계절 마다 일요신학강좌,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아카데미, 새길 포럼 등을 열며 평신도 교육과 훈련에 열정을 다했다. 사회 봉사 활동도 이에 못지 않았다. 새길교회는 매년 예산의 60%를 사회 선교·봉사비로 지출해 왔다. 말씀과 교제 그리고 봉사라는 교회의 기능을 다하고자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다.
▲작년 가을 학기 새길기독사회문화원(원장 정지석) 주최로 열린 아카데미는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 전문교육의 장을 열었었다 ⓒ베리타스 DB |
청담동 강남청소년수련관. 200여 명이 넘는 새길교회 형제, 자매들이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24일 기자는 예배 현장을 찾았다. 일주일에 한번 보는 얼굴이 그렇게 반가운지 교인들은 “형제님, 자매님”하며 서로 안부를 묻기 바빴다.
정지석 목사(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가 예배를 마치고, 퇴장하는 형제, 자매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지난해 부임한 정 목사는 한달에 한번씩은 강단에서 설교를 하며 교인들을 돌본다. 또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아카데미 개강과 관련해 커리큘럼을 구성하는 일도 맡고 있다. 길희성 박사는 “전임 목회자가 없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며 “정지석 목사님은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을 맡지만 교인들을 목회적으로 케어하는 일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새길교회는 앞서 89년 문전섭 목사, 91년 서창원 목사를 담임목사로 초빙해 보기도 했었다. 목회적 케어를 바라는 교인들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목사 없는 교회의 고초였다. 교인들 중 혼례가 있거나 장례가 있을 때마다 교회의 대표자로서 누군가는 책임지고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식사를 하러 내려가는 길에 새길교회의 창립 멤버 길희성 박사를 만났다. 길 박사에게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물었다.
- 설립 이래 새길교회의 창립 정신은 여전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보는가.
“본훼퍼를 배운 사람들로서 우리는 창립 정신을 그대로 계승해 가고 있다. 한국교회가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이 여전히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음과 사회 역사 현실의 연계성, 복음의 사회 역사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권위주의에 물들고, 비리에 찌든 기성교회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대안교회로 시작한 새길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창립 정신을 계속 견지하고 있다. 다만 바뀐 것이 있다면 시대 흐름에 따라 민주화와 인권이란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이제는 환경 문제에 까지 관심을 갖게 된 점이다. 바뀐거라 할 수도 없겠다. 사회의 흐름을 읽고, 쫓아가는 것이다. 때문에 올해 신앙고백문에는 생태학적 내용이 좀 보완될 것으로 보인다”
- 새길교회의 신앙적, 신학적 스텐스는 무엇인가. 종교다원주의, 종교혼합주의 요소까지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
▲길희성 박사는 한국교회 현실을 보고, “절망적이다”고 했다. 새로운 변화, 새로운 대안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어야 할 때라는 말이었다 ⓒ베리타스 |
“나 자신은 종교다원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문제이지 새길교회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통신학을 견지하고 있다. 때론 나조차 못마땅할 때도 많다. 종교다원주의적 요소니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 신앙고백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내 개인적인 입장을 놓고, 종교다원이니 비판할 수는 있어도 새길은 그렇지 않다”
- 새길교회를 비롯한 평신도 지성인 교회가 미래 한국교회의 역사 발전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보는가.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 절망적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대안교회를 시도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느냐. 어떤 자극제가 되지 않을까 한다. 기독교 신앙, 교회가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할까. 음으로 양으로 평신도 지성인 교회의 수요는 계속 있을 것이다. 교회의 성장이 멈추고,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다. 새로운 변화, 새로운 대안은 그 흐름을 타고 계속될 것이란 말이다. 앞으로 교회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더욱 절실히 모색하게 될 것이다.
새길교회는 그런 면에서 앞서 나간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교회가 새길교회의 체제를 본뜨라는 말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단, 한국 기독교가 이래서는 안된다. 반성해야 한다는 새길교회의 정신 만큼은 미래 한국교회의 모습에 충분히 반영될 만 할 것이다”
짧게 답변을 마친 길 교수로부터 우연히 ‘하나님을 놓아주자’(도서출판 새길)는 책을 받을 수 있었다. 지난해 9월 발간된 ‘하나님을 놓아주자’는 새길기독사회문화원에서 한 강연과 새길교회에서 한 설교들 중 비교적 최근 것으로 묶어 편집한 책이다.
△말도 안되는 억지 신앙, 자기도 믿지 못하면서 열변을 토하는 식의 이야기는 삼가고, 지적으로 정직한 신앙을 갖자는 것 △한국 기독교의 고질적 병폐로 여겨지는 기복신앙을 극복하자는 것 △불교 등 타 종교를 무조건 백안시하고 배척하는 기독교, 특히 한국 개신교의 배타적 신앙은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 등의 내용을 담은 이 책은 ‘새길’의 오늘과 내일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 잘못된 의식으로부터 하나님을 온전히 놓아드리자는 것. 새길 신앙의 핵심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