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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목사의 구약산책]아브람은 그것이 시험인 줄 알고 있었을까?

너희가 나를 알게 되리라(6)

    ▲이현주 목사 ⓒ베리타스 DB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셨다. ‘어서 말씀하십시오’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분부하셨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종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제물을 사를 장작을 쪼개가지고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가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숫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아브라함은 곧 가서 그 숫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다. 아브라함은 그곳을 야훼이레라고 이름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하신다>고들 한다.” (창세 22, 1-4)

아브라함도 사람인지라 어쩌다가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모리야 땅의 어느 산에서 아들을 번제물로 바친 이야기는 지난날의 모든 허물을 단번에 씻어버리고 그의 모습을 영광스레 우뚝 세워준다.

칼을 들어 아들의 목을 찌르려는 그 순간에 하늘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린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말씀하십시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이어서 이 모든 사건의 의미가 밝혀진다.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엄밀히 말하면 번제물로 잡아 바치려고 하다가 칼을 대기 직전에 행동을 멈추었으니 아직 바친 것은 아니다. 이사악도 물론 죽지 않고 살아 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그가 이미 “바쳤다”고 말씀하신다.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보시는 야훼께서는 아마 사흘 전부터 당신의 종 아브라함이 마음이 새카맣게 타서 재로 되어버렸음을 아셨던 것이다.

아아, 이 복된 순간! 아브라함의 일생이 이 한순간에 찬란한 꽃망울을 터뜨린다. 이 한순간을 위하여 일흔다섯 나이에 고향을 떠났고 이어지는 유랑의 삶을 고달프게 걸어왔던 것일까?

처음부터 그것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한 하느님의 기획이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난감한 일이, 그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시험’이라는 사실을 미리 안다면 훨씬 견디기 쉬워질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숙맥이 아닐진대 그 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따라 나도 아내도 일을 좀 많이 했고 그래서 저녁나절이 되자 몸이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거웠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저녁식사는 라면쯤으로 때우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는데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후배 일가가 대문을 열며 왁자지껄 들어서는 게 아닌가? 저런, 하필이면 이 시간에, 그것도 혼자서가 아니고 식구 모두를 데리고 사전에 약속한 일도 없는데 이렇게 들이닥치면 어쩌란 말인가? 난감한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아내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벌써 짜증이 맹렬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어여 들어오게, 잘 왔어.” 마음에 없는 빈말로 맞아들이는 수밖에.

후배는 서재로 나를 따라들어와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며 별로 긴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내 신경은 온통 부엌에 있는 아내한테 가 있다. 꼬마 녀석 둘이 안방에 들어가 TV를 켜놓고는 노래를 부른다. 아이구, 맙소사! 그 어머니도 아이들과 손뼉을 치면서 합창을 한다. 아무리 철이 없기로소니 다 저녁때에 이렇게 와서 우리는 노래부르며 놀 터이니 어서 저녁 한상 차려내라는 식으로 굴면 어쩐단 말인가?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었다. 하마터면 후배에게 ‘자네 처한테 말 좀 해주게. 이렇게 저녁 먹을 시간에 왔으면 부엌에 가서 빈말로라도 저녁 준비를 걱정하는 척은 해야지, 저렇게 무슨 음식점에 온 사람들처럼 아이들과 손뼉이나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어쩌나?’하고 말할 뻔했다. 그런데 아슬아슬하게도 그 순간 하느님을 불렀다.

난감할 때에는 화살처럼 짧고 빠른 기도를 하라고 교인들에게 가르쳐 왔는데 너는 왜 실천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느님, 이게 무엇입니까?’ 내가 급하니 하느님의 대답도 급하셨다. ‘저 아이들은 내가 보낸 천사들이다. 네가 평소에 말한 대로 실천에 옮기는지 알아보려고 내가 보낸 시험관들이야.’ 순식간에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저들이 나를 시험하기 위해서 파견된 천사라면 시험에 걸려 넘어지는 건 바보나 할 짓이지, 어림도 없다. 얼마든지 천사 대접을 해주마.

이렇게 마음먹자 오히려 여유만만한 웃음까지 나왔는데 문제는 아내였다. 아내가 평안해야 집안이 평안한 법인데, 내 쪽보다 중요한 건 아내 쪽 아닌가? 다시 급한 화살기도를 바쳤다. ‘하느님, 급한 건 저보다 용선이 쪽입니다.’ 그 때 수도꼭지에서 물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쌀 씻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내 입에서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저녁상 잘 차려 네 식구 먹이고 한동안 재미있게 놀다가 보냈다.

잠자리에 들어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위기(?)를 넘겼느냐고. 아내의 대답.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람을 일부러 약올리려고 작정을 하지 않았다면 저럴 수 없겠더라. 나를 시험해 보려는 것 같은데 내가 왜 당해?”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칫 떨어질 뻔한 분노 또는 위선의 구덩이를 비켜 아슬아슬 시험을 넘긴 일이 있다. 생각해보면 역시 은총이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뭔가 찜찜했다. 그들이 ‘시험관’인 줄 모르고 시험을 치러서 당당하게 합격했더라면 훨씬 더 기분이 좋았을 것 아닌가? 천사인 줄 모르고 천사를 대접했던 아브라함처럼! 우리 부부의 됨됨이가 그만큼 밖에 되지 못했기에 하느님께서 잠깐 ‘커닝’을 허락하셨던 것일 게다.

아브라함은 외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그것이 자기의 믿음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았을까?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아브라함은 일언반구 자기의 마음을 털어놓지 않는다. 어째서 하고 싶은 말이 없었겠는가? 우선 하느님의 명령 자체가 당신의 약속에 어긋난다. 이사악을 통해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겠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하나밖에 없는 ‘씨’를 불에 살라 바치라는 명령은 무엇인가?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다.

아브라함은 어째서 하느님께 이의를 제기하거나 의심나는 바를 질문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갖추고 ‘서둘러’ 길을 떠났을까? 하느님의 명령에 언제까지 하라는 시한이 명시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흘이나 되는 여행 기간 동안 그는 무엇을 했을까? 기록이 암시하는 바는 그저 줄곧 열심히 걸었다는 사실이다. 입을 한일자로 다물고 누가 물어도 아무 대꾸 없이, 주변 경치 따위는 물론 살펴볼 짬도 없이. 오직 걷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사람처럼 그렇게 걸었을 뿐이다. 이윽고 목적지에 이르러 제물이 될 아들과 단 둘이 산꼭대기로 오르는 장면은 지극히 절제된 언어로, 아들을 죽여야 하는 아버지의 절박한 심정을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느 작가가 이보다 더 잘 아브라함의 심정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을까? 이 대목이야말로 구약문학의 백미라고 하겠다.

집을 떠나 현장에 도착하여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에 올려놓기까지 아브라함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 두마디뿐이었다. 아들의 물음에 마지못해서 대답한 것이 그것이었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미루어 살펴보면 우리가 가끔 ‘이것은 실제 상황이 아니라 연습에 불과하다’는 예비군 훈련대장의 방송을 미리 듣고 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듯이 그렇게 하느님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아니었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것이 전혀 의심할 나위 없는 ‘실제 상황’이었던 것이다.

무엇이 상상조차 가서 닿기 힘든 까마득한 벼랑에 자기의 몸뚱이를 내던질 수 있게 했을까? 아들의 몸을 밧줄로 묶어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찌르려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을까? 없었을 것이다.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생각은 무슨 놈의 생각이냐? 문자 그대로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그러나 동시에 자기가 하는 일을 똑똑히 알고 있으면서 일의 순서에 따라 조용히 단호하게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다.

이것이 장자(莊子)의 이른바 ‘좌망(坐忘)’일까? 자기의 뜻도 견해도 생각도 판단도 모두 비워버리되 한순간도 자기를 놓치지 않고 선명하게 깨어 있음! 아브라함이 만일 하느님께서 자기를 시험해 보려고 아들을 잡아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신 줄 미리 알았다면? 그랬더라면 뒤이어 일어난 모든 사건은 짐짓 그렇게 해본 짓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요, 우리는 한바탕 쇼를 구경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아브라함은 그것이 시험인 줄 알고 있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마땅히 ‘아니다’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쇼를 벌이게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이현주 목사(1944년 충북 충주 출생, 1977년 감리교 신학대 졸업 1995년 강원 철원 반석교회 시무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당선으로 등단, 2006년 드림실험교회 참여해 현재까지 사역, 저서로는 '사람의 길 예수의 길', '대학 중용 읽기', '이아무개 목사의 금강경 읽기'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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