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같이 살 수 있는 사상과 정신의 집을 유영모, 함석헌의 씨알 사상이 지은 겁니다. 세계가 더불어 살 수 있죠. 민족과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서 세계가 한 집안을 이룰 수 있는 정신의 집이 씨알 사상 속에 있습니다”
얼마 전 유영모의 귀일(歸一)사상을 끝으로 5주 과정의 유영모 사상 강좌를 마친 박재순 소장. 13일 만난 그에게선 동양 철학의 자존심 그리고 동서양을 뛰어넘는 세계철학에 대한 강한 확신이 물씬 풍겼다.
그는 이날 인터뷰내내 우리나라야 말로 유교, 도교, 불교, 기독교 등 동서문명이 조화롭게 공존해 있는 국가로 동서양을 어우르는 세계철학을 꽃피울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갖고 있다고 설명하며 ‘씨알사상’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호소했다.
박 소장이 말한대로 동서문명을 통전적으로 해석한 ‘씨알사상’은 지난 8월 제22차 세계철학대회에서 집중 조명되는 등 서양 철학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동서문명이 혼합된 세계적 철학으로의 도약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줬다.
이런 ‘씨알사상’을 심화·발전시키기 위해 내년 2월 ‘씨알 철학회’ 발족을 앞두고 있기도 한 박 소장은 앞서 5주간의 유영모 사상 강좌를 통해 자기 나름대로 씨알사상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런데 1970년대 그가 대학생 시절 때부터 줄곧 따랐던 사람은 다석 유영모가 아닌 신천옹 함석헌이었다. 이날 만난 자리에서 함석헌을 스승으로 둔 그가 다석 유영모 사상 강의를 하게 된 사연, 종강 소감 그리고 그가 본 씨알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눠봤다.
- ‘다석 유영모 사상’ 종강 소감은.
“종교도 어렵고, 사회 돌아가는 것도 어렵고, 어러모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 인문학을 배우러 시간을 내서 찾아와 강의를 들었던 수강자들의 태도와 자세가 귀해 보여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왔는데 나름대로 진지하고, 무엇인가를 탐구하려는 자세를 갖고 있어서, 말하자면 사상의 집을 지으려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 온 것 같아서 강사로서 보람을 느꼈죠.
그러나 아쉬운 것은 문명으로 보거나 사회 경제로 보거나 정치로 보나 정말 우리가 생각을 바로 세우고, 생각을 깊게 해야 하고, 정말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세상이 바로 되겠는데..그런 사람들이 기대만큼 많지는 않아요. 점점 진리를 탐구하고, 사상의 집을 짓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으면 좋겠어요”
- 다석 유영모는 누구인가?
“유영모 선생님. 동서 문명이 본격적으로 만나는 그 시대에 태어나서 기독교 신앙을 깊이 받아들였고, 동양문명을 철저하게 탐구해서 그 분 말대로 동양 문명의 뼈에 서양 문명의 골수를 심는 그런 심정으로 평생을 사신 분이었어요. 동서문명의 창조적인 융합과 만남을 추구하고, 실현했던 분이며, 누구보다도 정신과 영혼의 깊이를 깊게 탐구하신 분이었다. 이분의 영성의 깊이는 감히 누가 흉내낼 수 없을 만큼 깊었죠.
알다시피 한국 근현대사는 동서문명의 만남일 뿐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과정이기도 해요. 조선왕조가 몰락하고, 일제 식민통치를 겪으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그 원리는 민주주의. 씨알 사상이 거기서 나온 거죠. 한 사람 한사람을 정신, 도덕, 인격에서 바로 세우는 그런 일을 평생 했고, 씨알 한 사람 한 사람을 삶과 역사의 주인으로 세웠던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함석헌의 제자인 것으로 알고있다. 그럼에도 다석 사상에 대한 학문적 조예가 깊은 것 같은데..
“대학 4학년 때인 1973년도에 함석헌 선생님을 만났어요. 함 선생한테 성경공부, 노자, 장자공부를 꾸준히 해왔고, 함 선생 강의를 꾸준히 들었으니까 제자라고 하면 제자라고 할 수 있죠. 75년도엔 함 선생이 다니셨던 퀘이커 봉헌동 모임에 1년 동안 다닌적이 있었는데, 그 때 세검정에 있던 다석 선생을 만나고, 그의 말씀을 두 시간 가량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그 때 두시간 동안 들었던 말씀이 지금까지 잊혀지지가 않아요. 당시 대단한 인상을 받았어요.
그러나 그 이후에 척추수술을 크게 받아서 유 선생을 뵐 수 있는 기회가 사실 없었어요. 단지 함 선생님 사모님 돌아가셨을 때 그 때 와서 잠깐 말씀 전하시는 것을 멀리서 한 번 들었던 기억밖에 없다. 함 선생님 공부는 꾸준히 해온던 터에 2002년엔 씨알사상연구소 회장이 되어 작년까지 회장 노릇을 해왔어요.
그런데 그 무렵인가 새길기독교사회문화원에서 나한테 다석 유영모 사상 강좌를 10주에 걸쳐 해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해왔어요. 당시 나는 다석 선생 공부가 깊지도 않은데 왜 나더러 하라고 하냐. 다른 좋은 사람을 모시라고 했는데 공부 안하는 사람들이 새롭게 하는 게 좋다며 억지로 나한테 맡기는 거에요.
사실은 그 전에 90년대 초 유영모 선생의 전기가 나오던 시절 ‘씨알 다석 유영모’(박영호 저) 등 꽤 두꺼운 책을 읽으며 유영모와 함 선생님이 뗄 수 없는 깊은 관계인 것을 알고 있던 터였죠. 하지만 더 깊은 학문적 조예가 없는 상태에서 유영모 강의를 10주나 하라고 했던 것은 지나쳤지만 주최측이 워낙 강경해서 다석 강의를 울며 겨자먹기로 하게 됐죠.
그래서 욕심을 내서 10주 강의를 했는데, 그 때 공부를 많이했죠. 2001년도엔 그 때 유영모 선생이 너무 좋아져서 한때 다석처럼 일일 일식을 해보기도 했어요. 나름대로 아주 좋은 경험이었죠. 가뜩이나 원래 체질이 약해서 영양분이 충분히 흡수가 안됐는데 하루 한끼만 먹으니 한달 동안 몸무게가 31kg까지 떨어졌어요. 완전히 해골만 남은 것. 그런데 정작 나는 좋았어. 마음도 괜찮고, 몸도 가볍고, 견딜 수 있었고. 뭘 먹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없었어요. 그런 건(식욕) 끊어졌다고 할까. 근데 이게 너무 흉칙해지니까 다른 사람들이 못봐 주겠다고 해서 일일 일식을 끊는 일도 있었어요”
- 다석 사상의 핵심인 ‘씨알사상’이 현대인들에게 갖는 의미는.
“철학이나 신학, 믿음이라고 하는것이 어떻게 보면 방관자나 구경꾼의 철학, 구경꾼의 신학이고 믿음이예요. 제3자로서 하는 얘기. 성경에 대한 설명도 그렇게 하는 것.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경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타자로 생각하는 것이지, 정말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서서 살아있는 신앙, 행동하는 신앙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철학도 머리에 쥐나게 딱딱한 이론들이지. 그것이 오늘의 삶을 바꾸는 내 삶을 힘있게 하고, 바로 세우는 그런 힝을 주는 철학이나 신학이 아니야. 종교도 그래요.
근데 씨알 사상이란 것은 첫째 명제가 하나님. 영원한 생명. 참 나라. 우주의 생명이 내 속에 있다. 그것을 선언하는 것이거든. 그것을 믿는 것이거든. 내 속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내 속에 생명의 계시가 있다. 내 속에 하나님의 얼이 운동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속에 살아있다. 예수의 생명이.. 사실 기독교란 것이 뭐에요. 기독교의 핵심. 사도바울의 핵심. 세례외 성망찬 아니야.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예식인데, 그 내용이 내가 예수와 더불어 죽고, 예수와 더불어 산다는 것이죠. 내 속에 예수가 살아있다는 게 신약 성경의 핵심이에요.
그러면 여러 복잡한 설교를 할 필요가 없이 예수 믿는게 뭐냐? 예수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이 내 속에 살아있게 하는 게 교회 속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있게 하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기독교죠. 그 원리는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철학에 해당된다.
철학이란 뭐에요? 내가 생명의 주인이고, 역사의 주인으로 내가 일어나서 힘있게 살게 하는 것이 철학 아니에요. 사회라는 것은 또 뭐에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사회의 주인이 되어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와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살고, 그래야 민주주의가 되고, 그래야 철학인거야.
그런데 씨알사상은 다른 게 아니라, 복잡한 것을 다 집어 치우고, 그것을 하자는 거야. 내가 씨알이다. 우주의 씨알이고, 역사의 씨알이고 사회의 씨알이고, 민주정치의 씨알이야.
씨알이란? 모든 생명의 시작이야. 그것이 바로 나라는 것이거든. 내가 바로 주인이다. 주체다. 나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리지. 진리라는 것이 하나의 이론으로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참 된 생명이 내 속에 있다. 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생명을 만나고, 내가 역사와 정치의 주체로 일어서는 것. 그것이 진리죠. 그 진리를 처음부터 일관성있게 말하는 것이 씨알사상. 현대 사회에선 너무 사치스럽고, 불필요한 군더더기 많은데 씨알이라고 하는 것은 알멩이만 있는 것이잖아요. 사치가 없는 거지. 헛 소리가 없는 거지. 진실한 것만 있는 것. 진실한 생명만 있는 것이죠. 씨알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 허세와 사치를 부리지 말고, 검소하고, 겸허하게 가장 낮은 자리로 가는 것이다. 씨알이란 것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흙속으로 들어가야 돼. 말하자면 민중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 흙속으로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참된 생명의 창조활동이 일어나죠. 씨알이 그런 것 처럼. 동양에서 주역의 가장 중요한 궤가 지천대궤인데, 천지궤는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궤로 아주 불길하고, 흉하고, 위태롭다. 왜냐하면 높은 하늘이 더 높이 있고, 낮은 땅이 더 낮게 있으면 그것은 안좋은 것. 하늘이라는 것은 황제나 엘리트 지배 계층을 의미하고, 땅은 민중을 얘기하는데 이렇게 서로 떨어져 있으면 안된다.
이에 반해 지천대궤는 가장 길하고, 큰 평화를 주는 거라고. 지천대. 높은 하늘이 땅 아래에 오는 거에요. 정치 지도자나 성직자가 하늘처럼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밑으로 내려오는 거에요. 민중 속으로 민중 뒤에 서는 거에요. 그럼 크게 길하다. 큰 평화가 온다.
기독교 신앙의 성육신론의 핵심이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됐다. 육신은 땅에 있는 것이거든. 성경에 의하면 육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흙으로 빚은 거야. 흙으로 만들어진 거야. 하늘의 말씀이 흙 속으로 들어온거야. 그래서 성육신론이야. 어떻게 보면 지천대궤 하고 딱 맞아 떨어져. 이게 또 씨알 사상하고 딱 맞아. 이게 진리. 신약성경의 진리는 성육신론이다. 동양 사상의 핵심은 지천대궤다. 이것은 또 씨알 사상의 기본 핵심 가르침하고 일치하는 거죠. 성경 말씀과 주역의 지천대궤를 잘 풀어내는 것이 씨알 사상이지 않은가? 그것이 진리죠”
- 얼마 전 세계철학대회에서 ‘씨알사상’이 집중 조명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세계철학대회는 철학의 올림픽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제껏 아시아에서 이 철학대회가 열린 적이 없었지.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서양 철학만 철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계통만 철학이라고 생각했던 것. 근데 이제 그게 아니라는 것이 다 드러났거든. 동양에 철학이 왜 없나. 불교도 있고, 유교도 있고, 도교도 있고 다 있는 걸. 외면했을 뿐이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까 이번에 한국에서 세계철학대회를 열면서 ‘동서문명의 만남 속에 철학’이란 주제를 내세웠다.
서양에선 동서문명을 만날 수가 없었지. 왜냐하면 서양 문명이 쳐들어 왔으니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상처를 받으면서 서양 문화를 깊이 받아 들이게 됐다. 박혀 버린 거야. 옷 입은 것도 서양 스타일 아닌가. 어쩔 수 없이 끌어안게 된 것. 게다가 우리나라는 더 나아가서 기독교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였어요. 이런 나라가 어딨어요? 서양문명을 자발적으로 보통이 아니라 활짝 받아들였다.
때문에 동서문명의 창조적이고 진지한 만남은 이전에도 앞으로 한국에서 이뤄질 것이다. 이것은 내 주장. 그리고 그것을 집중해서 실현한 분이 유영모, 함석헌이라고. 동서문명의 정신과 사상을 깊이 심오하게 종합한 사상가, 철학가는 유영모, 함석헌 밖에 없었다고 봐요.
우리나라 철학자들은, 특히 서양 철학을 한 사람들은 서양사람 보다 더 맹렬하게 서양 철학만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오죽 답답하면 동양철학에 별 관심도 없던 이성 철학자 하버마스가 탄식을 하면서 당신들은(동양인들에게) 서양사람들도 아닌데 서양철학만 이렇게 하나. 동양사상을 연구해 보라고까지 했다.
서양 철학자들의 관심은 이번 철학대회에서도 잘 나타났죠. 다른 곳은 한 세션에 3,5명 밖에 모이지 않았는데, 유영모, 함석헌 세션만 200여명이 모여 자리가 부족했다.
씨알사상. 이것이야 말로 세계 평화 철학, 영성 철학, 민주 철학으로서 세계에 소통될 수 있는 철학. 이것의 정신적인 자원과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을 것. 세계가 같이 살 수 있는 사상과 정신의 집을 유영모, 함석헌의 씨알사상이 지은 것이라고. 세계가 더불어 살 수 있어요. 민족과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서 세계가 한 집안을 이루면서 살 수 있는 정신의 집이, 유영모 함석헌이 세운 철학과 사상이고 씨알사상이다. 그런데 다수의 철학자들이 아직 거기까지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이것이 내게 참 아쉬움으로 남는다”
박재순 소장은 1950년 충남논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한신대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한신대 연구교수, 성공회대 겸임교수, 씨알사상연구회 회장 등을 지낸 바 있다. 현재 씨알재단 상임이사, 씨알사상연구소 소장, 다석학회 이사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엔 ‘예수 운동과 밥상공동체’ ‘민중신학과 씨알사상’ ‘열린사회를 위한 민중신학’ ‘한국생명신학의 모색’ ‘씨알 생명평화’ 등이 있으며 번역서에 ‘조직신학: 하나님의 나라’ ‘갈등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기독교 생명윤리 지침’ ‘신학의 길잡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