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교회는 과거 70, 80년대 가난한 이들, 소외받은 이들, 그밖에 몰리고 쫓긴 이웃들을 위로하며 보살폈다. 민중교회 목회자들은 주어진 특수한 환경 속에서 ‘민중’을 인식하고, '민중'을 섬겼다. 이 시기 민중교회 목회자들에게 '민중'이라함은 대개 비합리적인 근로 조건에서 자본가들로부터 착취를 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함한 도시 빈민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민중'을 사회적 약자라는 총체적 관점에서 이해한 그들은 자의반 타의반 이념의 옷을 입고, 고유 명사화 된 '민중'에 적지 않은 부담감을 갖기에 이르렀다. 80년대 말 그 활동면에서 정점을 이룬 이들 민중교회였지만, 21세기 한국사회는 민중교회에 시대 변화에 따른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민중교회는 그 시대적 요청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
▲울산새생명교회 앞에서. 골목길 문화 개선을 위한 벼룩 시장, 작은 전시회 등을 열고자 교회 앞 마당을 꾸며 지역 사회에 내놓았다. 작은 공간이지만 한기양 목사는 이곳에서 지역 주민들과 작지만 알찬 소통의 시간을 만들고자 했다. ⓒ베리타스 |
구정 연휴 마지막 날 기자는 울산의 대표적 민중교회로 알려진 울산새생명교회를 방문했다. 민중교회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서였다. 앞서 기자는 평신도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설립된 새길교회를 방문한 바 있다. 그곳에서 시대적 담론을 형성하며 교회의 지적 측면에서 봉사하는 교회를 만났다면, 이곳 울산에서는 서민 대중들과 어울리며 행동하는 교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울산새생명교회 담임 한기양 목사는 1988년 12월 울산에서 첫째 주일예배를 하며 교회 개척을 시작했다. 목회자의 길을 걷기 전 그는 소위 운동권에서 민주화 투쟁을 전개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생각에 부패하는 정치권력의 정화를 위해 투쟁했고, 큰집(감옥)에도 여러번 갔다왔다. 당시 목사 후보생이었던 그였지만 한 때 목회자의 삶이냐 사회운동가의 삶이냐를 놓고, 갈등했다는 것은 한 목사가 얼마나 맹렬한 사회운동가였는지를 보여준다.
교회의 창립은 한기양 목사의 무모한 도전(?)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8평에 불과한 초라한 예배실에서 12명의 교인들은 지역사회 전체를 목회 대상으로 하고, 지역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인 환경문제를 선교 과제로 삼았다. 1989년 2월 첫째 주 금요일부터는 교인들이 공해 현실을 학습하는 모임을 시작했고, 이 '공해학습 모임'에는 교인이 아닌 일반인들의 참여도 부쩍 늘어나게 됐다. 당시만 해도 공업도시 울산에서 환경문제를 다루는 교회나 단체는 전무했다.
조직적으로 환경운동을 지향하는 목적이 뚜렷해지자 울산효성교회(지금의 울산새생명교회)는 교회가 아닌 시민단체 쪽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될 것을 우려해 정체성을 살리자는 취지로 △창조질서보전운동 △생명운동 △환경선교 △환경목회 등의 용어를 만들어 프로그램을 계속 이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 내 조직적인 환경운동 단체가 없던 터라 교회에서만 운영하기에는 버거운 조직으로 그 규모가 팽창하자 교회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됐다.
한기양 목사는 당시를 회고하며 "조직적인 환경운동 단체가 없는 울산 지역을 위해 이 모임을 울타리 밖으로 헌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며 "결국 깨끗이 마음을 비우고 지역사회에 봉헌한다는 심정으로 그 학습 모임을 사회로 환원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울산에서 최초로 조직된 환경 단체 '울산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울산공추련)이 출범하게 된다. 생명선교연대 회장(구 민중교회운동연합회)이기도 한 한기양 목사에 따르면, 이 시기 민중교회들은 교회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의 전문성을 강화해 시민단체화 되느냐 아니면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시민사회에 환원하느냐를 놓고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한 목사는 후자를 택했다. 물론 한 목사 만의 선택이 아니라, 교인 모두의 결정이었다.
음으로 양으로 울산새생명교회의 도움을 입던 '울산공해추방운동연합'은 93년 6월 11일 교회로부터 독립해 '울산환경운동연합'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울산 지역의 대표적인 환경 단체로 자리를 잡게 됐다. 환경 문제에 그치지 않고, 최근에는 교회에서 운영하던 장학 프로그램을 확대해 이 역시 시민사회 단체에 넘겨줬다. 지난해 5월 '새생명장학회'가 창립총회를 가진 것이다. 몇몇 교인들이 참여를 하긴 했지만 '새생명장학회'에는 불교, 천주교 등 종교를 막론하고 다수의 일반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이 장학회는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환경이 열악한 학생들에게 우선 장학금을 지원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민중' 속에 '민중'과 어울리며 지역 사회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마련해 온 한기양 목사. 민중교회 목회자인 그에게 오늘의 '민중'을 정의해 달라고 했다 ⓒ베리타스 |
"교회 공동체는 지역 사회를 살필 줄 알아야 하며 지역에서 꼭 필요한 일들을 찾아내고, 그 필요한 일들을 추진할 줄도 알아야 한다. 또 때로는 지역을 위해 깨끗하게 비우고,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 성장우선주의에 침윤(浸潤)되어 가는 대형교회의 진정성 없는 나눔과 섬김 활동을 지적했다. 한 목사는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되어 나눔과 섬김의 삶을 실천하게 하는 성령의 능력마저도 물성화(物性化)시켜 성공주의의 요소로 전락시키는 '바알'적 풍요신앙에 빠져들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이겠는가"라고 했다.
그때 그때 지역 사회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대안을 마련하며 걸어온 20년. 울산새생명교회는 작지만, 알찬 교회로 또 살아있는 교회로 이제 지역 주민들의 호평을 받게 됐다. 앞으로는 골목길 문화 개선을 위해 △벼룩 시장 개설 △작은 전시회 △보름달 맞이 감사 잔치 등을 열 계획이다. '민중' 속에 '민중'과 어울리며 지역 사회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마련해 온 한기양 목사. 민중교회 목회자인 그에게 오늘의 '민중'을 정의해 달라고 했다.
"성경으로 보자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들 수 있겠네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강도 만난 이웃을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치유해 주는 일을 해야 한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민중은 사회 안전망을 벗어나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차상위 계층, 독거 노인, 외국인 노동자 등등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아닐까요. 교회 공동체는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이어 '민중'이란 표현에 "오늘날 서민 대중 혹은 피플(people)로 말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도 했다.
민중교회운동연합(1985년 설립)은 90년대 말 생명선교연대로 단체명을 바꿨다. 민중교회 내부에서 패러다임의 변화가 생겼는지 궁금했다. "민중교회라는 것이 너무 무거운 느낌을 줬어요. 고유명사 처럼 되어서 선입견을 만드는 것 같기도 하고요. 70, 80년대에는 민중론이 대두가 됐고, 이에 발맞춰 자연스럽게 민중교회가 출현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고 봐요. 변화하는 21세기 앞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렇게 고민 끝에 붙잡은 키워드가 '생명'이었다. 이어 '생명'을 가꾸고 살리는 일에 협력하자는 의미에서 단체명을 '생명선교연대'로 정했다. 그동안 지역 중심의 과제에 충실했다면, 앞으로는 지역을 넘어 지구적 과제를 놓고, 씨름하겠다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찍부터 있었음을 보여준다.
울산새생명교회는 지역 사회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역 사회 문제점을 인식하고, 개선하며 지역 사회를 선도해왔다. 겉으로 볼 때는 작아 보였지만 지역 사회를 섬기는 정신으로부터 나온 소망과 비전 때문인지 교회는 어느새 지역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환영 받는 사회 구성원으로 크게 성장해 있었다. 한 목사는 말했다. "지역의 깨어있는 작은 교회들이 지역의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며 지역 사회를 선도해 나간다면 지역이 바뀌고, 또 세계가 바뀔 것입니다. 교회가 작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고, 또 반대로 크다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