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창세기 3:22-24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 그래서 주 하나님은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고,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아멘.
히브리서 4:14-1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아멘.
마태복음서 4:1-11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밤낮 사십 일을 금식하시니, 시장하셨다.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 그 때에 악마는 예수를 그 거룩한 도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예수께서 악마에게 말씀하셨다. "또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 또다시 악마는 예수를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고 말하였다.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이 때에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아멘.
설교문
은혜로운 찬송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 보면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림절도 지켰고 성탄절도 지켰습니다. 이분이 육의 몸을 입고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 하신 일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은 일인데 세례 받은 날부터 시작해서 주현절이라고 합니다.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 받고 40일 동안 금식을 하시고 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십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고난이 시작이 됩니다. 사탄으로 하여금 예수를 유혹하고 시험하게 하십니다. 모든 고난은 유혹, 시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고백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또 하나님으로부터 들을 답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왜 믿습니까?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육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까? 육의 몸을 입고 왜 태어나셨고, 왜 세례 받으셨고, 왜 오늘 유혹을 받고, 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여 다시 온다고 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나서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두 문장으로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은 사람을 위하여 역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인간들 때문에 피조물 때문에 계시고 피조물을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피조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예수를 보내셨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예외가 없으십니다.
헬라어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프로(pro) 메(me)`, 프로는 `위해서`, 메는 `나`, `나를 위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은 계시고,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셨고, 세례를 받으셨고, 오늘 시험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구원받을 자격이 있고 하나님과 같이 대화하고 살 능력도 있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만 종교를 사유화하고 신앙을 사유화하고 개인만 옳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으십니다. 개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합하여 가정, 사회, 집단, 환경, 우주, 모든 공동체로 함께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그 말을 사도바울은 ‘우리를 위하여’라고 표현했습니다. 헬라어로 ‘프로(pro) 노비스(nobis)’라고 하는데, 노비스가 ‘우리’라는 말입니다. pro me, 나를 위하여 동시에 pro nobis, 우리를 위하여, 개인의 구원을 위하여 공동체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의 구원을 위해서나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가 오셨고, 세례를 받았고, 오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는 왜 세례 받으셨습니까? 예수가 세례 받을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세례란 죄 사함을 받고 죄 사함 받은 자가 새 생명을 얻어서 하나님과 오순도순 복되게 살기 위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습니다. 회개하고 구원받는 표시를 세례로 했습니다.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가 인간이 해야 할 모든 것을 앞서서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받으셨습니다. 그 세례 모범에 따라서 우리도 세례 받으라고 합니다.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그분 하시는 말씀이 “물로 받는 세례만 가지고 구원을 받을 수 없으니 성령의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세례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예전적, 실질적, 상징적 표시로 세례를 우리한테 말씀하셨고, 예수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세례 받는 것입니다.
세례 받으신 다음에 40일 동안 하나님이 예수를 굶게 하셨습니다. 40일 밤낮을 굶고 성령이 예수를 끌고 광야로 나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광야의 시작은 모든 인간의 역사에서 실존적인 역사나 집단적인 역사나 공동체에서 있을 수 있는 인간의 모든 고난을 예수께서 직접 받으시고 어떻게 극복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싶었고, 극복의 방법 뿐 아니라 극복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까지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싶어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런데 몸만 입고 인간사를 배제하고 사람의 모습이나 사람의 삶을 배제하면 그 예수 왜 믿어야 합니까? 공중에 뜬 거 아닙니까? 신비한 모습이지만 인간의 몸이라고 하면서 인간도 아닌 분, 고난을 위로해주신다고 하면서 고난을 직접 몸에 담지 못하는 분, 죽은 자를 부활시킨다 하면서 죽지도 않는 분, 그런 예수는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아들로써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성탄의 예수는 아니라고 믿습니다.
왜 성탄의 몸을 입었습니까? 인간과 똑같은 운명을 당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하시려고, 그 구원의 주체는 ‘pro me`, 여기 앉으신 한분 한분이 다 하나님과 구원의 얘기를 나누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 전부가, 사회전체가, 자연세계 전체가, 우주가, 다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가면서 유혹에 부딪힙니다. 유혹 시험을 오늘 예수님께서 직접 당하십니다. 유혹의 종류, 고난의 종류, 아픔의 종류를 다 열거할 수 없으나 크게 보아서 세 가지 유혹이 인간 삶에 있습니다. 첫째 빵의 문제입니다. 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를 40일 동안 굶게 하셨습니다.
‘40’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40’일 금식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살아야 했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율법을 받을 때 ‘40’일 밤낮 금식기도하고 나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청천벽력같이 아들을 바치라고 합니다. 산 채로 죽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가슴이 어떨지 짐작만 하십시오. 근데 유대교 랍비 문서에 보니까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서 모리아 산으로 가서 아들 이삭을 바치기 전, ‘40’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금식기도 후에 이삭을 바치려고 장작을 올려놨더니 천사가 와서 짐승을 대신 바치게 하고 이삭을 살려주었습니다.
40일, 40년, 40이라는 숫자가 종교의 상징적으로 갖고 있는 의미는 고난, 해방, 구원, 이것을 위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는 상징적 숫자이지만 40이라는 숫자 속에 인간이 살아야 할 모든 삶의 과정, 다른 말로 인간의 역사가 다 이 40일 속에 포함이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은 다 40이라는 상징으로 묶었습니다. 그 중에 처음 등장하는 문제가 빵 문제입니다.
40일 굶었으니 얼마나 배고프겠습니까. 예수를 보고 사탄이 시험을 합니다. ‘여기 놓여있는 돌들을 떡으로 만들어 드시지요. 얼마나 배고프십니까?’ 사탄의 유혹은 떡 자체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고 그 떡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십시오. 인생의 역사에서 떡이 가장 중요하고 기본 가치관이라고 선포하라는 그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돌을 떡으로 만드셔서 예수님이 드실 수 있고 모든 사람을 먹일 수 있지만 동시에 사람은 먹는 떡만으로 살지 않고 떡을 만드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예수님의 답입니다.
떡이 없으면 안 됩니다. 배고플 때는 자나 깨나 먹을 생각입니다. 목마르면 자나 깨나 마실 생각입니다.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으면 하늘을 품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배고팠던 시절이 있었고 목말랐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풍성하시지요? 지금이 천국입니까? 풍성히 먹을 수 있으면 하나님 나라입니까? 내가 마실 수 있는 물이 엄청나게 많으면 하나님이 있다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마셔도 목마르고 먹어도 배고픕니다. 사람이 먹는 것만으로 만족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먹어야 살지만 음식만 먹지 말고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도 같이 먹어야 산다.” 요즘에 사회과학, 인문과학, 경제 분야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들어보니까 물건을 만들어서 팔 때,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 물건이 가지고 있는 기본 가치가 있는데 물질과 가치, 다시 말하면 양과 깊이가 잘 어울려야 지속적인 행복과 평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과 깊이는 보태는 게 아니라 곱해야 한다고 합니다. 쉬운 얘기로 제품 하나를 만들 때, 제품에도 만든 사람의 혼이 들어갑니다. 제품 ‘곱하기’ 혼, 이것이 잘 맞아 들어가면 명품이 될 겁니다. 제품이 100인데 혼이 0이다, 그걸 곱하면 가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양과 깊이, 물질과 가치, 이 둘은 합해지는 게 아니고 곱해져서 시너지 효과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빵을 먹어야 살지만 빵 겉에다 하나님의 말씀을 잼 바르듯 바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더하기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용할 양식’ 곱하기 ‘양식을 만드신 하나님의 심장’, 이 둘을 곱해서 빵도 말씀이 되게 하고, 말씀도 먹으면 빵처럼 맛있는, 곱한 현실,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에서 빵을 떼어내고 빵에서 말씀을 떼어내고 떡만 가지고는 못산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했습니다. 가나안 땅 가기 전에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 때 제일 먼저 부딪힌 문제가 먹는 문제였습니다. 가지고 온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밥 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물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당연히 부딪힐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메추라기가 와서 만나가 떨어졌고, 바위를 쳤더니 물이 나왔습니다.
예수께서 하시고 싶은 질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 먹으려고 출애굽 했습니까? 그 수많은 백성이 올 때 마실 물 먹으러 광야에 나왔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해방받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출애굽 했습니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만나러 출애굽 했습니다. 그랬더니 먹는 문제, 입는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만나를 먹기 위해서 출애굽 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평야에서 목마를 때 물 먹기 위해서 출애굽 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는 살아가는 모두에게 있을 수 있는 당연한 생의 과정이지만 그것 자체가 궁극적 목적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오천 명 먹인 기적을 생각해 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산으로 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빵 먹으러 왔습니까? 장년들만 오천 명이나 되는데 그들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나눠먹는 기적을 보러 왔습니까? 말씀 들으러 왔습니다. 예수가 선포하는 하늘이 뭔지, 메시야가 누군지, 그분의 복음을 들으러 왔습니다.
인간의 갈증 때문에 마음 깊은 곳의 갈증 때문에 몰려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빵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시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들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생기는 빵 문제는 내가 똑같이 해결해 주겠다고 하시면서 기적을 통해서 오천 명을 먹여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빵 문제가 중요합니다. 물질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물질을 위해서 우리가 살진 않습니다. 물질이 필요하지만, 먹을 게 필요하지만, 마실 게 필요하지만, 그걸 위해서 제가 전신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저한테 있어서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예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용할 양식에서 하나님을 빼는 것이 사탄이다. 우리가 만든 제품 속에서 혼을 빼는 것이 사탄이다. 사탄은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육적인 하늘과 땅, 두 개를 분리시키는 것이 사탄이지, 다른 게 사탄이 아니다. 사탄아, 사람은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떡을 만드신 분의 기본 가치인 가장 깊은 곳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느니라.” 지당한 말씀을 예수께서 하셨습니다. 이런 유혹받고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이데올로기와 체재가 선전했습니다. 빵을 다 분배하셨습니까? 빵을 공정 분배했더니 천국이 왔습니까? 마음에 갈증, 인간의 행복, 가장 깊은 곳의 도덕 윤리는 만족이 되었습니까? 예수님 말씀입니다. “사탄아,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육과 영은 분리하면 안 되느니라. 하늘과 땅은 분리시키면 안 되느니라. 내가 곧 영과 육, 빵과 말씀, 하늘과 땅, 이걸 다 모아서 행복을 주러 온 사람이다. 사탄아, 그만 두어라.”
1차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2차 관문이 나왔습니다. 2차 관문은 예수를 성전에 데려가서 꼭대기에 올려놓고 사탄이 시편 91편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습니다. 천사들이 받쳐주니까요.” 이 말을 하면서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봐라. 천사가 받쳐 줄테니까.’ 예수님께서 신명기를 인용해서 답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뛰어내려라. 받쳐 줄 것이다’, ‘아니,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어느 쪽이 옳습니까? 신학, 학문, 질문, 성경말씀은 무한히 인용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꾀임에 빠뜨리기 위해서 시편을 인용했고, 예수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인용으로 하나님의 진실을 알리고 싶어했습니다. 성경말씀을 많이 인용하면 신앙이 깊은 것입니까? 신학적인 은사를 많이 쓰면 하나님이 좋아하십니까? 진실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합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 전제를 벗어나시면 아무리 성경말씀을 인용해도 안 됩니다. 시험하지 마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꾀임에 넘어가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야기가 창세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쫓겨난 이유는 하나님만이 먹어야 할 선과 악을 구분하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낙원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낙원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사는 실낙원, 죄 있는 세상을 회개시켜서 다시 에덴동산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덴동산을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 있던 사람, 짐승, 뱀, 나무, 이 모든 것을 상징한 나무, 건물이 있었습니다. 그 건물이 성전입니다. 성전을 단순히 건물로 디자인해서 지은 게 아니고 에덴동산의 복원의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살았는데 실낙원 이후로는 하나님이 배제되고 인간들끼리 살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집을 지어서 우리가 그 속에 같이 산다고 해 봅시다. 에덴동산의 복원, 그것이 성전건축의 본질적인 이야기입니다. 솔로몬 성전에 가보면 그렇게 지어졌습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그 성전은 하나님이 뛰어내리는 곳이 아니고 성전은 하나님이 사는 곳이다. 하나님이 사는 곳에서 하나님 보고 나가라고? 말 같지 않은 소리하지 마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저는 경동교회가 복원된 에덴동산과 비슷한 성전이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건축이 잘 되어서만이 아니라 이곳에 오는 사람은 복원된 하나님의 에덴동산을 미리 맛봅시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전건축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걸어다니는 성전이다.’ 여기에 앉으신 한분 한분이,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함께 살아가는 전체 사회라는 공동체가, 살아 움직이고 걸어 다니는 성전일 수 있습니다. 살아 움직이고 걸어 다니는 에덴동산일 수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하면 그렇습니다.
그렇게 믿으시면 ‘하나님, 살아 다니는 성전인 제 속에 오셔서 당신이 주인이 되어주십시오.’ 하고 간구하십시오. 사탄이 유혹할 것입니다. ‘살아 다니는 당신 속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라. 아집이 지배하게 해라. 보이지 않는 신을 왜 섬기느냐?’ 성전에서 하나님이 몰아내는 것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시험하지 마라.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
마지막으로 사탄이 시험합니다. 예수님을 데리고 산에 올라갑니다. ‘나한테 절하면 내가 이 땅을 지배할 기회를 주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많이 올라가셨습니다. 한 번은 산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나는 하늘과 땅을 매는 권세를 가졌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겠다.” 이 권세를 여러분한테 드립니다. 받으십시오.
하늘과 땅을 매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예수는 이 권세를 어떻게 보여주실까요? 예수께서 직접 가신 산이 있습니다. 골고다라는 산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매는 권세를 십자가에서 죽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세상은 죽어야 합니다. 악도 죽어야 합니다. 사탄도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삽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부활이 생겼습니다. 골고다에 성전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십자가가 성전입니다. 그 성전에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든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셨고, 그 십자가 성전에서 우리 죄를 구원하셨고 그 곳에 복음의 주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시험을 받으십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강도인 바라바와 예수를 놓고 누구를 석방시켜 줄지 고르라고 했습니다. 대사면입니다. 군중들은 바라바를 석방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잡아올 때, 하나님을 훼방하고 로마를 뒤집으려는 정치범으로 예수를 잡아왔습니다.
그런데 진짜 로마를 뒤집고 혁명하고 반발하고 저항하고, 이스라엘 독립을 위하고 실제로 사람까지 죽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라바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바라바가 강도라고 되어 있는데 당시 강도라는 말은 저항군 대표, 독립 투쟁가, 로마에 저항하는 사람을 강도라고 했습니다. 바라바를 바라바스, 아바스는 아버지, 바르는 아들의 뜻으로 아버지의 아들, 이스라엘의 족속의 아들이라고도 했습니다.
강도인 바라바는 천하의 흉악범인데 척결하지 않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는 죽이고, 테러범을 석방시켜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라바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고, 예수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 죽은 골고다 언덕, 십자가라는 새로운 성전, 그 성전에서 부활이 잉태해서 오늘 우리한테 왔습니다.
사탄은 말합니다. 나를 경배하면 이 세상을 주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는 세상은 이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는 세상입니다. 만약에 가정해서 예수가 사탄에게 굴복해서 세상을 가졌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 역사 속에 헬라제국, 로마제국이 아니고 예수제국, 정치와 경제와 종교가 다 합해진 예수제국이 있을 것입니다. 그 제국이 얼마쯤 지속되었을 것 같습니까? 예수제국이 지금 이 땅 21세기에 얼마나 오랫동안 견뎠을 것 같습니까?
예수는 제국주의자가 아닙니다. 예수는 사업가도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가 가져온 게 뭡니까? “정치 잘 해라. 경제도 잘 해라. 사회도 잘 이끌고, 시민이 더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만들어라. 빵도 성전도 온 땅의 재산도 다 인간에게 맡길테니 단 하나, 하나님을 버리지 마라. 빵 속에 하나님 창조주의 얼을 담아라. 성전 속에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담아라. 산에서 보이는 모든 세상 속에 하나님이 주관자이심을 받아라. 내가 주는 것은 정책이 아니고 전술이 아니고 전략도 아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면 구원받을 수 있다.”
오늘 유혹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광야에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서, 이 모든 사건 속에 하나님은 주인으로 부활주로 우리한테 약속을 하십니다. 유혹 받을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넘나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오늘도 고난의 길을 가십니다. 그렇게 생각하시고 말씀을 읽으면 이 성경말씀이 복된 말씀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읽으면 성경말씀은 실험실의 한 연구대상입니다. 하나님, 예수를 실험실에서 실험해 보실 겁니까?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십니다.
고난을 기꺼이 즐겨라. 그것은 부활을 위한 것이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