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하시는 한 교수님이 그 은퇴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자신을 과분하게 칭송하는 말에 겸양의 어조로 은근히 나무라셨다. 제발 립 서비스 좀 하지 말라고. 이에 반응하여 한 젊은 교수가 멀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신은 립 서비스 예찬론자라고. 이성복이라는 시인이 어느 글에서 사랑은 빈 말이라도 따스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며 그 인용구를 음미하며 그는 대뜸 맥락을 바꾸어 선언했다. 결국 우리의 워십 서비스라는 게 따지고 보면 대부분 립 서비스 아니냐고.
이 에피소드의 여운에 침잠하며 나는 다시 숙고해본다. 인간의 언어활동에 방점을 찍어 이른바 '언어적 전회'를 이룬 지난 세기 이래, 언어를 매개로, 언어 안에서, 언어에 대하여 토해낸 숱한 담론들의 서비스적 기능이 어떠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물론 그 궁금증의 이면에는 일말의 수상한 의구심과 호기심이 뒤엉켜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명제는 얼마나 우리 시대의 제반 존재들 가운데 집이라는 구체와 실상을 획득했는가. 결국 그 집 안에서 우리의 존재는 우리의 언어로 말미암아 충분히 풍요해졌던가. 그것을 따져보려면 언어가 얼마나 순정한 입술(립)을 통해 성실하게 존재의 삶에 서비스되어왔는지를 따져봐야 할텐데 예의 언어 형이상학은 거기까지 착지하지 못한 채 공소한 추상적 울림만을 즐겨온 감이 없지 않다.
우리의 공공 모임은 언어를 서비스하면서 소통공간을 확보한다. 특히 나름의 형식을 갖춘 자리에서 유통되는 언어는 일정한 패턴을 쫓아 상투화된 인습을 추구하는 것이 상례라서 참신한 계몽이나 기상천외한 창조 활동보다는 상호간 공통 분모를 재확인하고 피차 가려운 데를 조금씩 긁어주는 서비스적 기능이 압도한다. 그런데 그조차 넉넉하지 못할 경우 우리의 립 서비스는 불통의 갑갑함을 대책없이 인내해야 하는 비논리의 극치를 달리거나 심지어 언어 폭력의 수위를 넘나들기도 한다.
공공 모임 가운데 예배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매주 정기적인 서비스의 장이 된다. 그것이 주일예배든, 특별한 행사와 결부된 비정규적 예배든, 모임의 인도자와 기도자, 설교자, 그밖에 다양한 반응으로 참여하는 찬양대와 회중의 존재는 곧 입술의 언어로 하나님과 상호간에 서비스하는 행위의 주체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그중 많은 분량의 시간을 차지하는 설교의 경우 그 언어가 예배를 매개로 서비스되지 못할 경우 명민한 청중은 이내 선포된 '하나님 말씀'의 진정성을 기대하는 수준을 낮추어 최소한의 소통이 발생하는 립 서비스를 갈망한다.
역설적 현실이지만, 제 설교의 진정성을 큰 목청으로 호소하는 설교일수록, 그런 설교의 언어, 예찬의 외교적 언어가 관성화된 예배일수록 서비스의 질은 저하된다. 마찬가지의 아이러니칼 실상이지만, 단순화된 논리적 계선을 타고 상투화된 메시지의 간절한 외침이 서툰 형식으로 그 내용의 진정성을 호소할수록, 그 진정성은 하나님 앞에서나 회중 앞에서 빛을 잃는다. 진정성은 목에 잔뜩 힘을 주어 엉성함을 순수함인 양 호소함으로써 강변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 은근하고도 자연스럽게 감지되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이는 약간의 관찰력과 민감한 성찰적 자의식만 있어도 포착 가능한 예배 언어의 립 서비스 현장인데도 오로지 맹렬한 예배의 주동자들과 강고한 확신의 설교자들만이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다. 오늘날 신앙과 그것에 터한 생활의 잉여는 립 서비스의 빈말조차 조리 있게 수행하지 못하는 주된 장애물이다. 그 장애물의 구성 요소를 세밀하게 분해해보면 그 속내의 서글픈 메뉴는 사유의 빈곤이고 분석에 대한 공포이며, 해석의 모험을 도발하지 못하는 화석화된 전통의 강박이다.
오늘날 립 서비스의 최소치를 수행하지 못하는 워십 서비스는 그리스도인들의 흔들리는 터전과 함께 새롭게 개척해야 할 신학적 지평을 지시한다. 무슨 거창한 명패로 분식된 직위가 명석한 사유를 대체할 수도, 능가할 수도 없다. 막무가내로 악다구니를 늘어놓는 제 위대한 목회 경험의 구차한 깜냥도 비평과 분석의 메스를 비껴갈 수 없다. 초월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며 넘어갈 때 유의미한 것이지 그것을 제 촌스런 권위로 괄호치고 눙친다고 그 빛이 저절로 환해지지 않는다.
알짬 없이 남발되는 사탕발림의 립 서비스를 타박하는 정서야 별도의 것으로 수긍할 만한 것일 터이다. 하지만 그 말의 또 다른 국면에서 우리는 세련된 립 서비스조차도 없는 각종 공공적 삶의 서비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 표현의 현장인 워십 서비스의 현실을 반성하는 계기를 포착해야 한다. 어차피 정형화된 예전의 틀을 화끈히 벗어날 수 없다면 그 틀 안에서 전통의 미덕을 재발견하여 잘 조형된 언어의 구성체로 겸손한 입술을 놀려 다감하게 서비스하는 현실적 목표가 최상인 듯싶다. 립 서비스가 불가피한 워십 서비스의 총체라면 나는 그런 공공의 거룩한 자리에서도 따스하든 서늘하든 양질의 립 서비스를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그 틀 안에 전달되는 진정성의 유무나 강약의 정도는 서비스 받는 하나님이나 회중에게 침묵 가운데 유보될 뿐이다. 그 소극적 자세가 외려 진정성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고, 예배를 통한 겸손과 순종의 희망을 열어놓을 수 있다. 오늘날 립 서비스의 질이 열악한 예배의 현실 가운데 불 인두로 지져야 할 입술은 거짓을 일삼는 부정한 입술만이 아니다. 부정하다며 허벌나게 탄식하고 회개하면서 그 입술로 다시 기고만장한 비언어의 난장을 벌여놓으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변하는 악다구니의 외침! 불 인두의 화력을 좀 낮추어도 좋으니 그걸 누가 좀 은근히 지져줄 수는 없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