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예레미야서 20:7-9, 12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은 의로운 사람을 시험하시고,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억울한 사정을 주님께 아뢰었으니, 주님께서 그들에게 내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내가 그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아멘
베드로전서 1:18-21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그것은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리스도를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미리 아셨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내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에게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누가복음서 9:57-62
그들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또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 또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아멘
설교문
경동교회가 속한 교단이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입니다.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에 있는 교단의 교회들과 자매결연을 합니다. 선교사, 학생, 목회자를 교환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한국교회가 원해서 자매결연을 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외국에 있는 교회가 원해서 기장교회와 꼭 관계를 맺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이유는 기장교회가 열려진 교회이기도 하고, 사회참여를 통해서 열심히 하나님 나라를 몸으로 실천하고, 신학적 깊이도 깊어서 자신들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경동교회에 이런 일이 두 건 있었습니다. 한 건은 70년대 초반에 독일 교회가 우리 교회를 보고 히틀러 치하에 있던 독일 고백 교회를 닮았다고 자매결연을 원했고, 또 하나는 80년대 중반에 시작된 관계인데 미국에 있는 여러 교회 중에 중간쯤 속하는 교세지만 자부심이 강한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그 교회 이름이 그리스도연합교회, United Church of Christ, 약자로 UCC라고 하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연합교회는 메이플라워라는 배를 타고 영국에서 건너와 뉴잉글랜드에 정박한, 그 중에 상당히 지적인 계급에 속했던 분들이 만든 교단이고 그래서 뉴잉글랜드에 소속한 동북부 지역에 교회를 세워서 UCC라는 교파이름을 갖게 되는데 몇 년 전에 제가 그 교단 총회에 가서 연설할 기회가 있어서 갔다가 들은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그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일이 있습니다. 후진들을 위해서 좋은 학교를 세워서 공부를 시키기 위해 맨 처음 세운 학교인 하버드 대학입니다. 그 대학은 청교도 출신의 목사님 중에 존 하버드라는 이름을 가진 목사님이 설립하신 학교입니다. 목사님이 집에 가지고 있던 그의 모든 책을 몽땅 도서실에 기부하고 자기 재산을 팔아 절반쯤 학교 설립에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분의 이름을 따서 학교이름이 하버드가 되었습니다. 처음엔 신학생을 양성하려고 했다가 학교가 자꾸 커지면서 UCC에서 완전히 빠져서 지금은 일반 학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1636년에 이 학교가 세워지고 한 200년이 지난 1885년에 또 한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언더우드 목사, 아펜젤러 목사가 처음 땅을 디딘 해가 1884년이니까 그 이듬해입니다. 이때 하버드 대학을 찾아온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철도회사를 경영해서 돈도 많이 벌고 캘리포니아 주지사도 지냈고 상원의원까지 지냈고 은퇴했는데 환갑 지나고 나서 가진 돈을 15살 때 죽은 하나밖에 없던 우리 아들이 살았으면 다녔을 법한 학교에 기부하자는 뜻을 가졌다고 합니다.
둘이 허름한 옷을 입고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하버드 대학을 찾아갔는데 수위와 싸움이 붙었습니다. 노부부는 총장님을 만나러 왔다고 하고, 수위는 당신들 같은 사람은 총장님을 만날 수가 없고 시간이 없다며 서로 실랑이하다가 노부부가 화가 나서 고향인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왔습니다. 그곳에 이분의 이름을 딴 유명한 대학이 있는데 바로 스탠포드 대학입니다. 이 노부부가 2100만 달러를 기부해서 학교를 설립한 것입니다.
2100만 달러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0억 정도 되지만 100년 전 당시에는 더 큰돈입니다. 이 일이 있기 20년 전에 러시아가 돈이 없어서 미국에 알래스카 땅을 팔았습니다. 그 땅값이 600만 달러였으니까 2100만 달러는 알래스카를 몇 개 사고도 남을 돈이었습니다. 그 돈을 투자해서 스탠포드란 대학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하버드 대학이 이 소식을 듣고 난리가 났답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허름하다고 돌려보냈더니 그 속에 그만큼 큰돈이 있는 줄 모르고 돌려보내서 아쉽다며 여러 가지 대학의 교훈을 만들다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명구 하나를 정문 앞에 써 놓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 속에 뭐가 담겨 있는지 깊이 볼 수 있어야지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오죽했으면 대학이 정문에 그런 이야기를 써 놓았겠습니까? 돈 이야기만은 아닐 겁니다. 살아가면서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참 많은데 외모의 깊이는 뭡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도 죄악을 범하고 여호와 대신에 바알을 섬기니까 오늘 예레미야서를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합니다. 항아리 하나를 사서 들고 너희들이 만든 바알 신전 앞에 가거라. 신전 앞에서 항아리를 깨뜨려라. 그리고 이렇게 전하여라.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그렇게 축복을 주었건만 너희 인생은 너희 생명은 항아리와 같다. 내가 항아리를 깨마. 이스라엘을 박살내마. 깨진 항아리는 원래 모습대로 복구될 수 없다.
깨진 항아리는 다시 용광로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다시 녹아서 태어나면 몰라도 원상태로 복구는 안 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여라. 인생은 질그릇이라고 성경에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질그릇 같고 쉽게 깨집니다. 그런데 질그릇 속에 보화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 질그릇 속에 ‘하나님’이라는 보화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땅 속에 ‘하늘’이라는 보화가 담겨 있습니다. 땅이 아무리 허름하고 어쭙잖아도 그 속에 하늘의 보화가 담겨 있습니다.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기적도 행하시고 눈도 뜨게 하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능력 때문에, 권능 때문에, 예수를 따르고 싶은 사람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한 서기관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지금으로 말하면 율법교사가 예수를 따르겠다고 요청했더니 예수님 말씀이 내가 기적행하는 거 보고 그 부스러기 먹으려고 권력 때문에 따르지 말라고 준엄한 명령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자꾸 따라오려고 하니까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성경말씀 읽을 때 예수님의 모습을 인간의 모습 그대로 놓고 한번 보십시오. “들에 있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온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 난 내 집도 없다.” 출신도 목수 출신이고, 집도 없고, 먹을 것도 모자라고, 옷은 제가 보기에 남루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라고 이름하고 기적은 행하는데 그 옷차림새, 외모를 보니 도대체가 탐탁하지도 않고 하시는 말씀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율법을 어기는 이야기를 하는데 지성적인 눈으로 사회적 신분의 눈으로 예수가 하는 걸 보면서 누가 그분 말씀이 옳다고 금방 따랐겠습니까? 저 같아도 웃기는 소리 한다고 정신 빠진 사람 아니냐고 했을 법 합니다. 기적을 행하는 걸 보면 능력은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겉모습을 보니 믿을 수가 없다.
유대 사람들은 멍청한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깊이가 없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수천 년 동안 비록 하나님한테 그릇이 깨지는 벌을 받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만큼은 이들처럼 깊은 사람들이 없고 비록 로마제국의 식민지에서 살았지만 이 사람들 나름대로 선민으로서의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갑자기 예수라는 사람이 튀어나와서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하는데 옷차림새나 언어도 고급언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평민들이 알아듣도록 쉬운 언어를 쓰시니까 아마 무식하다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능력 행하시는 것과 외모로 보이는 예수의 모습, 그 당시에는 아직 검증이 안 되었지만 하늘이라는 엄청난 구원의 복음을 가진 보석이신 예수와 겉모습 예수를 일치시키는 사람이 많지 않았을 겁니다.
여러분, 예수를 욕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너무 비난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같은 상황이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위대한 능력을 행하신 다음에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엄청난 분인 것이고, 아직 십자가에도 안 갔는데 부활도 안 했는데 옷차림새도 이상하고 헐벗은 사람이 와서 얘기를 하면 누가 그렇게 쉽게 믿었겠습니까? 저는 당시에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의 행태나 사고방식이나 몸가짐, 마음가짐에서 예수의 칭찬을 받던 사람들은 정말 위대한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당신이 능력을 가지셨기 때문에 제가 따르겠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나를 따라오너라. 나를 따라오려거든 장례식 치르는 것도 미루어야 한다. 집에서 인사하고 떠나야 하는데 인사하는 것도 미룰 정도로 절박하고 급한 사람, 하나님 나라가 좋아서 나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면 나를 따라올 수 없다.” 예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정치와 경제, 사회, 교육, 모든 것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향해서 갑니다. 사람들은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은 가셔서 왕이 되실 거라 믿고 따릅니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긴 가는데 등극하러 가는 게 아니라 나는 죽으러 간다. 죽임 당하러 간다. 죽임 당하러 가는 내 길에 같이 갈 사람은 오너라. 그런 사람은 장례식은 장례식대로 맡기고 나와 함께 이 길을 가는 사람만 나를 따를 수 있다. 준엄한 인생 고백, 인생살이에 대한 결단, 세상을 거꾸로 가는 결단, 이게 없으면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예루살렘에 간다. 죽으러 간다.” 당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죽으러 가면 그걸로 끝이지 간 길을 죽지 않은 채 되돌아 올 수는 없습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몇 십 년 살았든지 산 기간이 다르고 살아온 과정이나 역사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지나간 역사를 거꾸로 회복해서 살 수 있습니까? 지난 방식대로 복원시켜서 살 수 있습니까? 아무도 못합니다. 지나간 역사를 해석해서 살 수는 있지만 몸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의식하든 안하든 뒤를 보고 살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며 삽니다. 그 앞이 밝은 앞이면 얼마나 좋습니까? 어두운 앞이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우린 앞만 보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갔더니 환영받지 못하고 비난 받고 채찍을 맞고 우리 대신 죽어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수난의 정책입니다. “이 길을 가겠느냐?” 예수께서 그 길을 가셨습니다. 홀로 외롭게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완전히 되돌아 오셨습니다. 언제 어떻게 돌아오셨습니까? 죽지 않고는 못 돌아왔습니다. 죽은 다음에 부활하여, 새 인간으로 부활하여 그 길을 돌아와서 갈릴리까지 갔습니다. 이 교훈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과거 살아온 길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죽고 부활한 다음에나 가능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그냥 앞을 향해서 갈 뿐입니다.
베드로가 설명합니다. 우리는 앞을 향해서 살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고, 하나님의 은총이고, 부활의 은총입니다. 그것이 앞에 있는 것이고 가는 길이 아무리 험하고 힘들어도 그 길은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다고 고난이 온 것을 없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난을 받읍시다. 침 뱉음도 받읍시다. 아픔도 당합시다. 그러나 앞으로 가면서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 중에 아주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깨지더라도 속에 있는 것은 잃으면 안 됩니다. 토기 그릇은 한번 깨지면 복원할 수 없지만 다시 불에 들어가서 용해되면 질이 다른 토기그릇으로 태어납니다. 깨지지 않는 질그릇으로 태어납니다. 그것을 부활이라고 하십시오. 부활을 향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진 채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십자가 진 채로 그 길을 돌아오는 것은 인생의 역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길을 돌아온 것은 십자가 지고 죽고 부활절 아침에 부활하셔서 전혀 새로운 썩지 않을 사람으로 부활하셔서 다시 그 길을 나와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그렇게만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은 돌아올 수 없는 몸으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갑니다. 그게 신앙의 길입니다.
판문점에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이 다리를 건너간 사람은 그 모습대로는 못 돌아옵니다. 분단이 깨지고 마음대로 왕래가 허용되는 통일된 이후에는 돌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 이 땅의 사람들이 간 모습대로는 못 돌아오고 상황이 완전히 변해야, 분단이 없어져야, 그런 다리가 유명무실하게 옛날 역사로만 남아야 돌아올 수 있지 지금은 못 돌아옵니다.
십자가로 가는 길은 부활한 다음에야 십자가 길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부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나온 삶, 괴로움, 아픔을 버리지 마십시오. 버리고 살 수가 없습니다. 단 지나간 세월을 향해서 거꾸로 살지는 마십시오. 그렇게 살수가 없습니다. 살아가는 앞의 길은 희망과 생명, 기쁨이 있는 하나님 나라이고 제 뒤에 있는 길은 십자가라 이름하는 고난이 있는 길입니다. 고난을 향해서 살지 마시고 고난을 업고 사십시오. 교회가 몸입니다. 상징적으로 교회의 등에 십자가가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죄로 물든 악한 과거는 제가 등에 지고 버리지 않겠습니다. 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 앞으로는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부활의 아침이 있음을 알고 부활을 향하서 십자가 지고 살겠습니다. 그것이 수난입니다. 수난은 과거를 버리지 않는 것만이 아닙니다. 아픔을 지고 죽음까지도 어깨에 지면 부활이 맞아집니다.
고난당하고 수난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 오십시오. 지고 오십시오. 내가 같이 져 드립니다.” 부활절 아침을 향해서 같이 뚜벅뚜벅 걸어 나갑시다. 가십시다. 그곳에 가면 또 하나의 생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순절, 아프지만 우리 어깨에 집시다. 부활을 향하여 나가면서 집시다.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여러분에게 축복의 말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