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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원]통일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대북정책

발표 : 임 동 원 (전 통일부장관)(2010년 2월 23일 한국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주최 '제1차 한국기독교의 통일 준비 심포지엄'에서 발표)
자료출처 : 한국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1. 남북관계 : 네 가지의 핵심문제

지난 20년의 역사는 남북관계를 다루는데 있어서 네 가지의 중요한 문제가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통일문제에 대한 인식, 대북시각, 북한 핵 대응전략 그리고 대북정책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상호의존적이고 서로 불가분의 연관성을 갖고 있다.

기본적인 문제는, 통일을 어떻게 이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남북관계는 통일문제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력통일이나 흡수통일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통일을 과정으로 인식하고 점진적 단계적으로 평화통일을 지향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둘째, 북한의 미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두 가지 시각이 있어 왔다.  북한이 곧 붕괴될 것이라는 '붕괴 임박론'Imminent collapse theory과 점진적 단계적으로 변화해 나갈 것이라는 '점진적 변화론'Gradual system transformation theory이다.

1990년대초 동구권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될 때 “북한도 1-2년 내에 루마니아처럼 갑자기 붕괴될 것이다”(sudden collapse in a few years like Rumania)라는 것이 미국의 정보판단이었다. 그러나 곧 붕괴되지 않자 수년 내에는 붕괴될 것이라고 수정했다. 부시 정부에서는 '붕괴임박론'이 아니라 북한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붕괴론'으로 변질했다.
  이와는 달리, 북한은 동구권과는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사회 경제적 발전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아시아모델'을 따르게 될 것이다. 즉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공산당 1당독재체제 하에서 개방 개혁을 추진하면서 점진적으로 변화해 나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북한에 대한 미국의 봉쇄정책이 해제되면 변화가 촉진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점진적 변화론'의 입장이다.

셋째, 1990년대초부터 대두된 북한 핵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두 가지 전략이 있어왔다. 북핵문제에 남북관계를 종속시키는 '핵연계전략'Linkage Strategy과 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을 병행하여 추진하는 '병행전략'Parallel Strategy이다. 모두 북한의 핵개발은 용납할 수 없으며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하는 데는 다를 바 없으나 해결을 위한 접근방법이 다른 것이다.

연계전략은 북한이 핵을 포기할 때까지는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없으며, 전면적인 압박과 제재로 굴복시켜야 한다는 ‘先핵문제 해결, 後남북관계 개선’의 입장이다. 이와는 달리 병행전략은 북핵문제는 미․북 적대관계의 산물로서 미․북관계가 정상화될 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미․북관계 개선과 북핵문제 해결의 여건과 환경을 조성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넷째, 어떤 대북정책을 채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선택할 수 있는 대북 정책에는 이론상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냉전시대에 취했던 바와 같은 대결정책이다. 다른 하나는 무시방관정책이다. 남북관계 개선을 서두를 필요가 없고, 북한이 굴복하거나 붕괴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정책이다. 셋째는 포용engagement정책이다. 현재의 북한을 있는 그대로 상대하여 관계개선과 변화를 촉진하여 평화를 만들어 통일을 지향해 나가려는 정책이다.

2. 평화통일 : 목표인 동시에 과정이다.

우리민족의 지상과제는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룩해야 할 통일은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국가, 시장경제로 번영 발전하는 정의로운 복지국가, 그리고 적정한 자위력을 갖춘 평화애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의 최고당국자들이 처음으로 나라의 통일문제를 논의했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평화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남과 북이 통일문제에 관해 어느 정도의 공통인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한 쪽은 적화통일을, 다른 한 쪽은 흡수통일을 기도한다면, 또는 상대방이 그렇게 믿게 된다면, 관계개선이나 평화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단사상 최초의 정상회담에서 통일문제부터 논의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또한 필요한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족공동체통일방안(1989)>에 입각하여 통일논의를 주도했고, 김정일 위원장은 종래의 <고려연방제통일방안(1980)>과는 다른 이른바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설명했다. 그리고 통일방안에 대한 접점接點을 확인하고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한반도 특유의 통일모델에 공통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남과 북이 공통인식에 도달한 내용에 기초하여 바람직한 통일방안을 요약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평화의 원칙이다. 통일은 우리가 꼭 달성해야 할 목표이지만 반드시 평화적으로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의 공멸을 초래하게 될 전쟁통일이나 상대방을 굴복시켜야 하는 흡수통일은 우리의 통일방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통일방식은 평화를 만들어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다.
 
둘째, "통일은 목표인 동시에 과정"이라는 것이다. 평화적인 통일은 갑자기 이룩될 수 없으며, 점진적 단계적으로 이룩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우선 화해 협력을 통해 평화공존하며, 통일된 것과 비슷한 상황 즉, 남과 북이 서로 오고 가고 돕고 나누는 “사실상의 통일”de facto unification부터 실현하고, '법적 통일''de jure unification을 지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조속히 법적 통일부터 이룩해야 한다는 통일지상주의와 통일조급증을 배제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법적 완전통일은 남북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10-20년내에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데 대해 김정일 위원장은 40-50년이 걸릴 지도 모른다고 전망했다. 두 정상은 10%, 30%, 60%씩 이루어 나가는 ‘과정으로서의 통일’과 평화공존의 중요성에 대한 공통인식을 확인한 것이다.   

셋째, 평화와 통일의 긴 과정을 남북이 힘을 합쳐 공동으로 추진하고 관리해 나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협력기구인 '남북연합'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 지도자도 '남북연합'의 필요성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다만 북한은 그 명칭을 '낮은 단계의 연방'으로 호칭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6.15 남북공동선언>(제2항)을 통해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한다"고 남북연합의 필요성에 합의한 것이다.
 
양측 안의 공통성이라 함은,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체제를 유지하고 각기 외교권과 국방권을 보유한 주권국가이지만, 남과 북의 관계는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를 유지한다는 것. 통일을 목표인 동시에 과정으로 인식하고, 자주와 평화의 원칙에 따라 점진적 단계적으로 추진해 나간다는 것. 남북협력기구를 형성하여 평화와 통일의 과정을 공동으로 추진하고 관리해 나간다는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체제를 달리하는 남과 북이 즉각 연방제로 통일부터 하자는 <고려연방제통일방안>은 냉전시대의 유물이며 비현실적인 것임을 인정했다. 연방제가 되려면 외교와 군사권을 통합해야 하는데, 예멘의 실패에서 보듯이, 즉각적인 군대 통합이란 불가능하다는데 동의한 것이다. 그리고 체제를 달리하는 남과 북이 평화공존하며 협력하고, 변화와 창조의 과정을 통해 통일을 추구하자는 남측의 연합제가 합리적이고 현실적임을 인정하고 수용한 것이다. (피스메이커 p.102-105 참조)

일반적으로 국가연합confederation이란 회원국들이 각기 주권을 보유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약에 의해 창설 운영되는 복수국가 협력체로 정의된다. 통상 국가연합에는 중앙정부가 없으며, 국제법상의 주체도 아니다. 회원국들이 각기 외교․국방권을 보유하고 행사한다. 여기서 공동의 목표라 함은 反외세 독립 쟁취라든가 공동방위라는 정치․군사적 목적,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적 목적 등을 말한다. 한반도의 경우는 남과 북이 평화공존하며 통일의 과정을 공동으로 추진하고 관리하는 것이 남북연합의 목표가 될 것이다.

넷째, 통일은 남과 북이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배타적인 자주가 아니라 ‘열린 자주’를 말한다. 민족문제를 외세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도하여 국제적인 지지와 협력을 획득하며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문제는 민족 내부문제인 동시에 국제문제이다. 통일에 앞서 평화체제를  구축해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해야 한다. 미국과 북한의 적대관계가 해소되고 관계정상화가 되어야 한다. 정전협정이 평화체제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을 비롯한 관련국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또한 통일의 과정에서도 관련 당사국의 지지와 협조가 필요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장 예민한 문제 중의 하나는 주한미군 문제이다. 남북의 두 정상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많은 침략을 당한 역사적 경험으로 보아 통일 후에도 상당기간 미군의 한국 주둔이 민족의 이익에 부합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했다. 물론 북한에 대한 적대적 군대로 기능해온 주한미군의 위상과 역할의 변경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는 미‧북 관계정상화와 평화체제 구축과정에서 해결할 문제이다.
 
통일의 긴 과정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남과 북이 화해하고 서로 돕고 나누며 교류 협력을 실천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을 적이 아니라 평화와 통일의 동반자로 인정하고 화해하고 협력해야 한다. 화해와 협력이 평화와 통일의 출발점인 것이다. 
  또한 통일은 남이 가져다주거나 스스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도하여 다방면의 교류 협력을 통해 상호신뢰를 다지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양적 변화가 쌓여 질적 변화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남북의 두 정상은 민족의 진로를 밝히는 <6.15공동선언>을 채택했다. 합의내용 도 중요하지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남북합의가 처음으로 실천에 옮겨지고, 반세기의 ‘불신과 대결의 시대’를 넘어 ‘화해 협력의 새 시대’를 열었다는 사실이다.
 
<6.15공동선언>을 통하여 남과 북은 우선 실천을 통해 상호신뢰를 다져나가기로 합의한다. 당장에 이행 가능한 다섯 가지의 중점사업을 선정하여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즉 ①민족의 대동맥인 철도와 도로의 연결 운행, ②남측의 자본과 기술이 북측의 노동력과 결합하여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성산업공단의 건설(현재 1백여 남측 기업에서 4만여명의 북측 근로자가 일하고 있다), ③금강산 관광(190만명)을 비롯한 관광 사업의 확대, ④이산가족의 상봉(4천 가족 2만명 상봉), ⑤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의 왕래와 교류 협력 추진(남북 왕래인원이 1997년까지는 3천명에 불과했으나 그 이후 10년간 44만명에 이르렀다) 등이 그것이다. 한편 민주정부 10년간 년 평균 2억 달라 분량의 대북 인도적 지원이 제공되었다.

남북정상회담 후 8년 동안 많은 도전과 시련이 있었지만 <6.15공동선언>이 실천에 옮겨지면서 분단사상 처음으로 교류 협력이 시작되었다. 남북당국 간 대화뿐만 아니라 시민참여의 공간이 열리게 되었다. 접촉과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서로 적대의식이 수그러들고, 긴장이 완화되고, 상호신뢰가 싹트기 시작했다. 또한 민족공동체의식이 함양되면서 통일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접촉과 왕래, 교류와 협력을 통해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사실상의 통일'상황을 실현하기 위해 아직 갈 길은 멀고 험난하지만 소중한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3. 대북정책의 기조 : 화해와 교류 협력

대북정책은 북한의 미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데서부터 출발하게 된다. 공산권에 문호를 개방하는 7.7대통령특별선언(1988)을 발표한 노태우 정부는 북한을 적이라기보다는 평화와 통일의 동반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동구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북한 붕괴임박론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북한은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아시아 모델을 따르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김영삼 정부가 '붕괴임박론'에 기울어졌지만 다시 김대중 정부는 '점진적 변화론'의 시각에서 대북포용정책을 추진했다. 

최근에도 북한의 급변사태를 기대하면서 북한정권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도 들린다. 그러나 북한 붕괴론과 관련한 두 가지 가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북한이 궁지에 몰리게 된다면 '이판사판'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전쟁을 도발하게 되는 외부적 폭발explosion 위험이다. 다른 하나는 혼란과 내전으로 수백만명의 탈북자가 한국으로, 중국으로 몰려오는 패닉현상을 초래할 내부적 폭발implosion 위험이다. 민족의 참화를 초래할 이런 사태는 모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사태를 기대하거나 촉발하려 할 것이 아니라 예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년이나 된 북핵문제는 미․북 적대관계의 산물이며 미․북관계가 정상화되고 평화가 보장되어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역대 정부는 남북관계 발전을 통해 북․미관계 개선과 북핵문제 해결을 병행하는 '병행전략'을 추진했다. 한때 김영삼 대통령이 "핵 가진 자와는 악수할 수 없다"면서 ‘핵연계전략’을 채택하여 <남북기본합의서>를 백지화시킨 적도 있었다. 이명박 정부도 지난 2년간 '先핵폐기 後남북관게'라는 ‘핵연계전략’을 고집하여 남북관계가 경색되었으나 미․북협상의 진척에 따라
'병행전략'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대북정책의 목표는 화해․협력을 통해 북한이 변화(개방 개혁)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고, 평화를 만들어 남과 북이 서로 오고 가고 돕고 나누는 “사실상의 통일 상황‘을 실현하는데 두어야 한다. 화해 협력 변화 평화가 대북정책의 네 가지 키워드가 되어야 한다.

화해 협력정책은 결코 안보 위협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충돌과 분쟁의 가능성을 막기 위하여 평화를 지키면서peace keeping 동시에 안보위협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기 위하여 평화를 만들어 가려는peace making 것이다. 결코 약자의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이 아니라 강자만이 쓸 수 있는 공세적인 포용정책engagement policy인 것이다.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려면 보다 많은 접촉과 교류 협력을 추진하여 북한이 변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조성해 나가야 한다. 북한 주민들과 보다 많은 접촉과 다방면의 교류 그리고 인도적 지원 등을 통해, 동․서독일의 경우처럼, 주민들의 의식변화를 유도하고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가능한 환경을 조성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경제적 접근을 통해 정치적 통합을 지향해 나가는 것이다. 경제협력을 활성화하여 ‘민족경제공동체’를 형성 ‧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상호의존도를 높이고, 민족경제의 균형적인 발전을 도모하고 평화와 통일에 이르는 첩경인 것이다. 유럽국가들이 경제공동체EEC 형성을 통해 국가연합EU으로 발전하고 통일국가USE를 지향하고 있는 것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또한 독일 통일의 후유증에서 교훈을 얻어 정치적 통일에 앞서 경제적 통합부터 추진해야 할 것이다. 개성공단을 성공시키고 확대 발전시켜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경제공동체 형성‧발전과 함께 정치 군사적 신뢰구축조치와 군비감축을 병행하여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사실상의 통일'상황부터 실현해야 할 것이다. 경제와 군사를 병행 추진할 때 시너지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북한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 또한 중요하다. 반대자들은 인도적 지원을 '퍼주기'라고 비난했지만, 인도적 지원은 북한 인권문제 차원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북한에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같은 시민적 인권은 물론이려니와 먹고 살기 위한 생존적 인권도 최하의 상태임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식량과 비료, 의약품 등을 지원하는 것은 굶주려 죽어가는 동포들을 살리며 생존적 인권에 기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산권에서의 시민적 인권이 외부적 간섭과 압력에 의해 해결된 예가 없고, 개혁 개방으로 유도했을 때 독재적 통제가 완화되고 민주화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개혁 개방을 유도하는 화해협력정책이야 말로 인권문제 해결의 효율적인 길이라 할 것이다.
 
4. 독일통일의 교훈 : 교류와 협력을 통한 변화

흔히 독일통일을 흡수통일이라고 하지만, 동독시민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서독에 흡수당한 것이 아니다. 동독이 서독 헌법에 의해 병합되었다는 의미에서 흡수통일이라는 용어가 보편화되었지만, 사실은 서독에 호감을 갖게 된 동독시민들이 시민혁명과 자유선거를 통해 스스로 선택했고, 협상을 통해 '합의에 의한 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서독의 꾸준한 '접촉을 통한 변화'정책이 동독시민의 의식변화를 초래하는 추동력이 된 것이다.

1969년에 집권한 서독 브란트 정부는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1민족이 분단되어 2국가를 형성하고는 있지만, 양독은 서로 외국이 아니라며 특수관계를 유지하는 정책을 폈다. 종래의 힘에 의한 통일, 동독 고립화정책을 버리고, 평화공존하며 '접촉을 통한 변화'를 추구하는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서독은 동독에 대대적인 경제지원(매년 평균 $32억)을 제공하면서 이산가족의 상봉 및 재결합, 인적 왕래와 접촉(매년 상호방문 평균 7-8백만명), 교류와 협력을 통해 분단으로 인한 양독 시민의 불편과 고통의 최소화, 민족동질성 유지 등에 최우선 목표를 두고, 꾸준히 '사실상의 통일'상황 실현을 추진한 것이다. 그 결과 동독 시민들은 서독에 감사의 마음과 함께 신뢰감을 갖게 되고, 서독을 선망하게 되면서 의식변화가 진행된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30여년간 서독개신교회의 꾸준한 물질적․ 정신적 나눔운동이 독일통일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협상을 통해 동독정부가 원하는 물자(DM28억)를 보내주고 그 대가를 동독교회에 지불케 하는 한편 교회활동의 자유를 보장토록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성장한 비정치적 시민운동단체들(180여)이 시민혁명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라이프찌히 교회 신도가 주도한 5천여 시민의 평화적 촛불시위(89.9.27)는 즉각 전국 각지 교회로 확산되고, 마침내는 동베를린 1백만 시위로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동독시민들은 비폭력 시민혁명으로 공산정권을 물러나게 하고 자유선거를 통해 민주정부를 수립하였다. 새 정부는 '병합에 의한 조기통일'을 원하는 시민들의 뜻을 받들어 서독과의 협상을 통해 통일을 실현하게 된 것이다.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서로 원수가 되고, 불신과 대결의 냉전 반세기를 살아온 우리의 사정은 독일과는 다르다. 더구나 미‧북 적대관계와 북한의 핵개발이 남북관계 진전의 걸림돌로 작용해 왔다. 또한 분단체제에 안주하려는 남북의 수구세력에게는 6.15의 성취가 위협으로 느껴지고, 북핵문제로 남북관계 진전의 발목을 잡으려는 경향도 보여 왔다. 그래서 문제해결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이 나갈 길은 명백하다.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남북이 화해하고, 서독의 경험을 본받아 교류와 협력을 통해 변화를 추구하며 경제공동체를 형성하여 '사실상의 통일'상황부터 실현해야 한다.

5. 선으로 악을 이기는 통일

남과 북은 지난 20년간 많은 난관과 도전을 극복하면서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씩 달려왔다. 탈냉전의 남북관계 발전방향을 제시한 <남북기본합의서> (1991)와 이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 <6.15공동선언>(2000) 그리고 남북관계를 확대발전시키기로 한 <10.4선언>(2007)을 통해 전진을 계속해 왔다.
  이제 우리는 체제경쟁의 승자로서, 또한 가진자로서의 아량과 자신감으로 화해와 협력으로 변화의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며 평화와 통일을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미 합의한 대로 남과 북이 화해하고,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 존중하고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아니하며,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교류 협력을 활성화해야 한다. 보다 많은 접촉과 왕래, 인도적 지원 등을 촉진하여 분단으로 인한 겨레의 고통을 덜어주는 한편 상호신뢰를 다져나가야 한다.

새해를 맞아, 한반도문제 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온 미‧북 적대관계와 북핵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미‧북관계 개선과정은 정전상태를 평화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유지해야할 직접당사자인 남과 북은, 동․서 독일이 힘을 합쳐 전승 4개국을 설득하고 협상하여(2+4) 통일을 이룩했듯이, 힘을 합쳐 한 목소리로 정전협정 당사국들을 설득하고 협상(2+2)을 통해 '분단을 고착시키는 평화체제'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할 것이다.  

2010년대에 우리는 남북연합을 형성하여 남북이 힘을 합쳐 변화와 창조의 과정을 통해 평화와 통일의 길에 가로놓인 어려운 과제들을 효율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경제공동체를 형성‧발전시키면서 군비통제를 병행해 나가고,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를 구축하여 '사실상의 통일'상황을 실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하지 아니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 붕괴가 아니라 변화를 유도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고 화해하고, 굶주린 원수를 도와 협력하며, 평화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로마서 12:17-21)
  평화와 통일의 씨앗을 꾸준히 심고 물주고 정성껏 가꾸어 나갈 때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고 평화의 꽃을 피워주시고 통일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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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된 반공 담론, 이분법적 인식 통해 기득권 유지 기여"

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연합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공 관련 담론을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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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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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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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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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