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서 54:7-10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다시 불러들이겠다. 분노가 북받쳐서 나의 얼굴을 너에게서 잠시 가렸으나 나의 영원한 사랑으로 너에게 긍휼을 베풀겠다. 너의 속량자인 나 주의 말이다. 노아 때에, 다시는 땅을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내가 약속하였다. 이제, 나는 너에게 노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너를 꾸짖거나 벌하지 않겠다. 비록 산들이 옮겨지고 언덕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은총이 너에게서 떠나지 않으며, 평화의 언약을 파기하지 않겠다." 너를 가엾게 여기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아멘.
고린도후서 1:3-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요,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요,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우리도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칩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며,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위로로, 우리가 당하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견디어 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거는 희망은 든든합니다. 여러분이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같이, 위로에도 동참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12:24-26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 아멘.
설교문
<죽어야 산다>
사람은 누구나 다 살고 싶습니다.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나려고 노력하고 죽음이나 고통은 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말을 보면 몸은 그렇게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말은 자꾸 죽고 싶다고 합니다. 배가 고파서 죽겠다는 사람을 데려다가 밥을 배불리 먹였더니 배불러 죽겠다고 합니다.
좋아도 죽겠다고 하고 미워도 죽겠다고 하고 왜 이렇게 죽겠다는 말을 자주 쓰는지 생각해 보았는데 살고 싶다는 뜻을 반대로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안해서 살고 싶다고는 말을 못하고 죽을 정도로 살고 싶다는 뜻이리라 생각해 봅니다.
최근 몇 년 동안에 저희 주변에서 참 존경하는 분들이 많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특별히 종교인들 중에 강원용 목사님, 김수환 추기경, 최근에 불교의 법정 스님께서 떠나셨는데, 어차피 인간은 가야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 속에 안 가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 이 세 분의 이름을 언급했습니다.
이분들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들은 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내드리지 않았습니다.’ 강원용 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강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담으면서 저희들이 썼던 말입니다. “목사님은 가셨다. 그러나 우리는 목사님을 보내지 않았다.” 죽음을 두고 하는 우리들의 고백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히게 되고 죽음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영원히 사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어느 분이 돌아가셨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누구도 토를 달지 않습니다. 죽음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들을 보내드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 주관적 의지입니다. ‘가셨지만, 가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안 보냈습니다. 여기서 제가 모시고 살고 싶습니다.’ 본인의 신뢰가 있는 의지의 고백이고 주관적 고백입니다. 그래서 보내지 않은 것이 입증되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습니다. 내가 결단하고 모시고 살면 보내지 않은 것입니다.
‘죽음’과 ‘죽음 이후’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죽음 이후의 이야기는 신앙고백이지, 객관적, 과학적, 물리적, 화학적, 어떻게 붙이든지 간에 객관적 사실과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죽어서 우리 곁을 떠났다는 사실은 인류가 태어나면서 갖고 있는 모든 역사의 현실이고 인간 실정의 현실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예수를 보내고 싶지 않다던 제자들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살아나셔서 제자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살아계실 때의 모습 그대로 나타나셨지만 그러나 썩지 않는 육으로 다시 제자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나는 부활의 주다. 누구든지 나와 함께 죽으면 나와 함께 같이 묻히면 지금 부활한 나처럼 죽지 않는 몸으로 살아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훌륭한 분들을 보냈는데도 안 보냈다고, 주관적으로는 보내지 않았다고, 내가 같이 부둥켜안고 살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누구나 용납합니다. 다른 사람이 거부하거나 실증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자신의 주관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사랑하는 부모님을, 사랑하는 자식을 보낸 일이 없다고 가슴에 품고 살면 그걸로 함께 사는 겁니다.
지금도 이러한데 2000년 전에 예수라는 사람이 살아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서 나 예수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증인도 있습니다. 그 증인들이 고백을 해서 성경을 쓴 것을 우리가 읽고 오늘 우리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을 제가 믿습니다.” 믿음은 본 사람에게는 실체이지만 보지 않은 우리들에게는 우리가 주관적으로 의지하고 믿고 결단하고 고백하면 그것이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신앙입니다. 보지 않고도 고백으로 믿을 수 있으면 현실이 됩니다.
사람이 살아서 숨 쉬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을 ‘생명’이라고 하는데 서양의 언어, 동양의 언어에서 생명이라는 말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감히 말씀드리면 아직 천학비재 하긴 합니다만 우리가 사용하는 ‘생명’이라는 말이 성경말씀에 나오는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를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나라 말도 우리말의 ‘생명’만큼 정확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게 하셨습니다. ‘생(生)’,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받고 감사하며 삽니다. 생(生)이 있습니다. 산다고 다 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사는 것이니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생이 보람이 있지 살아있다고 해서 모두가 산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 말은 두 번째 있는 ‘명(命)’과 같습니다.
‘생(生)’, 하나님이 주신 객관적 현실, 그리고 살아있는 모습은 누구나 ‘생’하고 있습니다. 철학하는 사람들이 어려운 말로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객관적 사실이고 실체다(Indikativ, 직설법)’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생이 있다고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답게 살아야 합니다. 생명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명(命)’, 서양철학에서는 ‘Imperativ, 명령’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대로 살면서 실천하며 삽니다. 단순히 사는 것만이 아니라 남들 보기에, 저 자신이 보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떳떳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와서 제자가 되어라.” 이것은 생이고, “제자가 되고 구원을 받으려면 내가 하는 말을 지켜야 한다.” 이것은 명입니다.
강원용 목사님,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을 우리가 아쉬워하는 것은, 그분들이 ‘생’했기 때문이 아니고 그분들이 행한 ‘명’이 너무 아름답고 귀해서 그분들을 따르고 싶고 그분들이 가졌던 명을 우리는 간직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들을 보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법정 스님을 무소유의 사람이라고 얘기해서 정말 아무것도 안 가진 것인가 했더니 그분이 쓴 글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이 아니고,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다.’ 굉장히 현실적인 말씀이었습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안 가진 게 무소유가 아닙니다. 필요한 것만 갖고 그 이외의 것은 갖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저희들한테 무소유에 관한 아주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배고파 우는 사람도 먹을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거면 생명이 보장됩니다. 아마 법정 스님도 무소유를 그렇게 이해한 것 같고, 일용할 양식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일용할 양식이면 생명의 주체로서 삶이 보람되고 흡족할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의 범위나 종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우리사회 속의 부조리, 불의, 버리고 싶은 것들은 사실 충분한 일용할 양식을 뛰어넘는 잉여양식 때문이 아닙니까? 권력을 필요한 만큼 하나님이 주셨으니 받아서 선용하면 되는데 더 가지려고 하다가 권력이 부패하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신 양식도, 모든 축복도 일용할 양식에 해당하면 좋은데 일용을 뛰어넘다 보니 불의가 행해지는 거 아닙니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축복으로 알지만 하나님이 주신 충분한 축복을 넘어서려고 하는 것은 우리한테 비참함을 가져옵니다. 비참하다는 게 죽는 것만 비참한 게 아닙니다. 감사하다는 것이 일용할 양식을 뛰어넘어야 감사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일용할 양식은 뭡니까? 어느 만큼이면 여러분은 풍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일용할 양식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제 자신 앞에서 이걸로 충만합니다. 더 이상 가지지 않아도 제가 충만합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많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지만 받은 것을 감사할 줄 아십니까?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는 사람이고, 가지면 가질수록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일용할 양식보다 많이 가지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행복이 없습니다.
사람은 많이 갖고 싶어 합니다. 사실 소유는 살아있는 생명을 위한 수단입니다. 소유와 존재, 생명이란 존재보다 중요하고 존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정부분의 소유가 있어야 하는데 살아가는데 충분한 소유가 일용할 양식이면 됩니다. 소유(Haben)와 인간 존재 그 자체(Sein), 생명과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소유입니다.
인간의 비극은 존재 자체가 생명의 목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소유는 존재라는 목적을 지탱해주는 수단입니다. 거꾸로 수단이 목적을 지배해서 소유가 존재를 압제하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이 풍성히 주시는데 그 풍성한 일용할 양식을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생명입니다. 존재(Sein)입니다. 그 존재는 끝이 있어서 땅에 떨어져 묻히게 됩니다. 누구나가 묻힙니다. 다 죽습니다. 밀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땅에 묻히는 것과 씨앗이 뿌려지는 것이 죽고 썩는 것인데, 썩어서 뿌리가 나고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는 씨앗이 있는가 하면 죽어서 그걸로 끝나는 열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모든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에 있지 않고, 떨어져 죽는 씨앗 중에 뿌리가 나고 줄기가 나서 수많은 열매를 맺는 것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고통을 당합니다. 수난을 당합니다. 질병에 걸립니다. 죽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들을 우리 인생에서 ‘존재’로 볼 수 없습니다.
밀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서 끝나지 않고 썩어서 뿌리를 내리고 재생하여 열매를 맺고 무한한 새로운 생명을 창출합니다. 이 부분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러니 고통을 당해도 다시 태어나는 고통을 당하자. 죽더라도 죽음이 끝이라고 보지 말고 다시 태어나자. 죽는 날이 생일이라고 하자.”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죽는 날이 어떻게 생일입니까? 그 생일을 믿는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는 날로 지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존경하는 그분들을 안 보냈습니다. 계속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다고 고백하듯이 예수는 우리한테 있기를 원합니다.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서 증거를 보여주시고 나와 함께 있자고 하십니다.
죽는 날은 제삿날이 아니고 생일입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신앙고백의 표현입니다. 그렇게 믿으면 오늘을 살아가는 죽기까지의 생이 훨씬 아름답고 힘이 있고 의미가 있을 겁니다. ‘생’하고 ‘명’하라. 오늘 수난절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죽음 이후의 부활은 하나님께 맡깁시다. 반드시 있다고 믿고 맡깁시다. 그렇게 맡기고 사는 사람은 지금 생이 보람됩니다. 지금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신앙을 가지고 선교를 했는데 주후 70년의 로마제국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셨고 유대 땅은 로마제국에게 망했습니다. 성전도 다 파괴되었습니다. 그 때 모든 유대 땅 사람들, 다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흩어진 중에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이 로마였습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의 황제들 중에 네로라는 황제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유는 지하에 방을 만들어놓고, 살도 먹고 피도 마시면서 밀교행위를 하고, 정권을 반대하며 로마를 반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밀교가 로마제국이 국교로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나게 뻗어갔습니다. 지하에서도 뻗어갔습니다.
역사학자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사람, 과부, 고아, 그리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항상 문안하고 돌봐주는 걸로 일생에 필생의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두 번째는 순교를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죽는 모습, 웃으며 죽는 모습, 그리고 자기들을 핍박하는 원수들에게 저주를 퍼붓지 않고 원수를 용서한다고 하는 기백에 놀랄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로마가 네로황제 시대에 페스트에 감염되어 수십만 수백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로마 근방의 값싼 땅을 많이 사서 공동묘지를 만들어서 배고프고 가난하고 친인척이 없는 사람들이 죽으면 기독교 공동묘지에 묻어주고 장례예배를 드려주었다는 것입니다.
네로황제 직전에 율리우스라는 황제는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는데 이 땅 로마에 있는 유태인 중에는 거지가 한 사람도 없다. 지독한 백성이다. … 로마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갈릴리 사람들-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빈곤과 힘듦에도 불구하고 핍박하는 로마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장례식을 기쁨으로 치러주었다. 이것은 스캔들이다.” 왕의 고백입니다.
세월이 지나서 기독교는 흉측한 네로와 로마제국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커지고 결국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는 시대에 이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왜 이렇게 희망을 가졌습니까? 사람은 다 죽고 고난을 당합니다. 어느 곳이나 똑같습니다. 우리는 죽으면 땅에서 썩고 다시 뿌리가 나서 줄기를 내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살아갑니다.
고아와 가난한 사람을 장례식 시켜주는 것도 고마웠고, 삶에 생기가 넘쳐났고 살아가는 의미가 생겼습니다. 소유는 없었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일용한 양식밖에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살아야 한다는, 죽어도 다시 산다고 하는 ‘명’이 ‘생’ 속에 들어와서 희열을 주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신학적 사고방식은 ‘우리는 존경스러운 존재다. 우리한테 소유(Haben)는 우리의 아름다운 존재를 채워가는 수단이다. 수단이 우리 존재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수단은 목적을 위해서 종적하면 축복입니다. 목적이 수단에 예속되면 그것은 저주입니다.
한 알의 밀알은 땅에 떨어져 죽습니다. 인간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썩어서 다시 태어난 씨앗은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앙은 이런 확신이고 실제로 태어나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다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 거듭남을 매일 체험하며 삽시다. 수난 속에 부활을 맛보며 삽시다. 그 영원한 부활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삽시다. 그렇게 받는 것이 오늘의 수난의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